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마약은 딱 질색이다. 마약을 맞는 녀석들은 모두 행복의 단골손님이 된다. 마약은 한번 맞았다 하면 끝내 주니까 행복이란 결핍 상태에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오죽이나 행복해지고 싶어 안달을 했으면 마약 주사를 맞았겠냐만 그따위 생각을 하는 새끼들은 바보 중에도 바보다. 난 한 번도 그 주사를 맞은 적이 없다. 친구들하고 의 상하지 않으려고 대마초는 한두 번 피워 보았지만 그러나 열 살 때에는 그래도 어른들한테 이것저것 배우는 나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다지 행복하고자 안달하지 않았다. 그래도 삶 쪽을 더 좋아했었다. 행복이란 더럽고 횡포한 것이니 그놈에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이다. 나와 행복과는 연대가 안 맞는다. 눈 하나 깜짝할 게 없다. 누구한테고 이익이 있다는 덩치에 상관한 적은 없지만 행복을 찾는답시고 병신이 되는 녀석들을 막아낼 법률은 있어야 할 것 같다. 나는 그저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것이니까 내 말이 틀릴 수도 있겠지만 하여튼 난 행복해지려고 주사나 꼽는 것은 아예 할 생각이 없다. 제기랄, 더 이상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겠다. 그러다가 또 발작 나면 탈이니까.
행복. 한 문단 안에 ‘행복’이란 단어가 무려 아홉 번이나 나온다. 그러니까 행복하고자 안달하지 않았다는 말은 반어법인 셈이다. 무언가를 간절히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게 그리 여러 번 소리내져질 수는 없는 것이니 말이다.
그럼 사전에서는 행복을 무어라고 설명할까. 이희승 편저,
『국어대사전』은 이렇게 정의내리고 있다.
①복된 좋은 운수. 행우(幸祐). 복보(福報). 복상(福祥)
②【심】심신(心身)의 욕구가 충족되어 조금도 부족감이 없는 상태.
조금도 부족감이 없는 상태라. 그럼 나는 불행한 걸까. 칼럼의 마감일이 다가올 적마다 내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에 맘을 앓으니 하는 소리다.
처음 채널예스에 칼럼을 의뢰받았을 때 무척 겁을 먹었었다. 왠지 나대는 기분이 들었달까. ‘저는 이제 고작 장편소설 하나 냈을 뿐인 걸요.’ 겸손하게 찌그러지고 싶었다. 하지만 지식이나 교훈이 아닌, 책 읽기가 내 글쓰기에 미친 영향을 편하게 떠들어주면 된다는 말에 홀랑 넘어가 버렸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까지의 은둔형 생활에 맞지 않는 현재의 갈지자 행보가 심히 거북살스럽고 버겁다.
어쨌든.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지금까지 읽어온 모든 책들로부터, 엄밀히 말하자면 책 속에 등장하는 무수한 인물들로부터 끊임없이 영향을 받아왔다. 세상의 있음 직한 오만 가지 인생사가 죄다 그 안에 있었다. ‘관계’의 총망라였다.
그 숱한 관계들 중 가장 빈번히 다루어지는 것이 가족이었다. 초등학교 때 사회시간에 배운 대로, ‘관계’ 중 가장 기초 단위가 아무래도 가족이기 때문일 것이다. 혼인이나 혈연으로 맺어지는 집단, 가족.
하지만 우리가 종종 가족을 말할 때 꺼내 드는 단어가 있는데, ‘핏줄’이다. 핏줄. 참으로 불완전한 단어다. 왜냐하면 가족은 끊임없는 수혈로 인해 재구성되고 있으니 말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나는 내 남편과 피가 섞이지 않았음에도 분명하게 가족 관계에 있다. ‘하나님이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던 주례 말씀을 잊지 않고 있다. 그것은 이제부터 ‘가족’이라는 축복이었고, ‘가족’으로서 끝까지 지켜야 할 임무에 대한 공개적인 명령이었다. 그러니 핏줄은 구성요소 중 일부일 뿐이다. 이런 뻔한 말이라니. 한데 혼인 말고도 아주 중요한 구성 조건이 있다. 바로 입양이다.
사실, 말할 수 없이 빡빡하기만 했을 것 같은 조선시대에도 입양은 있었다. 호주상속을 위한 양자와 자녀를 위한 양자가 그것이다. 하면 우리가 잘 아는 명성황후, 그녀의 가문에서 이루어진 입양을 통해, 대를 잇기 위해 양자를 들임으로 복잡해진 족보를 살펴보자.
명성황후는 민치록(閔致祿)의 딸로 형제들이 모두 요절하는 바람에 무남독녀로 자랐다. 민치록은 여양부원군 민유중閔維重의 5대 장손이다. 민유중은 비운의 숙종비 인현왕후의 아버지로 아들을 셋 두었는데 진후, 진원, 진영이 그들이다. 그중 민진후는 장희빈 스토리가 드라마로 만들어질 적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주요 인물이다. 어쨌든, 그러니까 민치록은 민진후의 4대손이기도 한 것이다.
앞에 이야기했듯이 민치록은 자식들이 일찍 죽고, 무남독녀로 민자영(명성황후)만을 두었으므로 민치구致久의 둘째 아들인 민승호升鎬를 입양했다. 민치구는 민유중의 아들인 민진영鎭永의 4대손으로, 딸인 민씨가 대원군 이하응李昰應과 부부가 됨에 따라 흥선대원군의 장인이자 고종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인물이다.
그런데 입양 들어간 민승호 역시 아들이 없었다. 하여 민태호台鎬의 아들 민영익泳翊을 양자로 데려온다. 민태호는 민유중의 둘째아들인 민진원鎭遠의 4대손인 민치오致五의 아들이다. 민태호台鎬의 딸은 또한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비, 순명황후가 된다.
