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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씀 들어 받잡나니

하나, ‘처음’을 두고 그런 걸 일컬어 ‘처음’이라 하지 않는다면 ―생뚱맞을뿐더러 시답잖기까지 한 예를 들어, 남들 키스 백날 쳐다봐야 내 것이 아니듯― 학교 도서관 나무 서가에 단정하게 꽂혀 있던 『만남』이 바로 다산, 그와의 진지한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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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커트 머리 여고생이던 1986년에 아시안게임이 열렸다. 처음으로 치르는 대규모의 국제적인 행사인데다가, 이 년 뒤 개최될 올림픽의 예행연습이라는 의미도 있어서 전 국가적으로 꽤 야단을 떨었던 기억이 있다. 몸과 맘이 꺼칠하던 우리들도 교실 천장에 매달린 TV를 통해 감질나게나마 그 열기에 섞여들었다. 같은 또래인 탁구 유남규 선수의 활약에 꽤 흥분하기도 했었다. 비인기 종목에 응원단으로 단체 동원되어, 수업까지 빼먹고 경기장을 들락거린 일은 지금 생각해도 즐겁다.

그리고 지금에야 참 극성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서도, 그 기간에 외국손님 접대용으로 영어자막 깔리는 특집드라마가 방영됐었다. 탤런트 전무송 씨가 주연한 <원효대사>가 그 중 하나였다. 요석공주 얘기며 설총이 얘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중생에 대한 사랑 얘기 등등. 그런데 허구 많은 에피소드 중에 지금까지도 내 속에 저장되어있는 장면이 둘 있다.

하나. 잘 익은 홍시가 주렁주렁 매달린 감나무 밑에 작대기 고쳐 든 동자승들이 오밀조밀 모여서는 그거 하나 따 먹겠다고 수선을 피운다. 지나던 대사께서 자상한 웃음으로 지켜보시다 한 말씀 하신다. 까치 먹을 것도 몇 개는 남겨두라고.

언젠가 한 식품회사 광고에서도 그 엇비슷한 내용이 나왔던 것으로 안다. 지금도 사람들이 묵 쑤어먹겠다고 산짐승 식량인 도토리를 죄다 긁어오는 바람에 겨울마다 부러 식량을 풀어야 하느니 만큼, 고금을 아울러 아직도 유효한 충고 아니겠는가?

둘. 젊은 스님이 절간 마당에 떨어진 마른 낙엽들을 자기 키만 한 빗자루로 아주 깨끗이 쓸고 있다. 또한 다감한 눈길로 바라보시던 대사께서 한 말씀 하신다. 가을마당엔 나뭇잎도 뒹굴고 그래야 하느니. 처음엔 의아함에서 시작해 점점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겠습니다, 라는 의미의 잔잔한 미소로 표정의 변화를 보이던 젊은 스님이, 등 돌려 뒷짐 지고 가시는 대사의 뒷모습에다 큰절 올리던, 그랬던 마지막 장면.

염화시중의 분위기였다. 왠지 뭔가 있는 것 같고, 나 혼자서만 엄청난 비밀을 들은 것 같고, 여하간 지금까지와는 다른 게 느껴지던 그 장면에 대한 기억이 알게 모르게 밑바닥에 깔려 있는 상태에서, 다산을 처음 만났다, 고 하면 사실은 그게 아닌 것이 수업 시간에 목민심서니 하면서 외웠으니까. 이름과 압축된 생애, 업적 그런 건 대강 알고 있었으니까.

하나, ‘처음’을 두고 그런 걸 일컬어 ‘처음’이라 하지 않는다면 ―생뚱맞을뿐더러 시답잖기까지 한 예를 들어, 남들 키스 백날 쳐다봐야 내 것이 아니듯― 학교 도서관 나무 서가에 단정하게 꽂혀 있던 『만남』이 바로 다산, 그와의 진지한 처음이었다.

『만남』은 다산 정약용의 일대기를 그린 한무숙의 글이다. 한무숙은 이 이야기로 1986년 제7회 대한민국문학상 대상 수상자가 되었다고 전한다. 공교롭게도 내가 <원효대사>의 두 장면에 꽂히던 바로 그해였다.

