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연수의 文音親交 프로젝트
사랑의 마지막 며칠은 지옥의 서곡이다. 그럼에도……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와 모노의 <You Are There>
사랑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진정한 작가는 평생 한 권의 책만을 쓰고자 할 뿐이라는 사실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백전백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작가의 용기는 거기서 비롯한다.
전쟁의 마지막 며칠은 지옥의 서곡이었어. 도시는 멀리서 벌어지는―활기 없이 맥박치는 상처 같은―전투를 겪으며, 전초전과 전투들, 폭격과 기아의 몇 달을 보내고 있었지. 살인과 전투, 음모의 망령이 수년 동안이나 도시의 영혼을 부패시키고 있었지만, 많은 이들은 전쟁이 아직 먼 곳에 있다고, 그것은 금방 지나갈 풍랑이라고 믿고 싶어했어. 어느 정도, 기다림은 피할 수 없는 것을 더 나쁘게 만들어버렸지. 고통은 눈을 뜨자마자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지. 전쟁만큼 망각을 길러내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다니엘. 우리 모두는 입을 다물고 있고, 저들은 우리가 보았던 것, 우리가 했던 것,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서 우리가 배웠던 것은 환영이라고, 지나가는 악몽이라고 열심히 우리를 설득하지. 전쟁은 추억이 없어. 그래서 과거의 일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들이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우리가 전쟁을 인정하지 않아 그것이 다른 얼굴, 다른 이름으로 다시 돌아와 예전에 남겨두었던 것들을 먹어 치울 때가 올 때까지, 아무도 전쟁을 이해하려는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지.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소설 『바람의 그림자』 제2권 303페이지, 이제 자신의 사랑이 끝났다는 것을 안 뒤 그림자처럼 도시를 떠돌며 책을 불태우는 악마가 누구인지 비로소 알게 되는 그 순간에 나오는 이 아름다운 문장을 옮겨 적으며 나는 ‘전쟁’을 ‘사랑’이라고 고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사랑은 추억이 없어. 그래서 과거의 일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들이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우리가 사랑을 인정하지 않아 그것이 다른 얼굴, 다른 이름으로 다시 돌아와 예전에 남겨두었던 것들을 먹어 치울 때가 올 때까지, 아무도 사랑을 이해하려는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지”라고.
이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 스페인 내전, 군사정부의 공포를 관통한다. 20세기의 가장 뜨거운 순간들이자 끊임없는 감정교육의 나날들. 이 시기를 지나면서 인류가 익힌 건 『법구경』의 낡고 낡은 문장들, 하지만 삶에서 최소한 한 번은 우리를 습격하는 문장들이다. 예컨대 “붙잡기 어렵고 경솔하고 욕망을 따라 헤매는 마음을 억제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억제된 마음이 평화를 가져오기 때문에”나 “홀로 멀리 가며 자취도 없이 가슴 속에 숨어든 이 마음을 억제하는 사람은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리라”와 같은 문장들. 헤어지면 가슴이 아프니 사랑하지 말라는 전언들.
전쟁을 통해 인류는 이 낡은 문장들이 진실임을 알게 됐다. 마찬가지로 사랑을 통해서도 그걸 깨닫게 됐으니 때로 사랑은 전쟁만큼이나 잔인하기도 하다. 우리가 함께 보았던 것, 나 자신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라고 자신의 입으로 말했던 것, 우리가 죽고 난 뒤에도 거기 남아 영원하리라 믿었던 것, 우리의 전부였던 것들이 환영이라고, 지나가는 악몽이라고 다시 우리의 입술로 말하게 만든다. 때로 사랑이라는 것은. 이 자명한 사실로부터 시작해 『바람의 그림자』는 50여 년에 걸친 한 사랑의 역사를, 그리고 그 사랑의 끝난 뒤에 우리가 어떤 식으로 살아남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충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다는, 그 치명적인 진실
사랑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진정한 작가는 평생 한 권의 책만을 쓰고자 할 뿐이라는 사실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백전백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작가의 용기는 거기서 비롯한다. 그는 매번 자신이 쓰고자 갈망하는 책을 쓰지 못할 것이다. 영원히 반복되는 이 실패를 통해 그는 작가가 된다. 나는 사랑을 쟁취했다고 말하는 자를 믿지 않는다. 나는 자신의 삶은 성공적이라고 회고하는 자를 믿지 않는다. 나는 이미 대표작을 썼다고 말하는 작가(과연 그런 작가가 존재하긴 존재할까?)를 혐오한다. 모든 책은 가지지 못한 삶의 흔적이다. 그건 영영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한 갈망의 잔여물이다. ‘잊혀진 책들의 묘지’라는 건 결국 그런 책들의 운명에 대한 은유다.
