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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살다

인터뷰 때마다 한결같은 질문이 있다. ‘어느 작가를 좋아하느냐, 혹은 어떤 작가에게서 영향을 받았느냐’는 것인데, 모범답안은 없다. 나는 모든 작가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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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다단, 골치 아픔 직한 상황을 짧은 문장 하나가 한 방에 정리할 때가 있다. <스타워즈; 제국의 역습>에서 다스베이더Darthvader가 결정적 순간에 루크Luke Skywalker에게 날린 "I'm your father!"가 그러하다. 엄마 뱃속의 덜 여문 아가들조차도 비웃을 만한 기초 수준의 영단어 네 개로 이루어낸 기적이었다. 얼마 전에 종영된 드라마 <이산>에 나온 “너를 데리러 왔다!”가 또 그러했다. 그 한 마디로 그때까지 지지부진했던 관계가 총정리 되면서 바야흐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통하였느냐?”가 있다. 조선시대의 발칙한 남녀상열지사를 다룬 영화 <스캔들>의 짙은 포스터 문구, “통하였느냐?” 한데, ‘통하다.’라는 그 말이 영화에서는 얼마나 은근한 단어였는지 몰라도, 실제로 사는 동안 얼마나 요긴했는지.

인터뷰 때마다 한결같은 질문이 있다. ‘어느 작가를 좋아하느냐, 혹은 어떤 작가에게서 영향을 받았느냐’는 것인데, 모범답안은 없다. 나는 모든 작가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런 질문을 받을 적마다 즉석에서 답을 만들어내야 하는 일이 적잖이 곤혹스러웠다. 게다가 꽤 최근까지만 해도 내게는 책과 작가가 따로따로였다. 저자에 별다른 관심 없이 그저 집히는 책을 읽을 뿐이어서, 나는 때때로 그들을 기억조차 못 했다. 하지만 책이, 그 안의 글이 곧 작가일 수밖에 없음을 모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네들이 늘 나를 향해 무언가를 끊임없이 떠들고 있었으므로.

소설을 읽을 때 문장들은 독자의 사고를 자극하고 상상력을 추동한다. 소설 문장들은 독자인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나는 대들거나 반문하거나 수용한다. 나의 대듦이나 반문이나 수용에 대한 소설 문장들의 대듦이나 반문이나 수용이 이어지고, 이런 일들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면서 거기에 하나의 유연하고 둥글고 탄력 있는 공간이 생겨난다. 그 공간에서 소설이 태어난다. 그럴 때 새로 태어나는 소설은 그 책의 잠재의식에서 불러내어진, 기억되어진 소설이다. 그러니까 과거의 책들은 미래의 책들을 기억 속에 품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내 글에서 그 누군가의 호흡이 느껴지거나, 어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다는 것은 지당하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에게서 벗어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을뿐더러, 완전한 새로움을 창조해낼 만큼 재능 있는 인물도 아니기 때문에.

그러니 ‘어느 작가를…?’ 같은 질문의 진의는 아마도 이럴 것이다.
“당신은 누구와 통하였습니까?”
그래서 나는 이스마일 카다레나, 김훈, 최명희, A.J.크로닌 같은 이름들을 정성껏 챙긴다.

그 이름들 가운데 유독 내가 김훈 샘에게 꽂힌 데는 산문집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가 미친 영향이 지대했다. 주파수가 맞는 느낌이랄까. 외람되게도 내가 품은 것과 같은 계열의 색깔을 찾은 기분이랄까. 그러다 보니 책 곳곳마다 밑줄 그은 구절 천지였는데,

젊은 날에는 말이 많았다. 말과 그 말이 가리키는 대상이 구별되지 않았고 말과 삶을 구분하지 못했다. 말하기의 어려움과 말하기의 위태로움과 말하기의 허망함을 알지 못했다. 말이 되는 말과 말이 되지 않는 말을 구별하기 어려웠다. 언어의 외형적 질서에 하자가 없으면 다 말인 줄 알았다.

특히 이 부분에서 제대로 걸려든 셈이었다. 당시 보잘것없고 지지부진하기만 하던 내 인생의 화두가 바로 ‘말’이었기에. 그 이후,

다언삭궁, 아버지의 가르침을 새겨 말을 먼저 하여 실수하기보다는 속으로 삼켜 문자로 만드는 버릇이 있었다.

를 거치면서 나는 ‘말하기의 어려움’에 골몰하게 되었다. 입을 다무는 대신에 활자를 조합하고 문장으로 구성하는 일에 점점 더 집중하게 되었다. 물론 정서적으로나 이성적으로 나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한 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드’가 맞을 때 내 속은 한 번씩 꿀렁, 한다.

얼마 전, 평소엔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았던 ‘평론집’을 힐긋거리게 된 것도 다 그래서였다. ‘평론’이라 하면 내 지적 능력으로는 반절도 이해를 못 하겠는 그 속상한 사정이 싫었던지라 의도적으로 피하거나 외면하던 터였다. 그런데,

대학시절, 글쓰기는 내게 철저한 암흑이었다. 세상과 처음 제대로 대면한다고 느끼던 순간부터 나는 언어를 잃었다. 말은 마음과 다른 방향으로 튕겨나가고, 글은 마음속에서 얼어붙었다. (…) 대학원 시절, 글쓰기는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물증이었다. 불투명한 미래와 통장 잔고를 걱정하며, 가갸거겨를 다시 배우는 아이처럼 공부를 시작했다. (…) 글쓰기는 내게 끝없는 자기 치유의 놀이이고 실험이었는지도 모른다. 환자도 의사도 간호사도 문병인도 모두 한 사람의 인격 속에 녹아 있는.

