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발디의 ‘사계’는 자의든 타의든 수도 없이 들어왔을 것이다. 학교 음악수업 때는 물론이고 각종 연회며 TV 프로그램 소개 배경음악으로까지 참 지겹도록 들었다. 덕분에 클래식에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라도 몇몇 악장의 특정 멜로디는 허밍으로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 옛날 이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곡을 만들 수 있었을까?’라며 어렸을 때부터 클래식 작곡가들에게 경외심을 품고 살았으면서도, 비발디의 ‘사계’에 대해서는 그다지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던 것 같다. 이른바 ‘신비주의’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그런데 몇 년 전 ‘사계’ 음반을 손수 샀다. MP3 플레이어가 보편화되면서 CD는 무용지물이 되던 시기였지만, 소장하고 싶은, 이름 모를 허영심을 주최할 수가 없었다. 시작은 원전악기(바로크, 고전주의 시대에 사용됐던 악기로, 지금의 첼로나 바이올린 등과는 또 다른 느낌의 음색을 지닌다.)에서 출발한다. 원전악기를 연주하는 공연 팀을 소개하려고 자료조사를 하다, 줄리아노 카르미뇰라가 연주하는 ‘사계’의 여름 3악장을 듣고 시쳇말로 홀딱 반해버린 것이다.
물론 마음의 상태가 달라져서인지 다시 듣는 ‘사계’는 새로운 매력으로 가득했다. 봄의 밝은 속삭임, 여름의 더위와 폭풍, 가을의 느긋한 여유, 겨울의 추위와 혹독함. 계절이 지닌 표정을 음악으로 표현해낸 비발디의 위대함에 그제야 입이 떡 벌어졌다. 중학교 때 ‘사계’의 ‘봄’을 들려주면서 느낌을 그려보라고 했던 미술선생님까지 새삼 멋졌다는 생각을 해본다.
비발디의 ‘사계’가 이렇게까지 좋아졌으니, 이 무지치 실내악단의 내한소식은 더없이 반가웠다. ‘비발디는 사계를 작곡했고, 이 무지치는 사계의 명성을 창조했다.’라는 말처럼 이 무지치가 연주한 ‘사계’ 음반은 전 세계적으로 8천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끊이지 않는 울림을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어로 ‘음악가들’을 뜻하는 이 무지치는(I Musici)는 56년 전통의 정통 실내악단으로, 바이올리니스트 6명, 비올리스트 2명, 첼리스트 2명, 더블베이스와 쳄발로 주자 각 1명 등 모두 12명으로 구성돼 있다.
올해로 열한 번째 내한공연. 서울에서는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28일과 29일 이틀 동안 무대를 선보였다. 모차르트의 대표적인 현악곡인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를 시작으로 로시니의 현악 4중주가 이어지자, 객석은 숨소리까지 죽여 가며 연주에 빨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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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 솔로 안토니오 안셀미 (사진 제공: 아카디아) | |
이어 두 번째 자리에 앉아 있던 안토니오 안셀미가 무대 중앙으로 나온다. 2003년부터 이 무지치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는 현재 이탈리아 테라모 주립음악원의 바이올린 교수로, 단원 가운데는 젊은 층에 속한다. 그의 화려한 독주가 펼쳐질 곡은 파가니니의 ‘베네치아의 축제’. 다른 단원들이 대부분 피치카토(현을 손가락으로 튕기는)로 만들어주는 반주에 그는 홀로 신기에 가까운 연주를 선사한다. 변주곡답게 단순한 멜로디에서 현란한 곡주를 넘나들며, 쇼를 보는 듯한 운지와 역동적인 보잉으로 기교의 최고봉을 들려줌과 동시에 보여줬다. 열정적으로 연주하는 그의 모습은 검은 장발, 무척이나 오뚝한 콧날과 어우러져 더욱 인상적이었다.
쉬는 시간 후 이어진 무대에서는 ‘사계’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었다. ‘곡의 학대 해석을 피하고 바로크 음악의 원래 표정을 표현한다’는 기조답게 그들의 연주는 견고했다. 때문에 다소 기교적인 연주를 좋아하는 필자로서는 공연에 앞서 조금은 지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연주를 듣는 동안은 다른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많이 들어왔던 ‘사계’인데도 몸이 바짝 긴장되면서 손에 땀이 배어왔다. 특히, 악장인 안토니오 살바토레의 바이올린 솔로는 열정적이면서도 균형이 잡힌, 연륜과 역량이 결합된 근사한 연주였다. 동네 할아버지처럼 다정한 표정으로 웃던 살바토레가 미친 듯이 폭풍우 속으로 휘몰아칠 때면 나도 모르게 그와 함께 빗속을 내달렸고, 혹한에 괴로워할 때는 내 몸에도 소름이 돋았다. 살바토레가 연주하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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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장 안토니오 살바토레 | |
물론 연주가 끝나자 기립박수와 함께 여기저기서 ‘브라보’가 터져 나왔다. 객석의 뜨거운 화답에 그들은 앙코르 무대에서 3곡이나 연주했는데, 2곡은 ‘우리 집에 왜 왔니’와 ‘보리밭’이어서 왠지 단원들과 한결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이번 공연에서는 이렇게 한국 팬들을 배려하는 단원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악장 살바토레는 근엄한 표정으로 연주를 하다가도 악장이 다 끝나면 ‘이제 박수를 쳐도 된다’는 듯 활을 크게 떨어뜨리며 객석을 향해 따뜻한 미소를 날렸고, 무대가 이어지는 내내 웅장하고 맑은 선율을 그려냈던 첼리스트가 역시나 편안한 동네 아저씨처럼 돌아다니며 한국말을 건네는 모습도 친근했다. 또 첫날 클래식 애호가들을 위한 공연에서와는 달리, 둘째 날은 탱고와 재즈, 우리 노래 등 많은 소품곡을 곁들여 관객들에게 보다 친숙한 무대를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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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정통 실내악단 ‘이 무치지’ | |
필자는 클래식 무대라고 하더라도 공연장에 가기 전에 따로 공부를 하지는 않는다. 아는 만큼 공연을 보는 재미와 기쁨이 배가 되는 이점은 있지만, 공연 자체를 즐기는 입장에서는 매 공연마다 예습을 하자면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리뷰를 써야 할 때는 클래식 전공자가 아닌 만큼 돌아와서 복습도 하고, 관련 자료도 확인한다. 하지만 공연장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즐긴다. 연주의 세밀한 실력이나 음향의 상태까지는 알 수 없지만, 관객 가운데 한 사람인 내가 들었을 때 좋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무지치 단원들이 국내 도시를 순회하며, 전 세계를 돌며 바라는 것도 관객들의 이 같은 기쁨일 것이다.
또한 음악을 굳이 공연장까지 가서 들어야 할 필요가 있나 생각한다면 클래식 무대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기 바란다. 우리가 다소 어렵고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클래식. 그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가들의 한없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태, 때로는 치열할 만큼 격정적인 모습에서 터져 나오는 음악에 한 번 빠지면, 음반보다는 온몸으로 들을 수 있는 공연장을 찾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