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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택한다, 혹은 선택하지 않는다 - 존 파울즈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

무엇보다 이 작품은 선택에 대한 이야기다. 찰스의 선택, 사라의 선택, 그리고 독자들의 선택. 작가는 교활하게도 결말까지 선택의 여지를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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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가능하다고 해서 모든 게 용납되는 것은 아니다. 남편들은 가끔 아내들을 살해할 수 있다. 그 반대도 물론 가능하다. 그러고도 무사히 넘겨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래 전 김영하의 산문집 『포스트 잇』을 읽다가 발견한 구절이다. 존 파울즈의 소설 『프랑스 중위의 여자』에서 발췌한 부분으로, 작가는 ‘오래도록 이 대목을 반복하여 읽는다.’고 적고 있다. 그때는 별 생각 없이 책장을 넘겼다. 그런데 어느 날, 밤늦게 퇴근하는 길에 문득 이 문장이 뇌리를 스쳤다. 그때 나는 운전을 하고 있었다. 신호에 걸려 1차선에 서 있는데, 중앙선을 기점으로 반대편 차들이 내 쪽을 향해 줄줄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돌진해 오는 무수한 헤드라이트. 무심히 보고 있는데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는 아주 단순한 행위만으로도 나는 즉시 죽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존 파울즈 소설의 한 대목. 기분이 아주 묘했다.

1867년 빅토리아 시대, 영국 남서부 해안에 위치한 작은 마을 라임. 거센 바람과 파도가 몰아치는 절벽 끝에 한 여인이 서 있다.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녀의 이름은 사라 우드러프.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프랑스 중위의 여자’라고 불렀다. 그것은 ‘프랑스 중위 놈과 놀아난 창녀’라는 극도의 경멸적인 호칭에 다름 아니었다. 그녀가 그 일에 대해서는 일체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마을에는 온갖 소문만 무성할 뿐이었다. 어느 날 부잣집 딸과 결혼하기 위해 이 마을을 찾은 젊은 귀족 찰스가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그녀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찰스에게는 그녀가 자기를 꿰뚫어 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첫 만남 이후 찰스의 기억에 또렷이 남은 것은, 그녀의 얼굴에 드러나 있던 특징 따위가 아니라, 그의 예상에서 벗어난 모든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괜찮은 여성이라면 얌전하고 순종적이며 다소곳한 표정을 지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찰스는 남의 땅에 불법 침입한 기분이었다.
- 본문 중에서

그랬다. 사라 우드러프는 그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여자들과도 닮지 않았다. 하층민으로 태어나 출신 성분에 맞지 않게 고등교육을 받은 여자. 그러면서도 신분 상승의 기회는 철저히 박탈당한 여자. 그녀의 말을 빌리면, ‘농부의 마누라가 될 팔자로 태어났으면서도 무언가 다른,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교육 받은 여자’의 비애가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귀족이라는 출신성분과 새로운 시대를 지향하는 선구자적 태도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져 있던 찰스에게 그녀와의 만남은 벼락같은 충격이었다. 찰스가 응석받이 약혼녀를 버리고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선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동정심을 가장해 그녀에게 접근하는 찰스 앞에서 사라는 대담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그녀는 ‘그 일’에 대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프랑스 중위의 이름은 바르귀엔이었다. 그는 해변에 난파된 프랑스 배에서 구조되어 사라가 가정교사로 일하고 있던 저택에서 치료를 받게 된다. 잘생긴 수다꾼이었던 이 프랑스 남자에게 순진한 처녀 사라는 금세 빠져든다. 그는 사라에게 프랑스로 함께 가자고 꼬드기지만, 결정은 쉽지 않았다. 결국 그는 배가 출발하기 전에 1주일 동안 기다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웨이머스로 떠난다. 그리고 그가 떠난 지 닷새째 되던 날, 외로움과 절망에 휩싸인 사라 역시 그의 뒤를 따라간다. 하지만 웨이머스에 도착한 그녀가 마주한 것은 그 동안 자신이 완전히 속았다는 자각과 철저한 배신감이었다.