1945년 6월의 어느 새벽, 바르셀로나에 사는 소년 다니엘은 알렉상드르 뒤마의 어느 작품에서 빌렸을 법한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반짝이는 아버지를 따라 아르코 델 테아트르 가의 파란 바다 안개 같은 원형 지붕으로 된 아치를 통과한 뒤, 라발 지구로 들어갔다. 거기에 복도와 책으로 가득 찬, 벌집처럼 아래에서부터 꼭대기까지 책으로 꽉 찬, 책장들이 만들어내는 미로가 다리와 터널, 돌계단, 단들로 연이어지면서, 불가능한 기하학적 구조의 거대한 도서관을 연상시키는 ‘잊혀진 책들의 묘지’가 있었다. 그곳에서 다니엘은 ‘바람의 그림자’라는 책 한 권을 찾아낸다. 그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 소설은 친아버지를 찾아 나선 사람의 이야기였는데, 친아버지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는 어머니가 임종할 때 남긴 몇 마디 말로 인해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친부를 찾는 그의 이야기는 환상적인 모험으로 변하는데 그 과정에서 주인공은 잃어버린 유년기와 소년기를 되찾기 위해 싸우고 독자들은 서서히 그의 최후까지 그를 괴롭힐 저주받은 사랑에 대한 그림자를 발견하게 된다.
도입부를 펼치자마자 나오는 이 줄거리 요약은 이 소설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전쟁도, 그 어떤 인생도, 그 어떤 사랑도 요약될 수 없는 것처럼 이 소설 역시 요약이 불가능하다. 누군가 추리소설의 독자 유형으로 나를 분류한다면, 나는 처음부터 사건의 전말을 말해주는 도서(倒敍)추리소설의 애호가가 될 것이다. 나는 이렇게 서두에서 결말을 말해주는 작가들을 선호한다. 인류에게 알려지지 않은 인생의 비밀은 이제 거의 없으니까. 사랑은 오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소중한 것을 잃을 것이다. 죄책감은 좀더 오래 지속될 것이다. 최후의 순간에 우리는 해일처럼 우리의 존재를 삼켜버리는 진실에 직면할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다는, 그 치명적인 진실에. 인생과 사랑을 이해하려는 용기는 이 진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15분 38초가 지나고 나면 짧은 침묵의 상태가 찾아온다
1919년 훌리안 까락스와 페넬로페 알다야가 열망으로 흥분해서 사랑을 나눈 기간은 엿새.
1933년 훌리안 까락스와 누리아 몽포르트가 언제나 아무 말도 없이 바닥에서 사랑을 나눈 기간은 2주일.
1954년 알다야 저택에서 베아트리스 아길라르와 사랑을 나눈 뒤, 전화하겠다던 말과 달리 그녀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자 다니엘 셈페레가 예상한 여생은 ‘앞으로 7일.’
이 소설에 나오는 사랑의 지속시간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파스칼 키냐르가 쓴 『은밀한 생』에 따르면 사랑의 결과는 여덟 가지다. “사랑은 심장을 빨리 뛰게 하고, 고통을 진정시키고, 죽음을 떼어놓고, 사랑과 관련되지 않는 관계들을 해체시키고, 낮을 증가시키고, 밤을 단축시키며, 영혼을 대담하게 만들고, 태양을 빛나게 한다.” 요컨대 사랑은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방식으로 우리를 삶에 몰입하게 만들면서 서서히 우리의 수명을 단축시킨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자기 생각보다 더 오래 산다. 그러므로 사랑의 마지막 며칠은 앞으로 남은 지옥의 서곡이 될 것이다.
사랑 속에서는 그처럼 짧게 살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지옥 속에서는 그토록 오랫동안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일본의 4인조 밴드 모노의 앨범 <You Are There>의 세 번째 트랙 ‘Yearning’은 고통에 찬 열망이 얼마나 매혹적이고 환상적인 것인지 잘 보여주는 곡이다. 15분에 걸친 이 연주곡은 『법구경』의 문구와는 전혀 반대 방향으로 우리를 몰아간다. 과연 어느 쪽이 먼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우연과 열망은 서로를 북돋아주면서 우리에게 평화가 아니라 죽음을 가져올 것이다. 책에는 이 사실을 이렇게 적어놓았다.
언젠가 훌리안은 우연은 운명의 상처라고 쓴 적이 있어. 우연이란 없는 거야, 다니엘. 우리들은 우리 무의식적 욕망의 꼭두각시에 불과할 뿐이지. 나는 수년 동안 훌리안이 여전히 내가 사랑에 빠졌던 그 남자라고 믿고 싶었어. 아니면 그가 타고 남은 재이던가. 또 고통과 희망이 교차하면서 우리가 어떻게든 살게 되리라고 믿고 싶었어. 라인 쿠베르는 죽어 책의 페이지들 속으로 들어가버렸다고 믿고 싶었어. 우리 인간들은 진실 앞에서 어떤 것이든 다른 것을 믿을 준비가 돼 있지.
