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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한국 여행과 문화를 바꾸다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유원지와 자연경관 중심이었던 국내 대중 관광의 틀을 바꿔놓고, 향상된 문화에의 관심수준에 맞춘 새로운 형태의 여행, ‘답사’라는 개념을 대중화시킨 주역이 바로 93년에 출간된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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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에 들어가면서 한국 대중음악계는 큰 변화를 감지하기 시작합니다. 성인 중심의 트로트 시장과 이제 막 발돋움을 시작한 젊은 층을 위한 음반 시장이 호각지세를 이루고 있었고, 서서히 커지는 젊은 층의 문화 향유력을 실감하면서 이른바 가요계의 세대교체가 크게 한 번 있을 거라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나돌았습니다. (심지어는 ‘세대교체’라는 이름의 그룹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오빠부대라는 개념이 보편화되었고, 조만간 뭔가 폭풍이 한번 몰아칠 거라는 분위기가 팽배했습니다.

그 시기에 나타난 것이 ‘서태지와 아이들’이었습니다. 발라드와 트로트 중심의 가요계를 뒤엎은 이들은 이후의 가요 시장을 댄스그룹과 랩이 주도하는 형태로 바꿔 버렸고, 그 여파는 지금까지도 잠잠해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굳이 서태지가 아니었더라도 누군가가 그 변화의 한가운데를 주도했겠지만, 어쨌든 그 전환점의 꼭지에는 서태지라는 인물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고전과 스테디셀러를 리뷰하는 코너에서 웬 서태지 이야기냐 하시겠지만, 오늘 리뷰할 책 또한 그 나름대로 그 분야에서는 서태지와 같은 변화의 꼭짓점을 차지하고 있는 책이라는 생각에 옛 기억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바로 여행입니다.

89년 처음으로 해외여행 자유화라는 제도개편이 시행되었고, 고도성장의 혜택을 입은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의 발걸음을 시작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전까지 일반적인 여행이라는 걸음의 폭은 국내에선 상당히 좁았습니다. 80년대 특유의 분위기가 물씬 배어나는 그 무렵의 여행이란, 바쁜 직장일 사이에 짬을 내어 이른바 ‘유원지’라 불리는 시끄러운 디스코 음악과 바가지 상혼으로 얼룩진 ‘만들어진’ 휴양지에서 돈 쓰고 오는 게 거의 전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뭔가 이국적이면서도 새로운, 견문을 향한 떠남이라는 여행의 가치에 목마른 이들이 경제성장과 교육수준 향상에 따라 늘어 갔지만, 아직까지 국내에서 그런 여행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탄생한 책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입니다. 유원지와 자연경관 중심이었던 국내 대중 관광의 틀을 바꿔놓고, 향상된 문화에의 관심수준에 맞춘 새로운 형태의 여행, ‘답사’라는 개념을 대중화시킨 주역이 바로 93년에 출간된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입니다. 해외여행의 붐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았던 한반도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돌아보게 해 주었고, 문화유산에 대한 올바른 관심과 관리에 세간의 관심이 나타나게 된 계기가 된, 여행과 문화 분야에서의 ‘서태지와 아이들’ 급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듯한 책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입니다.

월간지 <사회평론>에 연재되던 여행기를 묶어 출간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본편 3권과 북한편 2권까지 합쳐 총 5권 분량입니다. 미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한 저자 유홍준이 전문가의 식견을 동원해 둘러본 전국 각지의 문화유산들을 알기 쉽게 풀어낸 기행문 모음집의 형태로, 익숙하게 알고 있는 불국사와 같은 명승고적부터 일반인들이 알기 힘들었던 시골 마을 구석의 석상 하나까지 다루는 문화재의 범위도 폭넓습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가진 가장 큰 덕목은 ‘보편성’입니다. 저자는 분명 고고 미술사 분야의 전문가이지만, 그가 쓴 글은 중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의 평이성을 자랑합니다.

사실 문화유산이라는 게 말처럼 가까운 건 아닙니다. 당장 지금도 주요 문화재 앞에 서 있는 안내판의 글귀는 그리 대중에게 친절한 말투는 아닙니다. 주심포 양식에 맞배지붕 같은 고건축 전문용어는 기본이고, 유적에 얽힌 세세한 뒷이야기나 미처 눈에 잘 띄지 않는 지리적 여건과 같은 내용들을 일반인이 모두 알아채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자는 그런 문화유산 답사여행의 맹점을 찾아내어 해결하려 듭니다. 전문가가 살펴본 식견이 동원된 감상을 평이한 문체로 풀어내고, 전문용어들에 대한 설명을 하나하나 덧붙여 가면서 멀뚱하니 서 있는 석탑 하나마저도 관람객에게 말을 걸게 만듭니다. 어려운 용어를 모두 걷어 내고 있는 그대로, 세워진 처음의 뜻 그대로 관람객과 마주한 유산은 그때부터 대화? 시작하고, 답사객의 감흥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러한 평이성을 바탕으로 할 때 더욱 빛나는 가치가 바로 전문성입니다. 쉽게 쉽게 유산들을 설명하는 와중에서 독자는 전문가가 아니면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답사여행의 소소한 재미를 발견합니다. 그냥 경치 좋은 데 서 있는 정자에 올라 보면 경치만 보다 내려가지만, 전공자인 저자는 그 정자 안쪽에 붙은 한자 현판들을 하나하나 짚어 보며 ‘이건 누가 언제 무슨 이유로 쓴 시네.’, ‘이런 글씨면 누구 흉내네.’라는 설명을 같이 관광 온 동네 아저씨마냥 술술 읊어 줍니다.

