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제 그 짐승을 죽이지요.”
“무슨 짐승 말이냐?”
어머니는 이렇게 묻고는 나를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바로 저 고양이요.”」
이 소설은 한 소년과 한 마리 고양이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2차대전이 끝난 직후 독일의 한 마을. 무너진 돌담 위에서 한 소년이 딱딱한 빵 한 덩어리를 아껴 먹고 있었다. 그때 소년의 눈앞에 나타난 고양이 한 마리. 굶주려서 비쩍 마르긴 했으나, 초록색 눈에 여우처럼 붉은 털을 가진 아름다운 녀석이었다. 소년은 돌을 던졌다. 딱히 맞힐 생각은 아니었는데, 정면으로 돌을 맞은 고양이가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기분이 언짢아진 소년은 남은 빵 덩어리를 고양이에게 줘버린다. 나중에 소년은 어린 동생들 역시 자기들이 먹을 빵을 고양이한테 준 사실을 알게 된다. 소년은 화가 치밀어 고양이를 발로 찬다. 하지만 고양이는 발길질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뿐이다. 다시 마음이 불편해진 소년은 아껴뒀던 빵 조각을 꺼내 고양이에게 던져준다. 화를 내면서. 그리고 또 후회한다.
소년이 분노한 이유는 단순하다. 고양이가 먹는 게 아까웠던 것이다. 극도로 궁핍한 시절, 사람이 먹을 것도 모자란 판에, 고양이 따위가 가족들이 먹을 음식을 축내고 있다는 사실을 소년은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년의 어머니와 어린 두 동생들이 고양이를 불쌍히 여겨 먹을 것들을 계속 나눠주면서, 그의 분노는 점점 커져만 간다. 먹는 것과 얽힌 에피소드는 연달아 등장한다. 고양이가 뭔가를 받아먹을 때마다 소년은 화가 치밀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고양이가 마신 우유는 마땅히 어린 동생들이 마셔야 할 것이었고, 고양이가 먹은 소시지는 새벽에 길게 줄을 서서 힘들게 배급받은 귀한 양식이었으며, 고양이가 먹어치운 생선은 네 가족의 한 끼 식사를 위한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소년과 고양이의 불편한 동거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놈은 다리를 절었고, 오른쪽 앞다리에 상처가 나 있었다. 그것은 내가 던진 장작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고양이에게 붕대를 감아주었고 먹을 것도 주었다. 그때부터 그놈은 날마다 왔다. 식사 때마다 그 붉은 짐승은 함께 했으며, 우리는 아무도 그놈 앞에서 무언가를 숨길 수 없었다. 우리가 무언가를 먹으면 놈은 어느새 거기에 앉아서 우리를 꼿꼿이 바라보았다.」
상황은 점점 안 좋아졌다. 먹을 것이 부족해 굶주리는 날들이 늘어갔다. 그러나 야위어 가는 가족들과는 반대로, 고양이는 어느새 살이 오르고 있었다. 소년은 고양이를 죽이자고 제안하지만, 묵살된다. 어머니와 동생들은 펄쩍 뛰며 소년을 비난한다. 그리고 다시 궁핍의 날들이 흘러갔다. 마침내 먹을 것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된 어느 날, 소년은 고양이를 붙잡아 들고 강가로 간다. 추운 날이었다. 그는 자꾸 몸을 밀착시키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한다. 내 동생들은 굶주리는데 네가 살이 찐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나는 그런 모습을 더 이상 가만히 볼 수 없노라고. 그리고 고양이를 강가의 얼음덩이에 여러 차례 내리쳤다. 비명을 지르던 고양이가 피를 뿌리며 숨을 거둘 때까지.
「“무슨 일이 있었니? 너 얼굴이 몹시 창백하구나. 그리고 재킷에 묻은 피는 어떻게 된 거니?”
어머니가 물었다. 나는 말했다.
“코피가 났어요.”
