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든 여자든 사람은 자신의 얼굴로 표정을
짓고 손짓을 하고 몸짓과 발걸음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모든 것이 다 정면에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그 이면은? 뒤쪽은? 등 뒤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 본문 중에서
『뒷모습』은 상당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에두아르 부바가 ‘뒷모습’을 주제로 촬영한 사진 콜렉션에 미셸 투르니에가 주석을 달았다. 흑백사진들은 매혹적이고, 문학적 수사는 독창적이다.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잔잔한 감동이 밀려온다. 각자 다른 장소와 다른 상황에서 촬영된 뒷모습들은 그 숫자만큼이나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중에 인상 깊은 사진들을 다섯 개의 키워드로 묶어봤다.
첫 번째 키워드 - 쓸쓸함
말해봐요, 할머니, 그렇게 허리를 앞으로
구부리고 가는 것은 땅바닥에 떨어뜨린 젊은 날을
줍기 위해서인가요, 아니면 등을 짓누르는
세월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인가요?
-본문 중에서
구부정한 등을 보이고 지팡이를 짚은 채 걸어가고 있는 노인의 뒷모습이다. 검은 상복을 입고 옆구리에는 회양목 가지를 끼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장례식에 참석하러 가는 길인 듯. 햇살은 따뜻하고 수풀이 우거진 길은 고즈넉하다. 보고 있으면 문득 슬퍼진다. 아, 너무도 쓸쓸한 당신.
두 번째 키워드 - 골똘함
정오의 하늘에서
흘러내리는 나른한 무기력, 삼라만상 속의
약간 쓸쓸하면서도 낙관적인 행복감, 그런
모든 것을 두고 어찌 한동안 짧은 명상에 잠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본문 중에서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은 골똘하다. 비록 얼굴이 보이지는 않지만, 그의 뒷모습은 그가 나른한 명상에 빠져 있다고 이야기해준다. 벤치 한 구석에 방치된 책이 심증을 굳혀준다. 그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가. 아무것도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골똘함은 결코 칙칙하거나 무겁지 않고, 고독마저 달콤해 보인다.
세 번째 키워드 - 행복
가난한 사람들은 수줍다. 추위를 타고 겁이
많다. 그래서 세상의 첫날처럼.
세상의 마지막 날처럼. 아주 조금씩만 앞으로
나가본다. 남자는 양말을 신은 채, 여자는 치마를 약간
걷어 올리고. 그러나 이 즐거움과 정다움이 이 한때를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으로 만들어놓는다.
-본문 중에서
나란히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연인의 등은 사랑스럽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한 채, 그렇게 그들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미셸 투르니에는 사진 속의 남녀가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확신한다. 부자들이라면 아예 수영을 할 것이기에.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남루함 때문에, 그들의 행복은 더욱 빛이 난다. 이 커플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느덧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져 온다.
네 번째 키워드 - 비밀
모든 강렬한 감정이 다 그렇듯이
우정은 사회의 박해를 받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정에는 비밀과 배타적 결속이 있다. 우정은
타인들에게 들을 돌리는 방식에 의해서 그 본질을
가장 뚜렷이 드러낸다.
-본문 중에서
타인에게 등을 돌리는 행위는 이기적이다. 그것은 방해하지 말아달라는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서로 팔동무를 하고 걸어가는 어린 소녀들의 뒷모습은 깜찍하면서도 은밀하다. 무슨 대단한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누가 들을세라 꼭 붙어서 가고 있다.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할 태세다. 우정은 이렇게 정겨우면서도 배타적이다. 뒤통수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소곤소곤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다섯 번째 키워드 - 반전
파리? 파리라면 에펠탑이지! 샹송은 이렇게
노래한다. 그런데 쓰레기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다.
-본문 중에서
이 사진의 제목은 ‘등 뒤에서 본 파리’. 아름다운 파리의 야경을 경험했던 사람이라면, 배신감에 치를 떨 법도 하다. 에펠탑과 쓰레기 더미가 공존하는 이 노골적인 풍경은 파리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가차 없이 뭉개버린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렇게 넝마가 굴러다니는 더러운 거리 역시 낭만의 도시 파리의 엄연한 일부분인 것을. 아마도 뒷모습이 흥미진진할 수 있는 이유는, 이처럼 그 이면에 항상 반전의 여지를 숨겨 놓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 덜 보여줌으로써 조금 더 상상하게 만드는 힘, 바로 뒷모습의 또 다른 매력이 아닐는지.
뒷모습의 존재는 참 불가사의하다. 분명히 자신의 일부인데, 만지지도 확인하지도 확신하지도 못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모습. 언젠가 사진에 찍힌 내 뒷모습을 보고 흠칫 놀란 적이 있다. 너무 낯설어서였다. 분명 내가 맞는데,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이상한 기분. 이 낯선 느낌은 아마도 익숙한 나와 또 다른 나 사이의 아찔한 간극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다.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앞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뒷모습만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묘한 정서들이 있는 것이다.
『뒷모습』을 통해 ‘또 다른 나’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 나의 분위기와 마주한다는 것은 조금은 두렵고 낯선, 그러나 가슴이 두근거리도록 흥미로운 경험이다. 당신의 뒷모습은 어떠한가?
사진 속의 이 다양한 뒷모습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다시 살아 움직이는 삶의 앞모습을 만나면 즐겁다. 그러나 그 즐거움의 배경에 오래 지워지지 않는 뒷모습들이 더러 있다. 이것이 바로 미적 균형이 아닐까. 에두아르 부바와 미셸 투르니에의 ‘뒷모습’에는 우리의 눈높이를 올려주는 그 같은 미적 균형이 있다.
-김화영, ‘문득 걸음을 멈춘 존재의 뒷모습’(역자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