그리고 15분 38초가 지나고 나면 짧은 침묵의 상태, 완벽한 죽음의 상태가 찾아온다. 이 소설의 방식대로 나는 그 상태를 묘사하겠다.
페넬로페 알다야 다비드 알다야
1902-1919 1919
그리고 죽음과도 같은 깊은 절망 속에서 페넬로페 알다야가 훌리안 카락스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의 한 구절.
그렇더라도 나는 당신이 영원히 가도록 내버려둘 수 없어요. 내가 당신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걸 모른 채 날 잊게 할 수는 없어요. 나는 처음부터 알았어요. 당신을 잃을 거라는 걸, 내가 당신에게서 보는 것을 결코 당신은 내게서 보지 못할 거라는 걸 말예요. 내가 처음부터 당신을 사랑했다는 걸, 지금도 계속해서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요. 비록 당신은 후회하겠지만, 나는 지금 그 어떤 때보다도 더 당신을 사랑해요.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모든 오해가 끝난 뒤에, 그리고 동시에 사랑도 끝난 뒤에 이런 편지를 받게 되면, 그가 누구든 우리는 우리의 조상의 조상의 조상들이 이미 오래 전에 읊조렸던 말들을 결국 중얼거리게 될 것이다. 『법구경』의 말들. 모든 경전의 말들. 결국 나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리라는 것. 그럼에도 우리는 결국 혼자서 가지 못할 것이다. 그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바르셀로나라는 도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까. 나는 바르셀로나에 한 번도 가본 일이 없지만, 이 소설을 읽다가 꼭 거기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거기가 어떤 곳일지 어느 정도는 알 것 같다. 한 권의 책을 통해서 인생과 사랑의 비밀을 알게 되는 소년 다니엘이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바르셀로나는 언제나 10월의 바르셀로나였는데, 그때 도시의 영혼은 산책하러 나오는 듯하고 사람들은 카날레타스 샘물을 마시기만 해도―이 기간에는 기적처럼 소독약 맛도 나지 않았다―현명해지는 듯했다. 나는 구두닦이들, 오전 중의 커피 타임에서 돌아오는 말단 사무원들, 복권 판매원들, 그리고 급할 것 없이 발레를 하듯, 화필로 점묘법의 선을 그리듯 도시를 닦고 있는 청소부들을 피해가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두 번째. 경찰에 의해 온몸을 인두로 고문을 당한, 다니엘의 가장 소중한 친구 페르민 로메르 데 토레스(그나마 가명이지만)가 쉴 새 없이 다음과 같은 농담을 던지니까. “네가 굳게 믿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세상은 네 가랑이의 욕망 주변을 회전하지 않아. 다른 요인들이 인류의 발전에 영향을 미치는 거라구”라거나 “넌 참 여자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구나, 다니엘. 내 크리스마스 보너스를 걸고 내기를 하는데, 그 앤 지금 자기 집에서 줄리엣처럼 힘없이 창문을 바라보며 네가 와서 야만인 같은 자기 아버지에게서 자기를 구해낸 후 육욕과 죄악의 참을 수 없는 소용돌이로 자기를 끌고 들어가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다” 같은 시답잖은 농담들. 거리 어느 모퉁이를 지나갈 때 친구가 하는 말 같은 농담들.
비현실적인 에필로그, ‘거기, 있나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Yearning’이 끝나고 나면 이윽고 ‘Are You There?’가 시작되니까. 이 아름다운 곡은 모든 열망의 순간이 끝난 뒤에도 우리가 왜 살아가는지 내게 말해주는 듯하다. 소설에 따르면 1955년 11월 27일 이후의 세계는 ‘사후(死後)’의 세계다. 이 죽음 뒤의 세계에 지금까지 나온 인물들이 모두 다시 등장한다. 다들 거기에 있다. 바르셀로나 거리가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이듯이. 죽었어야만 했던 다니엘은 물론, 모두가 죽었다고 생각했던 훌리안 카락스 역시. 이 에필로그는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아름답다. 에필로그 격인 ‘등장인물 1966’이 시작되기 직전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카락스가 계속 이곳에 있다고 생각하세요? 바르셀로나의 어느 곳인가에요?”
“다른 걸 물어봐라.”
“반지는 있어요?”
페르민이 미소 지었다.
“자, 가자, 다니엘. 사람들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인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거기, 어딘가에서. 평생 우리를 기억하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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