전문성이라는 게 꼭 미술이나 고고학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지긋하게 나이 드신 노인 분들의 연륜과 지혜랄까, 그런 것 또한 저자의 전문성입니다. 다산초당에 가면 다산 정약용 의 일대기를 줄줄 읊어주고, 낙산사에 가면 여기 불이 몇 번 났는지를 읽어 주는 가이드라면 최고의 여행 동반자가 되겠지요. 저자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실제로 그런 역할을 하고 있으며, 특히나 광범위한 저자의 인맥들이 수시로 책 안쪽을 들락날락하면서 붙여주는 부가적인 설명과 해석, 의견들은 그러한 전문성을 개인의 것이 아닌 집단 전체의 사고로 올려 줍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부분에서는 오히려 반감을 사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대한 평 중 가장 많았던 것은, ‘몇몇 친한 사람의 개인적인 의견이 마치 전체 학계를 대표하듯이 드러난다.’라는 부분이었습니다. 추사 김정희에 대한 재해석이라든가, 지역 유산마다 어려 있는 전설과 설화에 대한 해석과 같이 전문 분야와 비전문 분야 모두에서 저자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단지 자기 인맥 중심의 이야기만 풀어낸다는 지적을 받기도 합니다.

게다가 저자의 이력에서 물씬 배어나는 정치성 또한 상당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민청학련 사건 등을 통해 민주화 투사로서의 경력을 갖고 있는 저자 유홍준 교수는 많은 해석과 이야기에서 구 독재정권에 대한 강한 반발을 드러내는데, 특히 낙산사에 박정희가 새로 걸어 둔 범종에 새겨 둔 ‘박정희 각하’ 문구 이야기는 최근 문화재청장으로 일하면서 낙산사 복원에 자기 이름을 새겼다는 비판 속에 이중 잣대를 적용한다는 문제를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이런저런 찬반양론에도 불구하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은 지대합니다. 작게는 당장 맛집으로 소개된 강진 해태식당이 사람이 몰리면서 서비스와 맛이 형편없어졌고, 크게는 저자가 실제로 문화재청장 자리에까지 오르는 일도 있었습니다. 전 국민이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가졌고,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보편화된 관용구로 자리 잡았습니다. 적어도, 우리 국토가 몇 천 년 역사가 고스란히 밴 박물관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것만으로도 큰 의미는 있습니다. 도올 김용옥이 그렇게 욕을 먹어도 그의 TV 철학 강의가 동양철학의 대중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점을 부인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저자 유홍준에 대한 감정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그가 문화재청장으로 있는 동안 고궁에서 고기 굽는 외국 귀빈 파티가 두세 차례 열렸던 것을 기억하고, 직접적인 책임은 아니지만 숭례문 전소의 책임자였던 점도 기억합니다. 제 나름대로 국내 문화유산을 사랑하는 일반 시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막상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가 문화재청장이 되었을 때, ‘있는 그대로의 유지’를 소리 높여 외치던 새 청장에게 걸었던 기대가 많이 씁쓸해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자에 대한 개인적 호오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서는 90년대 한국의 문화 지형을 바꾼 대작이라는 평은 지울 수 없습니다. 저 또한 그 책을 통해 지금까지도 다니고 있는 ‘여행’이라는 개념에 첫발을 디뎠고,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같은 계기로 국토를 다시 돌아볼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나 책에 머무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요즘 입사 지원자들의 취미가 한결같이 ‘여행, 독서’라고 하는데, 책이 책 안에 머무르고 여행이 여행의 범주를 넘지 못한다면 진정한 의미가 아니겠지요. 답사기에 등장했던 유산들은 이제 다 명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전국의 좁은 지방도로 사이사이를 돌다 보면, 갈색의 문화유적 표지판이 뜬금없이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물끄러미 쳐다볼 때가 있습니다. 누구도 돌아보? 않던 그 구석구석의 또 다른 문화유산이 말을 걸고 싶어 하고, 그 소박한 잔재와 남들이 모르는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것, 이것이 진정한 ‘나만의 답사여행’이 되겠지요. 그리고 그것이 적어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독자에게 던져 주는 최종적인 선물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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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아하고 고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책 읽기가 어느 날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어디 가서 취미가 책 읽기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보다 좋은 것은 먼지 날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감성과 지성이 경륜으로 불릴 쯤이 되면 포크 가수로 전업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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