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학습하는 뇌
호주 ABC에서 방송하는 <아인슈타인 팩터(The Einstein Factor)>. 매주 3명의 도전자들이 나와 퀴즈를 푼다. 이 프로그램의 핵심 포인트는 1라운드의 스피드 퀴즈. 90초 동안에 도전자들은 각자 자신이 지정한 분야의 퀴즈를 ‘다다다다’ 맞춘다. 가령 음악가 ‘바흐’를 선택한 한 출연자는 바흐가 생전에 20명의 아이들을 키웠으며 그가 쓴 2000편 이상의 곡들 가운데 생전에 발표된 것은 단 12곡이라는 것과 그의 남자형제 5명 및 사촌 형제 4명의 이름이 모두 요한(Johann)이었다는 것, 그가 몇 주 동안 감옥에 수감된 적이 있었다는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모두 꿰고 있다. 폭탄 머리를 한 아인슈타인이 당장에라도 관 뚜껑을 열고 뛰쳐나올 것만 같은 엽기 발랄한 오프닝 음악과 함께 시작되는 이 퀴즈쇼에는, 출연자들이 문제를 푸는데 도움을 주는 ‘두뇌집단(Brain Trust)’이 패널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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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ABC의 <아인슈타인 팩터(The Einstein Factor)> | |
#2. 창조하는 뇌
영국 BBC에서 작년 하반기에 방송했던 <푸드 포커(Food Poker)>. 요리와 포커 게임을 결합한 흥미로운 프로그램으로, 총 4명의 일급 요리사들이 등장해 대결을 벌인다. 게임 과정에서 이들은 각자 패를 뽑게 되는데, 각 카드에는 요리 재료가 그려져 있다. 도전자들은 자신이 선택한 패에 그려진 요리 재료를 가지고 즉석에서 어떤 요리를 만들 것인지 제안하고, 패널들은 도전자들이 제안한 요리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한다. 가령 ‘오리고기’와 ‘쌀’을 뽑은 요리사는 ‘고추 소스를 곁들인 쿠스쿠스와 꿀을 발라 구운 오리 가슴살 요리’를 제안한다. 반면, ‘두부’와 ‘물냉이’를 뽑은 도전자는 ‘팬 프라이드 두부요리와 로크포르 치즈를 곁들인 물냉이 프리터’를 제안해 보는 식이다. 여기서 하이라이트는 제한된 시간 안에 가장 참신하고 먹음직스러운 요리를 제안해야 한다는 것. 선택 받은 자만이 직접 요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까닭이다.
뇌의 기능과 관련해 나에게 가장 먼저 떠올랐던 두 가지 키워드는 ‘학습’과 ‘창조’였다. 위에서 언급한 TV프로그램들은 각 영역을 활용한 인상적인 사례들이다. 기본적으로 우리의 뇌는 기억하고 학습하며, 상상하고 창조한다. 그런데 이케가야 유지 박사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한다. 우리 뇌가 스스로를 속인다는 것이다.
『착각하는 뇌』는 인간의 뇌가 얼마나 교활하며 또 얼마나 바보 같은지를 조목조목 밝히고 있다.
#3. 거짓말하는 뇌
여기 두 명의 젊은 과학자가 있다. 이들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두 장의 인물 사진을 보여주고 그 중 하나를 고르게 하는 것이다. 실험 대상자가 사진을 고르면, 그것을 본인에게 건네준다. 그리고 그 사진을 고른 이유를 말하게 한다. 광대뼈도 더 튀어나오고 헤어스타일도 더 나아서요, 이게 강한 인상을 줬어요, 성격이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사람들의 답변은 가지각색이다. 심지어 자신이 사진작가라고 밝힌 어떤 남자는 광선하고 형태가 마음에 든다며 제법 전문적인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엔 트릭이 숨어 있다. 과학자들은 실험 대상자들이 고른 사진을 그들에게 건네주는 과정에서 슬쩍 바꿔치기를 했던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이 고르지 않은 다른 한 장의 사진에 대해 이런저런 이유를 댄 셈이다. 실험 참가자 가운데 무려 80%가 사진 바꿔치기를 눈치 채지 못했다.
