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분리불안 증세가 있던 우리 아이가 올해는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다. 정신과의사 고든 리빙스턴(Gordon Livingston)의 『너무 일찍 나이 들어버린 너무 늦게 깨달아버린(Too soon old too late smart)』(노혜숙 옮김, 리더스북, 2005)을 정독하며 심적 위안, 그 이상의 것을 얻는다.
이 책의 가치는 번역서가 나온 직후, 띄엄띄엄 읽을 적에도 웬만큼 알 수 있었다. 적어도 Q&A식의 관습적인 심리에세이에서 벗어난 미덕을 지녔다. 어떤 증상에 대한 어렴풋한 진단과 설득력 없는 처방이라는 ‘양식’을 답습하지 않았다. 책을 통독하고서야 비로소 이 책의 진가를 깨닫는다.
리빙스턴의 언행불일치를 전제로 한 ‘행동주의’는 저번에 읽은 부분에서 간과한 내용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할 수 있으려면 먼저 그것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어렵지 않게 들리지만,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행동과 생각을 제대로 연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각만 하고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죠.”
여기에는 현대 의학과 광고 산업, 그리고 돈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물질만능주의의 탓이 크다고 한다. 기분을 좋게 해주는 약, 성형수술, 소비를 통한 신분 상승을 부추기는 광고 따위가 행복은 구매가 가능하다는 환상을 심어준다는 거다. 또한 “사람들은 주로 생각, 바람, 의도가 생긴 것을 변화로 착각”한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말을 지나치게 중시하고 있습니다. 나는 종종 사람들에게 그들이 말하고 원하는 것과 실제로 행동하는 게 맞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깜짝 놀라면서 때로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차라리 그들이 보여주는 행동에 관심을 기울이는 편입니다.”
리빙스턴은 생각이나 말만으로는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기에 실제 행동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요인 세 가지로는 일과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기대감을 꼽는다. 그가 내담자에게 던지는, “그 사람을 위해서 대신 총을 맞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유도 질문은 성경 말씀을 떠올린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 15:13) 리빙스턴의 부연 설명이랄까. “대개의 경우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구해내고 싶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단 몇 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먼저 자녀들이 있을 것이고 배우자나 연인을 포함시킬 수도 있을 겁니다.”
독자는 리빙스턴의 슬픈 개인사에 압도되는 것과 동시에 연민의 정을 느낀다. 그는 1년 남짓한 기간에 아들 둘을 잃었다. 더구나 큰아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우울증이 있던 젊은 여자가 병원에 입원하기로 한 날 자살하자 그는 그의 오만함을 자각한다. “절망한 사람의 생명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환상이 그날로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또 그는 내담자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문서에 서명하길 요구한다. “나는 불평불만, 소송, 양육권 분쟁, 불구자 판결, 또는 근무 태만에 대한 변명과 업무 조건의 변화 등을 요구하는 법적이거나 행정적인 절차에 관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위의 이유 중 어느 한 가지로 의료적인 변화를 요구하면, 다른 사람을 찾아보십시오. 나는 오로지 치료만 제공합니다.”
심지어 진료과정의 민감한 사안을 발설하는 것에도 주저함이 없다.
“누군가 나에게 처음 상담을 받으러 오면, 나는 그 사람이 마음에 드는지, 또는 마음에 들게 될 것인지 나 자신에게 묻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게 몹시 지루하거나 화가 난다면, 나는 정중하게 다른 의사를 찾아가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합니다. 내담자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상담을 제대로 진행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상담을 진행하는 중에도 내담자를 위해 끌어올리고 있는 내 안의 에너지와 희망이 줄어들면서 그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면 차라리 상담을 중단합니다. 그 밖에도 내 부모나 나를 괴롭혔던 어떤 사람, 혹은 사춘기에 실연의 상처를 주었던 한 소녀를 생생하게 떠오르게 만드는 내담자와의 상담도 피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든 리빙스턴은 무능하고 괜스레 까다로우며 환자를 골라 받는 나쁜 의사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는 보기 드물게 양심적인, 믿을 만한 의사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변화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사람과 계속 상담하는 것은 피차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감정이입을 중요시하는 것은 정신과 진료의 특성일 수 있다. 이런 점은 책 읽기도 다르지 않다.
“나는 심리치료를 하면서 직접적인 조언은 많이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겸손해서도 아니고, 내담자가 스스로 해결책을 생각해내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 나도 사람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대신 나는 내담자들과 함께 앉아서 그들이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내가 하는 일은 그들 스스로 문제점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보다 용한 의사가 있을까? 또한 용기나 의지 같은 것은 심리치료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조건이라고 한다. 그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주도권은 무심한 사람이 쥐고 있다는 혜안을 보여준다. “세상에 실망할 수는 있지만 심각하게 살 필요는 없다”는 요즘 우리에게 딱 맞는 조언이다.