“처음에는 제 실수를 깨닫고 공포로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 공포가 너무나도 무서웠기 때문에, 전 그에게서 무언가 가치 있는 것, 존경할 만한 것, 명예로움 같은 것을 찾아보려고 애썼어요. 다음에는 속은 데 대한 분노가 제 마음을 가득 채웠어요. 과거에 견딜 수 없는 고독으로 고통 받지 않았다면 그렇게 눈이 멀지는 않았을 거라고 자신을 위로했죠.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된 책임을 제 처지 탓으로 돌린 거예요.”
- 본문 중에서

놀라운 것은 그 후에 그녀의 선택이다. 사라는 자신이 속았다는 걸 알고 나서도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떠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떠날 수 있었다. 바르귀엔은 이기적이고 사기꾼 기질이 다분한 인물이었지만, 싫다는 여자를 강제로 정복하려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날 밤 그곳에 남았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그때는 저 자신을 벼랑 아래로 내던지거나 제 심장에 스스로 칼을 꽂는 기분이었어요. 일종의 자살이었죠. 절망에서 나온 행위였어요. (…) 그 방에서 나와 버렸다면, 그래서 탤벗 부인 댁으로 돌아와 이전의 저 자신을 회복했다면, 지금쯤은 아마 죽어 버렸을 거예요. 그것도 제 손으로…… 제가 살아갈 수 있도록 지탱해 주는 것은 바로 수치심과,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다는 자각이에요. (…) 가끔 저는 그들을 동정해요. 전 그들이 갖지 못하는 자유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모욕이나 비난도 저를 자극할 수는 없어요. 그 경계를 넘어선 곳에 저 자신을 두고 있기 때문이죠.”
- 본문 중에서

사라는 존재 그 자체로 현대 소설이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사랑을 선택했으며 그 사랑이 너무도 한심한 것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긍정하고 받아들였으며 그 이후로 닥쳐온 시련에 대해서도 의연했으며 그러는 와중에도 자신에 대해 탐구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 김영하, 「19세기에 태어난 20세기의 여자」(산문집 『포스트 잇』) 중에서


이 소설은 동명의 제목으로 1981년에 영화화되기도 했다. 주연은 메릴 스트립과 제레미 아이언스. 2005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영국 작가 해럴드 핀터가 각색을 맡았던 작품이다. 첫 장면은 메릴 스트립이 분장을 마치고 거울을 들여다보는 모습에서 시작된다. 이어 카메라가 영화 촬영장을 풀 샷으로 훑어주는 가운데 감독이 ‘액션’을 외친다. 이렇게 영화의 한 축은 원작에 충실한 방향으로, 다른 한 축은 영화를 연기하는 남녀 배우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불륜이다)으로 두 가지 이야기가 동시에 전개된다. 아마도 제작진은 ‘전후 영국이 낳은 최고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이라는 수식어를 어떻게든 영상으로 구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노년으로 접어들고 있는 매력적인 두 남녀 배우의 젊은 시절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즐거움을 제외하면, 솔직히 실망스럽다. 구성이 나름대로 참신하긴 하지만, 원작의 깊이와 독특한 스타일을 따라가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1993년에 제작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순수의 시대>가 섬세한 연출력으로 당대의 위선과 개인의 고뇌를 좀 더 리얼하고 세련되게 담아냈다.

“당신과 같이 있고 싶어요.”

“당신의 아내가 될 순 없잖아요. 정부라도 되라는 건가요?”

“그런 단어가 없는 곳으로 도망가서 살고 싶어요.”

“제발……. 우릴 믿는 사람들한테 상처를 주면서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런 건 초월했어요.”

“아뇨. 당신은 한 번도 초월하지 못했어요.”

- 영화 <순수의 시대> 중에서



석양이 지는 바닷가. 멀리 한 여인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녀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등대를 향해 배 한 척이 천천히 다가가고 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는 자신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기로 한다. 배가 등대를 지나기 전에 그녀가 뒤돌아보면, 모든 걸 포기하고 그녀에게 가겠다고 말이다. 무심한 그녀의 뒷모습과 떨리는 남자의 눈길, 등대를 향해 점점 가까워지는 배의 모습이 교차된다. 그녀는 돌아본다, 혹은 돌아보지 않는다. 남자의 심장은 점점 크게 뛴다. 마침내 등대를 스쳐 지나가는 배. 그러나 그녀는 끝내 뒤돌아보지 않는다. 체념하고 돌아서는 남자의 모습은 말할 수 없는 쓸쓸하다……. 영화 <순수의 시대>를 떠올릴 때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장면이다. 그것은 단지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운명이었을까. 훗날 그녀는 말한다. 그가 지켜보고 있는 걸 알고 일부러 돌아보지 않았다고.