라는 고백을 책의 속표지에서 읽으면서 그렇게 되고야 말았다. 당연하게도 난 그녀의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총명한 젊은이가 바르게 참 잘 쓴 글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는 보면서도, 어쭙잖은 오해조차도 할 수 없었다. 뭐 하나라도 아는 것이 있어야 말이지, 하는 생각에 어린아이처럼 의기소침해버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가 마지막에 확인한 것은 앞으로도 그녀의 말에 꾸준히 귀 기울이게 될 것 같다는 막연한 짐작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랬다.

나는 도시에서 십 대와 이십 대를 보내면서, 도시에 적응하지 못하면서도 고향에 대한 편견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소설을 쓰면서도 한동안이나 고향 이야기를 소재로 삼지 않았다. 일차적으로는 내 소설의 경향 때문이지만, 꼭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고향은 내 오래된 기억의 가장 낮은 층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고향에 닿지 않고 싶은 나의 왜곡된 욕망이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동안 가끔씩 고향 마을에 성묘를 하고, 뒷산에 누워 계신 아버지의 산소에 성묘를 가면서도 나는 마음속으로는 고향에 가지 못한 것이다. 나는 왜 그런지 내 문학 속으로 내 고향을 가지고 가기가 싫었다. 문학 속으로 가지고 갈 자원이 하나나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했었다.

진실로 눈물겨운 구절이었다.

나는 고향의 대부분을 잊었다. 생각하면 열이 치받치고, 더 생각하면 슬프기 그지없었던 시기. 내 개인적인 비극의 기원이자 말할 수 없이 후진 정서의 내력. 그래서였겠지만 내 기억령領의 영주領主는 고향 소유의 영토를 이미 다른 쪽에 소작으로 넘긴 지 오래였다. 지금도 내 두개골 속의 ‘고향’을 둘러보려고만 하면 무수한 것들이 끼어들고 참견하면서 오류가 잦아진다. 그러다가 결국엔 다운. 먹통. 하여 나는 아예 매각을 고려하는 중이다. 고향 같은 거, 아예 없는 것으로 하고 싶은 마음으로. 그래서 앞으로 영영 ‘성장’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쓸 수 없을 거라고 해도 말이다. 고향 따위.

독자들은 어떤 작품에 대해 자전적이지 않느냐고 묻는다. 나의 대답은 이렇다. 모든 소설은 궁극적으로 자전적이다. 작가는 여러 권의 책을 통해 한 편의 자서전을 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글이 나의 온전한 진실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소설은 작가 개인의 이야기지만, 그러나 작가는 절대로 자기 이야기를 ‘사실 그대로’ 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기억만 하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작가는 기억하면서 동시에 상상하고 왜곡한다. 기억하고, 읽고, 듣고, 상상하고, 왜곡하고, 만들고, 그리고 표현한다.

정말 그렇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신을 걸러 불순물을 가려내고 쏟아 붓고 무언가를 첨가하고 다시 섞고 응고시키는 지난한 작업이 끝나고 나면, 한 단계 업그레이드가 이루어진다. 해방과 자유의 차원으로 말이다.

소설 역시 그것을 쓴 작가 자신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이 견딜 수 없는 세상을 견디는 방편이며, 나름의 치유책이라는 걸 깨닫게 한다. 소설은 가장 먼저 그 글을 쓴 작가 자신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하다. 소설가는 소설을 통해 세상을 견딜 힘을 얻는다. 세상의 불합리와 파렴치와 몰인정을 이길 힘을 얻는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이야기를 통해 그 힘을 얻는다.

그럼 ‘나는 나 자신을 구제하기 위해 글을 쓴다’고 한 활자중독 첫 회의 고백에 한 줌의 보편성이 더해지게 되는 걸까? 하지만 보편성이 더해진들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언제 내 삶이 보편적인 적이 있었던가?

소설을 통해 세상을 견딜 힘을 얻는다지만, 나 또한 진실로 경험했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소설이 힘들다.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기억의 재구성과 감성의 복제가 버겁다. 나를 건드리고 쑤석여야 하는 작업이 그리 즐겁지 않다. 그것은 내가 소설로 살게끔 체질 개선이 미처 다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생긴 욕심일까? 나 자신은 절대로 개입하지 않는, 그런 이야기를 쓸 수 있다면 좋겠다. 가능할는지는 모르지만,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 나는 나를 내버려두고 싶다. 그러다가 잊고 싶다.

이 책을 내게 보내고서 그녀가 한 말을 나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내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었는지, 내가 읽으면 좋을 거라고 했었는지.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그녀가 무엇으로 인하여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 잠시 따져보다가 그만두었다. 하지만 뭐랄까. 설명과 해석의 절차 없이 누군가에게 이해받았다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과장일까? 아무튼 누가 알랴. ‘통’하고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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