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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둘러싼 사람들의 아름다운 풍경 - 『커피 한 잔 더』
『커피 한 잔 더』는 커피를 둘러싼 사람들의 아름다운 풍경을 커피향처럼 은은하게 전해준다는 점이 가장 좋다. 정말로 커피를 만나고, 사람들을 만나고 싶게 하는 책이다.
다방 커피만 먹던 내가 처음으로 원두커피를 먹어본 건 고등학교 때였다. 명동의 커피숍에 들어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커피를 시켰다. 종업원은 화학실에서나 볼 것 같은 원형의 유리관이 양쪽으로 달린 기구와 알코올램프를 가지고 왔다. 알코올램프에 불을 붙여 가열하자 아래에 있던 물이 좁은 유리관을 통해 위로 올라가 커피 색깔로 바뀌어 부글부글 끓는다. 알코올램프의 불을 끄자 커피는 다시 아래로 내려온다. 커피가 만들어지는 동안 아무 말도 않고 그 광경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사이폰 방식이라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사실 그때 마신 커피의 맛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그 맛에 반해 원두커피의 세계에 빠져들지도 않았다. 단지 맛이 아주 쓰고 독특했다는 생각만 난다. 그리고 커피의 맛보다는, 알코올램프에 불이 붙는 순간부터 한 잔의 커피가 만들어지는 그 순간까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야마카와 나오토의 『커피 한 잔 더』를 보고 있으니, 그때의 기억이 났다. 그때 들어갔던 명동의 커피숍도 『커피 한 잔 더』에 나오는 카페처럼 약간 어두침침하고, 삐거덕거리는 마루가 있었고, 재즈는 아니었지만 오래된 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요즘 홍대나 강남에서 볼 수 있는 화사한 느낌의 카페가 아니라, 여전히 명동이나 인사동 어느 구석엔가 남아 있을 것만 같은 고풍스러운 커피숍. 그곳에 가면 50년대의 재즈 음악이나 60년대의 포크송이 흐르고,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는 사람들이 있을 것만 같다. 한구석에 졸고 있는 고양이가 있다면 더욱 좋겠고. 하지만 그건 시대착오적이다. 그런 온화하면서도 한편으로 음습한 분위기를 지금 많은 사람들이 즐긴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건 그냥 한때의 꿈이고, 지금도 가끔 기억나는 환상일 뿐이다. 『커피 한 잔 더』에 나오는 카페의 이름이 ‘환상’인 것처럼.
『커피 한 잔 더』는 지금도 일본 만화잡지에 연재되는 작품이지만, ‘현재’의 느낌을 찾기란 무척 힘들다. 과거의 꿈, 추억 같은 것들만이 떠오른다. 잃어버린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에피소드가 나온다. 어렸을 때 다른 친척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던 아저씨가 있었다. 동년배가 없었던 아이는 그 아저씨의 방에 가서 노는 것을 좋아했다. 뭐가 딱히 재미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묘하게 끌리는 것이 있었다. 그 방은 어른의 방도, 아이의 방도 아니었다. 아저씨의 방에는 추리소설과 만화책, 재즈음반과 프라모델이 가득했다. 그리고 사이폰식 커피. 어른이 되어서 빈둥거리며 결혼도 하지 않고 있는 나는, 그 순간을 회상하며 추억에 젖는다. 그 아저씨가 누구였건 간에, 지금의 나와 잘 어울리는 친구, 대화 상대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그렇듯 아무리 희미해지더라도, 결코 사라질 수 없는 소소한 기쁨 같은 것들을 기억하고 있는 순간이 바로 커피 한 잔을 더 마시고 싶어지는 때다.
야마카와 나오토는 작지만 소중한 이야기들을 조용하게 들려준다. 때로는 격정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야마카와는 서두르거나 휘둘리지 않는다. 아무리 힘들고 슬픈 일이 있어도, 집 앞 계단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듯이 차분하게 바라본다. 『커피 한 잔 더』에는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은 풍경들이 가득하다. 고서점의 천장까지 책이 가득 꽂혀 있는 풍경, 커피를 마시러 오는 사람들과 종업원 사이에서 생길 수 있는 은밀한 감정과 오해들, 불륜을 조사하고 사람 찾는 일로 하루를 보내고 돌아와 누군가와 커피를 마시는 탐정의 고적한 일상, 야옹 군이 인도해주는 지하의 네코마루 다방의 은밀한 풍경 그리고 사라져버린 카페 ‘환상’의 아스라한 기억 등등. 그 아름다움은 그저 눈에 박히는 아름다움이 아니다. 바라보고 있으면, 어딘가 가슴 한 구석이 따뜻해질 것만 같은,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애잔하고 쓸쓸한 느낌이 감도는 아름다움이다. 커피의 씁쓸하면서도 아스라한 맛처럼.
커피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가득한 『커피 한 잔 더』가 더욱 따스하게 읽히는 이유는 음식이나 술 등을 다룬 만화들이 대체로 정보에 얽혀 ‘만화’ 자체의 즐거움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음식이나 요리에 관한 정보를 얻는 것도 물론 재미있지만, 역시 만화로서의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감정과 생각에 공감하고,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눈길을 빼앗기는 순간들을 더 많이 만나고 싶다. 똑같이 블루마운틴의 원두커피를 마셔도, 그것을 만드는 방법에 따라서 맛은 달라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에 따라 모든 것이 바뀐다. “하지만 그건 아마도…… 아오야마 씨의 커피. 무쓰미 씨의 커피와는 다른 맛일 거예요.” 『커피 한 잔 더』는 커피를 둘러싼 사람들의 아름다운 풍경을 커피향처럼 은은하게 전해준다는 점이 가장 좋다. 정말로 커피를 만나고, 사람들을 만나고 싶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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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카와 나오토> 글,그림/<오지은> 역8,100원(10% + 5%)
커피를 둘러싼 이야기들을 모은 작품집. 고급스러운 대저택, 허름한 건물의 계단, 오래된 카페나 삼촌의 방 등 일상의 풍경과 만남의 장면에 늘 커피가 함께함을 보여주는 책이다. 그리고 작은 이야기들 사이사이에 있는 다섯 번의 ‘커피 브레이크’는 작가 개인의 짤막한 감상을 담은 페이지로, 차분하고 서정적이면서도 미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