한데 민승호를 입양 보낸 민치구致久의 첫째 아들인 민태호泰鎬도 아들을 낳지 못했다. 그래서 동생 민겸호謙鎬의 아들 충정공 민영환泳煥을 입양했다.
딸들은 알아보기가 쉽다. 즉, 민치록과 민치오, 민치구는 각각 민유중의 아들인 민진후와 민진원, 민진영의 4대손으로 민치록의 딸인 민자영은 고종비 명성황후이고, 민치오의 손녀(민태호台鎬의 딸)는 순종비 순명황후이며, 민치구의 딸은 고종의 어머니인 부대부인 민씨라고, 각각 친부와 함께 등장하기 때문이다. 혼동할 일이 없다. 하지만 아들의 경우엔 대를 잇기 위해 이리저리 양자로 입양되는 바람에 그들의 관계를 따져보고 있자면 정신이 없어진다.
그래서 그림으로 대강 그려보았다. 알아보기에 좀 낫다. 제대로 맞게 연결했는지 자신은 없지만.
그리고 수양자收養子와 시양자侍養子제도도 있었다. 이 제도는 비록 성姓이 다르더라도 버려진 아이를 데려다 기르면서 양자로 삼아 자기의 성을 따를 수 있게 한 제도이다. 경국대전은 3세 이전에 수양된 양자를 수양자收養子, 3세 이후에 수양된 양자는 시양자侍養子라고 구별했다고 한다. 이 제도는 호주상속을 위한 양자와 자녀를 위한 양자의 두 기능을 모두 갖춘 제도라도 볼 수 있겠다.
한데 종족 보존을 위한 경우 말고 아동복지적인 측면에서 입양을 허락하는 경우도 간간이 있었다. 이는 정조가 기민구제饑民救濟를 목적으로 제정한 자휼전칙字恤典則 중, 유기 및 부랑걸식아동 보호법령에 의한 것인데, 그 하나로 서울과 지방에 흉년이 들어 기근이 심한 해에, 버림받아 사방에 호소할 곳이 없는 불쌍한 어린이와, 사방을 돌아다니며 무전걸식 하는 부랑아들을 관가에서 젖을 먹여 기르거나, 또는 민가에 수양토록 법적으로 허락하였다.
또 현종 2년(1661년) 이후에는 한성 명부의 버려진 아이들을 민가에서 수양하는 것이 관부의 허가제로 실시되었는데, 이들에 대해 의료도 관급하였고, 양육하여 10세에 이르면 양육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 아이를 사역할 권리도 가질 수 있게 했다. 나아가 숙종 22년(1696년)에는 수양림시사목을 제정 실시하였고, 영조 20년(1774년)에는 동사목이 『속대전』 속에 편찬되어 더욱 확립되었다.
수양림시사목이나 자휼전칙은 근본적으로 같다. 유기 또는 부랑하는 어린이의 생명을 절대적으로 보호하기 위하여 국가에서 수용보호 하거나, 또는 상황에 따라 민가에서 수양하여 양자녀 또는 노비로 삼을 수 있게 허가하는 것을 그 취지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한 논문을 보고 알게 된 내용인데, 출처를 적어두지 않아서 밝힐 수가 없으니 안타깝고 죄송하다.)
최근에 읽은 책,
『사월의 마녀』의 핵심이 바로 입양이다. 중증의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딸아이를 기관에 버리고, 그 원죄의식 때문에 다른 아이들을 셋이나 거두어 키우게 된 한 여자. 그리고 버림받은 딸아이의 꼼꼼한 복수. 당시 스웨덴 장애인복지정책의 허허실실 또한 아프게 드러나 있다.
마음 졸이며 읽던 그 와중에 내 맘에 박힌 부분이 있었다.
사고는 계속되었다.
내가 내린 벌은 분명 가혹했다. 하지만 내가 틀렸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난 그저 그 위선적인 동정심, 목소리만 남아있고 마음은 없는 그 가증스런 동정심에 벌을 내렸을 뿐이다. 하지만 말이 없는 조용한 여자들은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가끔은 그 무뚝뚝하면서도 상냥한 태도에 마음이 끌리기도 해서, 그들이 머리카락을 뽑거나 뺨을 어루만져도 물지 않았다. 물론 그들이 침묵할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진정한 친절은 말하지 않는 것이다. 참된 친절엔 많은 말이 필요 없다. 다만 행동이 필요할 뿐이다.
진정한 친절은 말하지 않는 것이다.
흠!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말이 늘어가는 사람들을 본다. 나조차도 예전엔 가슴에 담아두거나, 휴지통에 쑤셔 박거나, 종이 귀퉁이에 작게 끼적이고 말았을 것들까지 모조리 활자화시켜 지껄이곤 한다. 피해는 나에게도 돌아온다. 날 좀 내버려 둬, 따위의 말을 예전처럼 내 주변에만 통보하면 얼추 조용해지던 때는 아무래도 돌아오지 않을 모양이어서 그러하다.
입양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자는 뜻에서 쓴 글이 아니다. 아이를 낳아놓고 키울 수 없어 입양을 보내야 하는 이 나라의 정서적, 경제적 형편이 속상하다는 마음으로 적은 글도 아니다. 다만 ‘관계’가 단순하던 그 시간이 그리워졌을 뿐이다. 지나치게 만져대서 진물이 나게 생긴,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쑤시다가, 입양 얘기만 실컷 한 셈이지만 말이다.
ps. 삼천포로 빠지는 건, 뭐 좋다. 돌아오면 되니까. 한데 난 돌아오는 길은 둘째 치고, 삼천포에서 길을 잃는다. 어허, 그것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