“지금 이 땅에는 부정한 목사, 사기꾼 정치가, 마약에 빠진 도덕군자, 어린이의 성을 착취하는 교육자 등이 버젓이 얼굴을 들고 훌륭한 사람인 양 행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덮기 위해 남들은 물론이고 스스로에게도 가당찮은 변명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상황은 나아질 리가 없습니다. 점점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때 가장 나쁜 것은 자기 자신을 속인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말대로, 인생엔 절대적 가치가 없듯이 절대적 장점이란 것도 없다. 또한 누구도 완벽할 순 없기에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는다. 이건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다고 리빙스턴을 향해 각을 세울 이유도 없다. 나는 단지 그가 말한 것 가운데 두 가지에 대해 공감도가 덜할 따름이다.
“우리는 실제로 우리의 안녕을 위협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은 옳다. 하지만 미국에서 해마다 총기 사고로 죽는 어린이 5,000여 명과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는 어린이 3,400여 명 못지않게 사라지는 어린이들도 소중하다.
“낯선 사람에게 유괴를 당하는 아이들은 해마다 200명이
채 되지 않는 것이 현실”(강조-인용자)이라는 표현은 부적절하다. 하물며 극악무도한 범죄자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어린이가 단 한 명이라도 있어선 안 된다.
리빙스턴이 내담자에게 들려주는 ‘세상에서 가장 웃기는 이야기’는 하나도 안 우습다. 그의 경험담은 그래도 좀 낫다. “내 아내도 그런 적이 있습니다. 신용카드를 도둑맞았죠. 하지만 나는 신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도둑이 아내보다 돈을 덜 쓰거든요.” 정작 리빙스턴의 아내는 남편의 농담에 안 웃는다.
나는 “행복 추구와 자존심을 위한 투쟁보다 더 강력한 욕망은 없다는 사실”에 공감한다. 리빙스턴이 전하는 노련한 중사의 발언은 인상적이다. “만일 지도가 지형과 다르다면 지도가 잘못된 겁니다.” ‘추천의 글’ 한 대목은 매우 적절하다. “이 책은 모든 독자들을 내가 그동안 운 좋게 차지하고 있던 전망 좋은 창가에 앉게 해줄 것입니다.”
『너무 일찍 나이 들어버린 너무 늦게 깨달아버린 2(And never stop dancing)』(노혜숙 옮김, 리더스북, 2006)에선 ‘값싼 슬픔’이 정곡을 찌른다. 값싼 슬픔은 알량한 동정심 같은 거다. “사별을 둘러싸고 내가 ‘값싼 슬픔’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신화가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자식을 잃은 슬픔을 겪은 사람들은 비행기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존 F. 케네디 주니어의 죽음에 대한 가족들의 슬픔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했던 그의 숙부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그 젊은이의 죽음에 대한 국민의 집단적인 감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리빙스턴은 유명인사들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라면서도 “다만 사람들은 그들의 이미지와 그들이 하는 일을 통해 그들을 알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안전한 슬픔’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지만 며칠 후 또는 길어야 몇 주일 후에는 훌훌 털어버리고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서 진정으로 소중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가슴 찢어지는 고통을 겪어본 사람들에게 유명인사의 죽음을 슬퍼하는 대중들의 모습은 공허해 보이기만 합니다.”
인터넷 유족 게시판에는 인생에서 최악의 순간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설픈 위로를 받고 화가 나서 쓴 글들이 곧잘 올라온다고 한다. 다음은 리빙스턴이 옮겨 적은 그들을 화나게 하는 어설프고 상투적인 위로문 목록이다. 유족들이 상투적이고 어설픈 위로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보라!
“■ 그는 더 좋은 세상으로 갔다. → 하지만 나는 그곳에서 그와 함께 있을 수 없다.
■ 당신이 어떤 기분인지 알고 있다. → 당신이 아이를 잃어본 적이 있는가?
■ 아픈 만큼 강해진다. → 전혀 강해진 느낌이 들지 않는다.
■ 신은 우리가 견디지 못할 시련은 주지 않는다. → 말하기는 쉽다.
■ 당신은 아주 강하다. 나라면 못 견딜 것이다. → 그럼 다른 선택이 있는가?
■ 다시 임신을 할 수 있다. → 아이가 무슨 일회용인가?”
리빙스턴의 말이다. “화해할 수 없는 운명에 맞서 싸우며 스스로 삶의 목적을 찾아내야만 했던 뼈아픈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절망감으로 무너져 내린 사람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희망을 이야기할 수는 있으되 그 안에 어떤 절실함이 없을 것이고, 그래서 아무런 위안도 되어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 어찌 해야 하나? “판에 박힌 말을 늘어놓는 위로는 상대에게 오히려 피곤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상대의 아픔과 고통을 진정으로 헤아릴 수 없다면 그저 옆에서 함께 있어주면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차라리 나은 방법입니다. 섣부르게 자신은 모든 고통을 이해한다는 식으로 상대에게 몇 마디 던지는 것은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체면치레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