가톨릭 인터넷 서점 ‘바오로딸’에서는 『만남』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과 그의 조카 정하상(바오로)을 중심으로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를 있게 한 집요하고도 처절한 뿌리 내림의 과정을 그린 감동적인 소설이다. 수차에 걸쳐 천주를 배반하였으나 고난과 통회의 값진 생애를 살았던 다산. 그와는 달리 아무런 흔들림이 없이 천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던 그의 조카 정하상(바오로)의 순결한 삶. 고루한 사람들의 혐오와 증오로 인한 박해. 배교자들의 비열한 배신. 지방 관리들의 변덕과 포졸들의 치사한 사욕과 만행으로 교우들이 겪는 끝없는 괴로움과 시달림. 그런 고충 속에서도 전력을 다해 투쟁하는 곧고 열심인 신자들의 모습과, 특히 교회의 발전을 위해 성직자 영입 운동을 일으키는 등 교회를 위해 생명을 바친 평신도들이 바로 우리의 순교 성인들임을 잘 보여 준다. 순교자의 피를 물려받은 우리는 이 진리의 신앙을 지혜와 용기로 간직하고 매일을 순교하는 자세로 살아야 함을 일깨워 준다.

읽는 내내 흔들림, 혹은 울렁거림. ―물론 그때가 1988년이었기 때문에 지금 읽는다면 내가 영판 다른 걸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럴까 봐 무서워 다시 읽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만약 내가 천주교 신자라면 『만남』으로 인해 느낀 모종의 감정들이 ‘은혜를 받았다’는 일종의 종교 체험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느낀 건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태 전 드라마 <원효대사>를 봤을 때의 그것이었다. 그 이후로는 정약용이라는 이름이 건성으로 지나치기에는 예사롭지 않은 이름이 되었다. 쥐뿔도 아는 게 없으면서. 솔직히 그의 저서는 내 능력 밖이었다.

한데, 왜 흔들렸냐고?

사람이 무지막지한 전쟁이나 위대한 발명, 뛰어난 두뇌 등 그 이름을 후세까지 남길 수 있는 방법이 여럿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인품으로 기억된다면 향기롭지 않겠는가! 원효대사와 다산이 그랬다, 나에게는. 물론 자신은 없었다. 소설 속의 그는 대부분이 허구일 것이 분명했기에. 하지만 내 판단에 하자가 없었음을 몇 년 전 한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뒷골목에 출현한 다산이었다.

다산의 문집에 ‘숙보(菽甫: 김석태의 자)의 제문(祭文)’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반촌(泮村) 사람 김석태의 제문이다.

‘지극한 정성은 하늘에 통하고 지극한 정은 땅까지 통하였네. 깬 것도 나를 위해 깨고 자는 것도 나를 위해 잤었네. 가정에 소홀하면서도 나를 위해서는 치밀하였고 달리고 쫓는 일에는 동작이 느렸으나 나를 위해서는 빨랐네. 나의 잘못을 남이 지적하면 칼을 뽑아 크게 성내었고 사람이 나와 잘 지내면 그를 위해 온 힘을 다 쓰더니, 혼마저 천천히 감돌며 아직 내 곁에 있네. 구원(九原)이 비록 멀다고 하나 앞으로 서로 생각하리.’

반촌인 중에 이처럼 좋게 기록에 남은 이는 김석태가 유일할 것이다. 당시 사회의 기준으로 볼 때 보잘것없는 인물에 대한 다산의 제문이 여간 다정스럽지 않아, 다산의 인품을 보는 듯하다.


그런데 이번엔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였다. 열부, 즉 남편을 따라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킨 여인들에 대한 그의 견해가 나를 사로잡았다.

다산은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가 남편을 따라 죽었다고 해서 그 모두를 열녀라 하지 않았다. 그가 인정한 불가피한 경우는 이랬다. 남편이 맹수나 도적에게 핍박당해 죽은 지경에 호위하다가 뒤이어 죽는 경우, 자신이 도적이나 치한에게 강간당할 위기에 굴하지 않고 죽은 경우, 그리고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자신의 뜻에 반하여 부모 형제가 개가를 강요하므로 저항하다가 역부족이어서 죽음으로 맞선 경우, 그리고 남편이 원통한 한을 품고 죽자, 남편을 위해 정상을 밝히려다 끝내 밝히지 못하고 형벌을 받아 죽은 경우. 그러니 그저 남편이 편안히 천수를 누리고 안방 아랫목에서 조용히 운명하였는데도 아내가 따라 죽는 것은 스스로 제 목숨을 끊는 것일 뿐 아무것도 아니라는 비판이었다. 당시로서는 분명히 혁신적이었을 것이다. 누가 알랴, 다른 양반네들로부터 튄다고 왕따를 당했을 런지.

나는 확고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천하에서 가장 흉한 일이라고 여긴다. 따라서 이미 의에 합당한 자살이 아니라면 그것은 천하의 가장 흉한 일이 될 뿐이다. 이것은 단지 천하의 가장 흉한 일인데도, 관장(官長)이 된 사람들은 그 마을에 정표하고 호역을 면제해 주는가 하면 아들이나 손자까지도 요역을 감해주고 있다. 이는 천하에서 가장 흉한 일을 서로 사모하도록 백성들에게 권면하는 것이니, 어찌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 내가 어찌 다산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러고 나니 그가 자식들에게 글을 남겼다면 그 또한 예사롭지 않았을 거라는 짐작이 들었는데, 뒤져보니 역시였다. 유배지에 묶인 형편이라 일일이 자식을 챙길 수 없는 마음을 대신 적어 보낸 편지들을 보면 그렇다.

