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이란 무엇인가?
바둑철학, 고수(高手)의 자서전·평전, 만화 『바둑 삼국지』
바둑은 도(道)다? 아닌 것 같다. 전문기사가 아닐지라도 전문기사를 꿈꾸지 않더라도 바둑애호가의 바둑 수련을 도를 닦는 것에 비유할 순 있다.
바둑은 도(道)다? 아닌 것 같다. 전문기사가 아닐지라도 전문기사를 꿈꾸지 않더라도 바둑애호가의 바둑 수련을 도를 닦는 것에 비유할 순 있다. 하지만 바둑을 통해서 인격을 연마하거나 사람됨을 갖춰나가긴 어렵다. 뭐, 이건 다른 그 어떤 일도 마찬가지니 바둑을 폄하하는 건 아니다. 또한 바둑이 도라면 어린 친구들의 출중한 바둑 재능을 해명하기 곤란하다.
나는 어깨 너머로 바둑을 배웠다. 성인이 되어선 바둑을 거의 두지 않아 초등학생 때 형성된 센 8급, 약한 7급의 기력(碁力)이 여전할 거다. 실력이 좀 줄었을 거다. 나는 어려서 바둑 매너가 형편없었다. 형들과 바둑을 두다가 아슬아슬하게 지기라도 하면 바둑판의 바둑알을 쓸어버렸다. 지금은 그런 승부욕이 없다.
바둑은 잡기(雜技)다? 역시 아닌 것 같다. 프로바둑기사가 장기와 카드게임 같은 ‘잡다한 기예’에 능한 건 사실이다. 1979년 독일에서 열린 유럽 바둑선수권대회에 초청을 받은 조훈현 9단이 유럽의 어느 체스 마스터와 체스를 두어 이긴 사실은 우리 바둑팬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다. 조훈현 9단은 그 체스 마스터와 두 판을 두어 한 판씩 주고받았다.
“난 체스의 ‘체’자도 몰라. 그런데 그들이 두는 것을 유심히 보니까 몇 가지 이기는 길이 눈에 들어오더군. 축구로 표현하자면 하프서클에서 윙 쪽으로 패스한 다음 빠르게 적진을 돌파한 뒤 센터링을 올리고 장신의 포워드가 헤딩슛을 날리는 공식 같은 것, 그러니까 일정한 코스가 보이더란 이야기야. 실력으로 이겼다기보다 운으로 이긴 거지. 아마추어 골퍼가 냅다 휘두른 공이 홀인원 됐다고 보면 돼.”(『전신 조훈현』, 78쪽)
바둑평론가 정용진이 전하는 조훈현 9단의 ‘해명’은 혹여 있을지 모르는 오해를 불식한다. “체스를 처음 두어보는 사람이 어떻게 고수를 이길 수 있었겠느냐. 그 사람과 두기 전에 그들이 펼치던 체스판을 유심히 보던 중 이기는 코스가 하나 눈에 보였는데, 운 좋게도 그 고수와 둘 때 딱 그 코스가 출현해 이길 수 있었을 뿐이다.”(//btlmkt.egloos.com/1208903)
그러면, 바둑은 대체 뭘까? 도와 잡기의 중간에 있는 그 무엇. 이런 절충은 무의미하다. “2002년 정부는 바둑을 두뇌 스포츠로 규정, 그 관할 기관도 문화관광부 예술국에서 체육국으로 이관했다.”(『전신 조훈현』, 304쪽)
공식적으로 바둑은 스포츠가 되었지만 이것도 아닌 듯싶다. 바둑에 대한 공식 규정과는 별개로 나는 한국 바둑의 부흥은 이 나라 당국에 바둑을 맡은 부서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시각에 공감한다. 어쨌거나 바둑의 정체성에 관한 궁금증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정치학 박사이자 한국기원 전문기사 문용직 5단의 ‘바둑이란 무엇인가?’를 부제목으로 하는『바둑의 발견 2』(부키, 2005)에도 뾰족한 답은 없다. 하기야 가로줄 19개와 세로줄 19개가 교차하는 361개의 점에서 천변만화하는 바둑의 세계를 한마디로 명쾌하게 규정한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이긴 하다.
“바둑이란 것은 인간의 우주관과 사회적 질서의 의식적이고도 무의식적인 반영, 개념이란 것의 실재성(實在性), 사회적인 영향 등을 떠나서 저 홀로 성립되고 발전하지 않았다. 그에 더하여 반상(盤上) 자체에서 찾아낼 수 있는 논리와 이론이 없었다면, 발전 또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면 바둑의 논리와 이론은 무얼 말하는가?
“그것은 규칙으로부터 추론되는 것인데, 우리가 그 숨겨진 질서를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규칙이 있었다. 19줄 격자형(格子型)의 반상 위에서 흑백(黑白)을 번갈아 한 수(手)씩 놓아 간다. 그리고 집이 많은 쪽이 이긴다. 바로 그것이 기본적인 규칙, 그 규칙을 지키고 활용해서 집을 많이 얻는 방식을 찾아내면 그것이 곧 이론이 된다.”
