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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슬픔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 버린 것들>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이하 <우리가…>)은 프롬의 설명처럼 ‘분리’에 대한 깊은 공포를 지니고 있는 인간들이 맞닥뜨린 절망적 순간에 관한 영화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 버린 것들>
능력 있는 건축업자이며 좋은 가장이기도 한 브라이언(데이비드 듀코브니)은 우연한 사고에 휘말려 죽게 된다.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에 오드리(할 베리)는 큰 충격을 받게 되고 아이들 역시 아버지의 부재의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오드리는 거리에서 마약중독자로 살아가지만 남편의 죽마고우인 제리 선본(베노치오 델 토로)을 찾아 차고에서 지내게 한다. 친구를 잃은 제리 역시 약물 중독자 모임에 나가며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려고 하면서 브라이언의 아이들과 좋은 관계를 맺게 된다. 그러나 오드리만은 제리를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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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은 인간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공포는 고립과 추방이며, 그러하기에 인간은 타인과 결합과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고 했다. 그는 『사랑의 기술』에서 현대인이 사랑에 집착하는 이유는 ‘분리’에 대한 불안 때문이라고 이야기했으며,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이러한 분리 상태를 극복해서 고독이라는 감옥을 떠나려는 욕구라고 설명했다. 더 나아가 프롬은 ‘사랑’은 누군가를 소유한다는 욕망과는 떨어진, 엄밀한 이성적 행위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이하 <우리가…>)은 프롬의 설명처럼 ‘분리’에 대한 깊은 공포를 지니고 있는 인간들이 맞닥뜨린 절망적 순간에 관한 영화다. 이 영화에서 오드리와 제리는 그들이 가장 사랑한 한 사람을 ‘갑자기’ 잃게 된다. 그 사람은 상대방의 내면의 빛을 품어주는 사람이었고, 따라서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의 절대적인 존재감 앞에서 급격하게 무너져 버린다. <우리가…>는 이를테면 정신적인 ‘펀치 드렁크’에 빠져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우리가…>는 통상적인 할리우드 영화들이 줄거리를 뒤쫓으며 가족 간의 화해를 그리는 데 비해 보다 내면의 상처를 표현하는 데 애를 쓴다. 가령, 이 영화에는 사람들의 눈이나 귀와 같은 얼굴 부분들을 크게 화면에 담는, 익스트림 클로즈업 장면들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불안한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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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 영화의 많은 장면들은 미세하게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로 촬영되었는데, 이는 마치 다큐멘터리 같은 사실감을 주는 동시에 카메라와 마찬가지로 뒤흔들리는 인물들의 심리를 표현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런 방법은 관객들에게 불안감을 주어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심리적 파동을 유사하게 느끼는 효과를 준다. 일반적인 할리우드 영화와는 사뭇 다른 이 영화의 독특한 느낌은 이 영화의 연출자가 <브라더스> <애프터 웨딩> 등을 연출한 바 있는 덴마크의 여성 감독 수잔 비에르이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녀는 덴마크에서 찍은 전작들에서도 섬세한 인간 심리를 담아내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바 있다.
기존의 할리우드 영화와 다르게 낯선 느낌을 주는 이 영화의 연출법은 할 베리와 베네치오 델 토로라는 아카데미 연기상 수상자 출신의 메소드 연기자들과 만나 강렬한 느낌을 부여한다. 특히, 대사가 그다지 많지 않은 캐릭터를 연기하지만, 스크린을 압도하는 베네치오 델 토로는 삶에 지쳐버린 마약중독자 역을 기가 막히게 연기한다. 아카데미 수상 이후 주로 섹시한 이미지의 스타 연기자로 블록버스터에 출연하는 데 힘을 쏟았던 할 베리 역시 <몬스터 볼>을 연상시키는 신경쇠약에 걸린 여자 연기를 훌륭하게 해낸다. 이 영화는 이를테면 배우들의 얼굴 자체가 스펙터클이라고 할 수 있으며 두 배우들의 연기는 영화의 연출에 걸맞은 탁월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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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영화의 구조는 영화의 현재적 시간에는 소멸되어 버린 브라이언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데이비드 듀코브니가 연기하는 브라이언은 영화 전체를 양분하고 있는 오드리와 제리의 기억 속에서 재구성되는 인물이지만, 엄연히 이 영화의 인물 관계도에서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오드리와 제리는, 통속적으로 표현하자면 브라이언을 중심으로 삼각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사이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제리는 브라이언을 추억하는 식사 장면에서 오드리가 알지 못한 브라이언에 대한 기억을 말하고, 오드리는 자신이 모르는 브라이언에 대한 기억을 지니고 있는 제리를 질투한다. 오드리는 부재한 남편 대신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를 구원하기로 마음먹지만, 그 친구가 지니고 있는 남편의 그림자를 감당하지 못한다.