다산 정약용
천하에는 두 가지 큰 기준이 있는데 옳고 그름의 기준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이롭고 해로움에 관한 기준이다. 이 두 가지 큰 기준에서 네 단계의 큰 등급이 나온다. 옳음을 고수하고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높은 단계이고, 둘째는 옳음을 고수하고도 해를 입는 경우이다. 세 번째는 그름을 추종하고도 이익을 얻음이요, 마지막 단계는 그름을 추종하고 해를 보는 경우이다. (…) 화와 복의 이치에 대하여 옛날 사람들도 오래도록 의심해왔다. 충과 효를 한다 해서 꼭 화를 면하는 것도 아니고 방종하여 음란한 짓을 하는 놈이라고 꼭 박복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착한 행동을 하는 것은 복을 받을 수 있는 당연한 길이므로 군자는 애써 착하게 살아갈 뿐이다.

툭하면 권선징악이 부정되는 세상에 대한 현재진행형 염증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알려주는, 그래서 들어 받자와야 할 말씀이었다. 편역한 박석무 님은 책머리에 이렇게 글을 달아놓았다.

편지의 여러 곳에 보이는 효(孝)와 제(弟)에 대한 다산의 견해를 종합해보면 이익사회의 속성을 인정하면서도 이익사회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회구성원의 윤리의식이 튼튼해야 한다고 여기고 다산은 윤리의식의 근간인 효와 제를 강조한 것 같다. 이 점에서 당시의 지배층 유자들의 지배논리의 충이나 효와는 차이가 있다. 썩은 유자들은 민중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지배체제유지만을 위해 무조건의 충효관념을 주장했으나 다산의 효제개념은 인간이 지닌 인간이기 위한 윤리개념이고 인간관계의 원활한 화해를 위한 사회적 결속의 원리로 주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다산은 모든 학문의 근본은 효와 제라 하였고 인간으로서의 양심, 인간을 인간으로 대접하겠다는 사회생활의 기본적 자세, 인간답게 살아가려는 인간의지의 성취 등 인간원리의 근본을 체득하지 않은 채 연구된 학문은 뿌리 없는 나무, 모래 위에 세운 건물이 되어 위험천만이라 했다.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자는 주장은 반드시 이러한 개념으로 정리된 후에 권장되어야 함을 우리는 여기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시간을 내어 그를 공부해봐야겠다는 새삼스러운 결심 중, 내친김에 다른 어르신들의 가훈 혹은 유언도 살펴보니, 날더러 하시는 말씀이 한두 구절이 아니었다. 그 중 하나가 신숙주의 가훈 조심(操心), 근신(謹身), 근학(勤學) 중 ‘근학’이었다.

이목이 좁은데 마음이 넓은 사람은 없다. 이목을 넓히려면 독서만 한 것이 없다. 성현의 도리는 책에 담겨 있다. 진실로 능히 굳세게 뜻을 세웠다면, 차례를 밟아 정밀하게 해야 한다. 오래되면 저절로 얻음이 있다.

배움의 요령은 다만 풀린 마음을 거두는 데 있다. 마음은 가슴속에 있다. 저절로 광명이 펼쳐져서 비춰 써도 부족함이 없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는데 능히 배움에 나아간 자는 일찍이 없었다. 풀린 마음을 거두는 데는 요령이 있으니, 다만 경(敬)에 달렸다.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담벼락을 마주한 것 같다. 진실로 배우기만 하고 힘써 행하지 않으면 비록 만 권의 책을 읽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성현의 책을 읽을 때는 마땅히 성현의 마음을 구해 하나하나 체화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 더. 정제두(鄭齊斗, 1649~1736)가 아우 제태(齊泰)와 아들 후일(厚一)에게 준 유언 중 특히 마지막, 세상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양태에 대해 말한 것으로, 글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대단한 사업으로 여기는 사람이나 많이 읽어 그저 박식함을 뽐내기에 급급한 사람, 또 훈고(訓?)에는 환하지만 핵심의미는 모르는 사람과 자질구레한 이치에 얽매이면서 전문가인 양 하는 사람 등등은 바깥의 명예만 탐하는 사람들이라는 대목이었다.

속이 따끔거려 죽는 줄 알았다. 앞으론 ‘잘’해야겠다, 그게 무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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