어머니는 나를 바라보지 않고 아궁이로 가서 내게 페퍼민트 차를 끓여주셨다. 갑자기 나는 마음이 언짢아졌고, 그래서 재빨리 뛰쳐나와 침대로 갈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에 어머니가 와서 아주 조용히 말했다.
“엄마는 너를 이해한다. 이제 그 일은 그만 생각해라.”」
「붉은 고양이」는
『생의 한가운데』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 루이제 린저의 자전적 소설이다. 1981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전후(戰後)의 궁핍한 시대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11년 독일 피츨링에서 태어난 루이제 린저는, 2차대전 당시 나치스 가입을 거부하고 히틀러 정권에 저항하다가 투옥된다. 그녀는 이때 사형선고까지 받았지만, 종전이 되면서 극적으로 석방됐다. 이후 그녀는
『옥중기』(1946) 등 여러 작품 활동을 통해 유대인에게 가했던 동족의 만행을 고발한다.
「붉은 고양이」를 읽으면서 문득 ‘평화주의자’ 루이제 린저의 삶을 떠올렸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판단을 내리지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화두를 던지고 있을 뿐이다. 극한상황에서의 정의란 과연 무엇인가.
소설을 읽으면서 떠오른 영화가 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 영화는 그냥 몇 장면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데, 가령 이런 것이다. 맨발에 수염을 지저분하게 기르고 누더기 담요를 걸친 남자 주인공이 발을 질질 끌며 집안을 걸어 다니고 있다. 오랜 굶주림과 은신 생활로 눈은 퀭하고, 비쩍 마른 더러운 얼굴엔 핏기가 하나도 없다. 그는 운 좋게 찾아낸 먼지투성이 깡통 하나를 들고 있다. 간간이 몸을 떨며, 어떻게든 뚜껑을 따보려고 용을 쓰지만 쉽지 않다. 깡통 하나에 집착하는 굶주린 인간의 모습은 한없는 연민 그 자체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근사한 연미복을 차려입고 우아한 연주회장에서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던,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것이다. 전쟁과 그에 따른 생존의 위협은 그를 한없이 추락시켰다. 깡통 하나에 집중하고 있는 피아니스트의 모습은 화려했던 과거와의 간극만큼이나 비참하다. 생존이라는 절대적인 목적 앞에서 예술은 사치가 되었다. 굶주림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얼마나 남루한 것인지, 얼마나 하찮은 것으로 전락할 수 있는지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던 예술가는 깡통에 담긴 음식을 어떻게든 꺼내 먹으려고 부들부들 떤다. 마지막 순간까지 깡통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는다. 무척 슬픈 장면으로 기억하고 있다.
소설
「붉은 고양이」에서 작가는 어린 소년의 행위를 그냥 담담히 보여준다. 사실, 극한의 굶주림을 겪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소년을 비판하기란 쉽지 않다. 누구나 그 상황에서 그럴 수 있다. 아마도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붉은 털을 가진 아름다운 고양이는 사랑을 받으며 가족의 일원으로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소년은 고양이를 죽였지만, 그것은 그의 감정과 배치되는 행위였다. 그런 모습은 작품의 여러 곳에 등장한다. 마지막 순간에도 그는 고양이를 꼭 껴안고 쓰다듬는다. 모든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왔을 때도 소년의 언짢은 마음은 풀리지 않는다. 굶주림이라는 고난이 인간을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만드는지 새삼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은 남는다. 꼭 그래야만 했을까? 결국, 가장 참혹한 순간에 가장 빛나는 것 또한 인간의 도덕성이다. 누구나 그럴 수 있지만, 반드시 누구에게나 자비를 기대할 수 없기에, 그것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나는 페터와 레니가 밤이 깊도록 이불 속에서 크게 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붉은 짐승을 죽인 것이 과연 잘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런 동물은 사실 결코 많은 양을 먹지는 않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