이 작품은 『프랑스 중위의 여자』와 거의 비슷한 시기, 즉 1870년대 뉴욕 상류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뉴욕 상류층 가문의 약혼녀 메이와 결혼을 앞두고 있는 변호사 뉴랜드 아처. 때마침 프랑스 백작과의 불행한 결혼 생활 끝에 뉴욕으로 돌아온 메이의 사촌언니 엘렌. 이 두 사람이 주인공이다.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엘렌의 자유분방한 태도는 뉴욕 사교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그러나 아처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엘렌을 열렬히 사랑하게 된다. 여기까지 보면 『프랑스 중위의 여자』와 비슷한 설정이지만, 결말은 사뭇 다르다. 관습에의 도전을 용납하지 않는 당시 상류계급의 보수성과 교활한 음모, 위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결국 아처는 거기에 굴복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의 선택이었고, 결과를 감당하는 것 또한 그의 몫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프랑스 중위의 여자』는 어떤 결론을 내리고 있는가. 대답하기 쉽지 않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지향하는 이 소설은 온갖 까다로운 장치들을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야기 전개 과정에 여러 가지 버전을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여기서 하룻밤 묵으실 건가요, 나리?”

“천만에. 마차를 준비하게. 사륜마차로. 비가 올 것 같군.”

(중략)

찰스는 마차가 라임의 동쪽 변두리를 지나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슬픔과 상실감, 그리고 이제는 운명의 주사위가 던져졌다는 것을 절감했다. 하나의 간단한 대답이 그렇게 많은 것을 결정지어 준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놀랍게 여겨졌다.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가능했다. 그런데 이제는 모든 것이 움직일 수 없게 고정되어 버렸다.


이것은 첫 번째 버전. 찰스가 사라가 묵고 있는 엑서터의 호텔을 그냥 지나쳐 갔을 때의 상황이다. 그는 사라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애써 부정하며 부잣집 철부지인 약혼녀에게로 돌아간다. 두 사람은 행복하지는 않지만 안락하고 부유한 결혼생활을 한다. 그리고 사라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이따금씩 그녀에 대한 기억에 사로잡히지만, 그가 선택한 물질적 풍요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영화 <순수의 시대>와 비슷한 결말이다. 그러나 작가는 여기서 되감기 버튼을 누른다.

“여기서 하룻밤 묵으실 건가요, 나리?”

찰스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머뭇거리며 잠시 하인을 바라보다가, 잔뜩 찌푸린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중략)

“선생님을 다시는 못 볼 줄 알았어요.”

자기도 그런 마음이었다는 것을 그는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를 쳐다보았고, 그는 재빨리 시선을 떨구었다. 그 헛간에서 겪었던 것과 똑같은, 그 이상하게 막막해지는 듯한 증세가 다시금 그를 휘감았다. 심장은 전속력으로 뛰고 있었고, 손은 덜덜 떨렸다.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가는 그만 이성을 잃게 되리라는 예감을 느꼈다. 그 눈빛을 막기라도 하려는 듯 그는 눈을 감았다.


이것은 두 번째 버전. 찰스는 사라가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간다. 그는 약혼녀를 버리고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선택함으로써 세상의 비난과 조롱을 한 몸에 받는다. 그러나 비록 부와 명예를 잃었지만, 그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사랑과 자유를 향한 자신의 의지가 무엇보다 소중했기 때문에.

그렇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선택에 대한 이야기다. 찰스의 선택, 사라의 선택, 그리고 독자들의 선택. 작가는 교활하게도 결말까지 선택의 여지를 만들어 놓았다. 해피엔딩과 씁쓸한 엔딩. 일종의 ‘열린 결말’인 셈인데, 그래서인지 책장을 덮으면서도 왠지 모를 불편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결국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것. 너무나 당연하지만, 동시에 두렵게 느껴지는 진실이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선택하지 않는 것, 선택을 두려워하며 망설이고 있는 이 순간 또한 하나의 선택이라는 사실이 문득 섬뜩하게 다가온다.



프랑스 중위의 여자
존 파울즈 저/김석희 역 | 열린책들 |

매혹적인 미스터리와 에로틱한 기대감으로 가득 찬 소설. 1867년 봄, 영국 남서부 해안의 작은 마을 라임. 그 황량한 바닷가에 한 쌍의 남녀가 나타난다. 그리고 바람과 파도가 몰아치는 방파제 끝에 서 있는 또 한 여인. 숨막힐 듯 답답하고, 그러면서도 왠지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 속에서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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