이 영화의 초반부에서 브라이언은 이미 부재한 상태지만 실제로는 영화의 끝까지 뚜렷한 존재감을 지닌 인물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텅 비워져버린 중심을, 남은 인물들이 메워나가는 영화다. 이 영화의 전반부에서 제리를 구원하려고 하는 것은 오드리지만 실제로 구원받는 인물은 오드리다. 이 영화에서 제리는 성자와 같은 친구 대신에 모든 고통을 감내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대신, 오드리와 그의 두 아이들을 구원한다. 물론 제리 역시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었고 브라이언이 그를 구원할 유일한 인물이었다. 결국 이들은 서로를 구원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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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는 일종의 유사 가족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남녀 주인공들은 결코 연인 사이가 되지는 않는다. 이 영화는 달콤한 로맨스 대신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대해 주목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사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방법을 다시 배우게 되기 때문에, 성숙한 사랑의 감정에 이를 만한 여유가 없다.
이들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을 배우게 된다. 영화의 제목처럼 주인공들은 불에 타 사라져버린 것들의 목록을 되새기는 헛된 노력을 하는 것보다 다른 좋은 것들을 찾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마치 성장통을 겪는 아이들처럼 이제 막 자신들의 고통으로부터 간신히 벗어나게 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마약과 관련된 자신의 꿈 이야기를 씁쓸하게 이야기하는 제리의 모습은 이들이 이제 그들의 감정에 솔직해졌으며 상실 자체를 현실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한다.
이제 막 ‘상실의 고통’이라는 껍질에서 탈피한 이들은 영화가 끝이 날 때쯤에야 정말로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를 갖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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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배우들의 연기 자체가 스펙터클이다. 이 영화 속의 공간은 인물들의 심상처럼 텅 비워져 있거나 어둠에 가려져 있다. DVD의 영상은 검은색 표현력과 배우들의 얼굴들이 잘 표현되는 것이 관건인데, 짙은 색감의 DVD 영상은 그런 필름 질감을 잘 살려내고 있으며 주름진 배우들의 얼굴들이 잘 살아 있는 탁월한 해상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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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사운드 디자인은 조금은 독특한 방식으로 디자인되었는데, 영화 속에 사용되는 음악은 경쾌하다고 하더라도 생경한 느낌을 준다. 영상 기법과 마찬가지로 음악의 사용 역시 일종의 소격 효과를 낸다고 할 수 있는데, DVD는 이런 영화의 음향 표현 의도가 잘 살아있다. 나직하게 대사를 내뱉는 대사 처리가 깔끔하며, 세심하게 사용된 음악 표현 역시 나무랄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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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플먼트는 양적으로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다. A Discussion About THINGS WE LOST IN THE FIRE (20분 25초)는 감독 수잔 비에르, 제작자 샘 멘데스, 주연 배우인 할 베리 등의 인터뷰와 영화 속의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는 메이킹 필름이다. 진지하게 영화에 대해 설명하는 영화 제작진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다.그 외 삭제 장면 (9분 26초)과 극장용 예고편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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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비에르>,<할리 베리>,<베니시오 델 토로>9,210원(7%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