문용직 5단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간다. 먼저, 바둑판은 어째서 가로세로 19줄의 정방형(正方形)인가? 문 5단은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19줄로 이루어진 바둑은 19줄을 넘나들면서 성립한다. 19줄 반상은 그 유형(有形)의 의미태(意味態)로서 인간 내면의 가장 아름다운 황금률이다. 비록 그 증명은 심미안(審美眼)이 아니라 게임의 논리로서 풀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바둑은 곧잘 파란만장한 우리네 인생살이나 전쟁에 비춰지기도 한다. 옛 중국인들은 “『도덕경(道德經)』과 같은 세상의 이치가 반영되고 음양(陰陽)이 뛰어놀며, 인간 세상의 굴곡을 이루어 내는 심리적 사회적 요인을 반상에 반영하고 있는 것이 바둑이라고 보았다. 전쟁과 다름없는 것을 바둑이라고 보았다.”
문용직 5단이 바둑을 말하는 두 개의 관점, 곧 비유와 설명에 대한 논의에서 시작해 바둑의 본질에 접근하는 수법(手法)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비유와 설명의 개념적 대립은 우칭위엔(吳淸元)이 제시한 조화(調和) 개념에 이르러 합의에 도달한다.
“조화라는 모호한 개념이 논리적인 설명과 비유적 이해를 하나로 융합할 수 있었다. 바둑에 관한(about) 개념이 바둑의(within) 개념들을 이끈 것으로, 철학이 과학을 이끈 예라고 해도 될 것이다.”
중국의 바둑 역사에서 실력이 가장 출중했던 시절은 청나라 때다. 문용직 5단은 그 이유로 세 가지를 꼽는데 고증학 발달과 당시 국수들의 대국 기록 출간, 그리고 묘수풀이보다 대국보가 중심인 현실지향적인 바둑책이 그것이다. 청대(淸代)의 뛰어난 바둑 실력은 “책 없이 얻어질 수 없는 수준”이었다.
『바둑의 발견 2』는 바둑을 ‘신선놀음’에서 지적 현실로 안착시킨 노작이다. “돌이켜 보면, 바둑이 나에게 하나의 사회적 현실, 아니 그것을 넘어선 지적 현실(知的 現實)로 되었을 때, 바둑은 나에게 즐거움으로 다가왔었다.”
우칭위엔이라는 오청원의 현지음표기가 낯선 중국출신 천재기사의 회고록인 『오청원회고록(吳淸元回顧錄)』(편집부 옮김, 현현각, 1992) 한국어판은 다소 아쉽다. 바둑전문출판사에서 오래 전 펴낸 책이라는 점을 고려해도 본문 편집은 성글고 번역 문장은 1990년대 초반을 기준 삼아도 좀 낡았다.
이런 아쉬움은 적잖이 ‘편집부 옮김’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 ‘사회과학’ 분야 번역서의 편집부 옮김은 운동적 차원에서라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편집부 옮김은 번역자의 실명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책임하다 할 수 있다. 거짓 번역자를 내세우는 것보다는 낫지만 말이다. 편집자가 번역과 편집까지 다 하면 실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바둑의 발견 2』와 『오청원회고록』은 바둑 기초 지식을 갖춰야, 바둑을 둘 줄 알아야 책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다. 하지만 『전신(戰神) 조훈현-나는 바둑을 상상한다』(조훈현?김종서 지음, 청년사, 2004)는 바둑을 잘 몰라도 내용 이해에 큰 지장은 없다. 이 책은 조훈현의 에세이를 곁들인 그에 대한 평전으로 전체적인 행마(行馬)는 가볍다.
6월 말 현재 3권까지 출간된 만화 『바둑 삼국지』(글 박기홍, 그림 김선희, 원작 김종서,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의 독자는 바둑에 대해 까막눈이어도 좋다. “내가 바둑을 모르니 자연히 초점은 바둑을 모르는 사람이 봐도 재미있게 읽혀야 한다는 것에 맞춰졌다.”(원작의 각색을 맡은 ‘작가의 말’에서)
『전신 조훈현』의 공저자 중 한 사람과 『바둑 삼국지』의 원작자가 동일인이라 그런지 『바둑 삼국지』의 스토리라인은 『전신 조훈현』을 읽은 독자에게 친숙하다. 『바둑 삼국지』엔 바둑의 성격을 시사하는 장면이 둘 있다. 우선, 바둑은 잡기다. 말 풍선 안의 대사를 옮긴다.
“시방 네 살배기 애헌티 잡기를 가르칠 셈이여?” “아니, 조선상! 참말로 막둥이헌티 잡기를 가르칠 셈이소잉?” “공부시켜도 모자랄 판에 웬 잡기여? 자넨 그려도 메이지인가 뭔가 하는 일본 유학도 댕겨왔잖여?”(『바둑 삼국지 1-전쟁의 시작』, 152-153쪽)
그리고 바둑은 깨달음이다. “바둑 공부는 선(禪)과 같다…결국엔 혼자 깨닫는 거야.” “내가 깨닫는 방법은…싸움이다!”(『바둑 삼국지 2-영웅의 탄생』, 77-78쪽)
『바둑 삼국지』 초반부는 조훈현의 삶과 제1회 잉창치(應昌期)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 결승전 5번 기가 교차한다. 이 대회 준결승에서 조훈현이 2대 0으로 완파한 중국이 낳은 또 한 사람의 천재 기사 ‘임해봉(林海峰)’의 현지음표기 ‘린하이펑’은 그리 낯설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