“실험에서 재미있는 점은 2가지입니다. 첫째는 사진 바꿔치기를 모르는 것인데, 그 자체만으로도 재미있고 신기한 일이죠. 둘째는 사진을 고른 이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실제로는 자신이 고르지 않은 사진이죠.” (페터 요한슨, 인지 과학자)
이것은 작년에 BBC가 방송한 다큐멘터리 <놀라운 과학의 비밀, 완벽한 삶을 위한 선택의 공식(Foolproof Equations for a Perfect Life)>의 한 장면이다. 이 실험 내용은 스웨덴 룬트대학의 라즈 홀 박사가 2005년 <사이언스>지에 발표한 논문에 기초한 것으로,
『착각하는 뇌』에도 인용되고 있다. BBC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두 과학자 가운데 한 명이 바로 홀 박사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 현상에 대해 이렇게 분석한다. “우리는 세상에 의지합니다. 세상은 믿을만한 곳이죠. 자동차 열쇠를 찾으려고 손을 뻗었다가 아르마딜로 같은 걸 붙잡지는 않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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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의 <놀라운 과학의 비밀, 완벽한 삶을 위한 선택의 공식> (Foolproof Equations for a Perfect Life) | |
기억이란 얼마나 간사한가. 왜곡하면 왜곡한 대로, 바꿔치면 바꿔치는 대로, 희미하면 희미한 대로 믿으면 그 뿐이다. 그러나 홀 박사의 인터뷰를 보면, 다소 황당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반응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그들은 오직 보고 싶은 것만 보았다. 어쩌면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진실을 왜곡하고 자신들의 결정을 합리화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케가야 유지도 비슷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의 사례를 하나 들고 있는데, 쇼핑을 하다가 마음에 드는 옷을 두 벌 발견했을 때의 상황이 그것이다. 가격이 비싸서 둘 중에 좀 더 저렴한 옷을 골랐다면, 그 뒤에는 반드시 합리화 과정이 따른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이유를 물었을 때에는 ‘디자인이 좋아서’, 혹은 ‘색깔이 더 마음에 들어서’ 골랐다고 말한다. 이것은 연애의 법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결혼이 자손 번성을 위한 선택이라면, 인간은 동물적인 면에서 가능한 한 우수한 자손을 남겨야 한다. 지금 세계 인구는 60억이 넘는다. 남녀가 반반이라고 하면 30억 명 중에서 최우수 유전자를 찾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모든 이성을 살펴보기도 불가능할뿐더러, 거기에 시간을 소비하다가는 자칫 번식 적령기를 놓칠 수 있다. 그보다는 주변에서 재빨리 적당한 사람을 선택해 “나한테는 이 사람이 최고야.” 하는 믿음을 갖는 편이 여러모로 유리할 것이다. (본문 중에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연애라는 감정도 의외로 단순한 것 같다. 물론 그 과정에서 도파민 등 쾌감을 안겨주는 요소가 작용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맹목성’에 의존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뇌는 불확실성에서 오는 스릴을 즐긴다. 이 책에는 두 가지 흥미로운 사례가 소개되고 있는데, 하나는 월프람 슐츠 박사의 원숭이 실험이다. 그는 빠짐없이 먹이를 주면 확률이 100%이고 한 번도 먹이를 주지 않으면 0%라는 식으로 신호와 먹이의 관계를 설정해 다양하게 확률을 바꿔봤다. 그랬더니 확률이 50%일 때 ‘도파민 뉴런’(쾌락을 만들어내는 신경세포)이 가장 활동적이었다고 한다. 확률 50%란 이쪽도 저쪽도 아닌, 이른바 불확실한 상태를 말하는데 우리의 뇌는 이때 가장 큰 쾌락을 느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사례는 ‘고민이 사라져버리는 장애’에 대한 것. 책을 읽으면서 이 부분에 특히 관심이 갔는데, ‘고민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과연 장애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민은 미래를 예측하기 때문에 생겨나고, 그 예측은 과거의 경험에서 나온다. 고민이 없다는 건 과거와 미래가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되돌아갈 수도 없는 아득한 느낌이라니. 상상만 해도 섬뜩하지 않은가.
어쩌면 사람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손바닥 보듯 뻔한 삶은 뇌를 망칠 수 있다. 역설적이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이야말로 뇌에게는 최고의 영양원인 셈이다. (중략) 아무 것도 고민하지 않는 데서 생겨난 단순한 명랑함과 고민 끝에 생겨난 진취적인 명랑함은 엄연히 다르다. (본문 중에서)
이케가야 유지. 1970년생. 도쿄대학 약학부와 동대학원을 수석 졸업하고 현재 도쿄대학 대학원 약학계 연구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최신 뇌과학을 대중에게 보다 쉽고 재미있게 알리기 위해 집필 및 강연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이토이 시게사토와의 대담집
『해마』를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인문학적 감수성과 이공계의 전문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보기 드문 캐릭터다. 그는 말한다. 우리의 뇌는 행복해지기 위해 마음을 속인다고. 기억을 왜곡시키고 불확실성을 즐기는 우리의 뇌는 얼핏 모순 덩어리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쩌면 그건 이 험난한 세상에서 우리 뇌가 살아남기 위한 나름의 생존법칙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뇌가, 어떻게든 행복해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바보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안쓰러우면서 기특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의 뇌는 스스로 눈을 멀게 만든다.
맹목적이 된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남들은 귀찮고 힘들게 여기는 일도 본인이 쾌감을 느낀다면, 그 일은 전혀 힘들지 않다. 인간이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는 것도 이런 맹목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취미에 빠져드는 맹목성, 연애하는 맹목성, 꿈을 향해 나아가는 맹목성, 예술에 도취하는 맹목성. 인간의 원동력은 바로 그 맹목성을 추구하는 정신 구조에서 생겨나는 게 아닐까? 언뜻 무모해 보일지는 몰라도 맹목성이야말로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 수 있는 원동력인 셈이다. (본문 중에서)
책에는 이런 내용도 나온다. 죽음을 앞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거를 돌아보며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회상한다는. 그들의 인생은 정말 행복했던 것일까. 그러고 보면, 우리의 뇌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 같다. 갑자기 영화
<파니 핑크>에 나오는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인간이 후회하기 싫어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는 한 나 역시 마지막 순간에 멋진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렇게 믿음으로써 정말로 행복한 인생이 될지도 모른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