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떤 연극이 재밌어요? 연극은 잘 안 보니까 모르겠어요.” 주위에서 자주 듣는 질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재미있는 연극보다는 깊이 있는 작품을 좋아한다. 다소 어렵고 지루하더라도, 명확하지는 않지만 마음속에 무언가를 심어주는 연극. 다른 무대예술은 몰라도 연극만큼은 생각의 깊이를 키워주기 바라는 이기적인 바람이랄까? 하지만 누군가 이렇게 물어올 때는 가장 보편적이면서 확실한 작품을 추천한다. “라이어 보세요!”라고. 왜냐면 <라이어>를 보고 재미없다고 한 사람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1999년 초연 이후 100만 명 이상을 공연장으로 끌어 모은 연극 <라이어>의 힘일 것이다.
요즘 대학로 연극계를 주름잡고 있는 반전 코미디극. 그 선봉에는 이렇게 연극 <라이어> 시리즈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라이어>를 본 관객들은 이제 극작가인 레이 쿠니의 작품에 탐닉하게 된다. 소극장 무대에서 끊임없이 관객들의 배꼽을 앗아가고 있는 레이 쿠니의 작품들, <라이어> <달링> <룸 넘버 13>의 웃음코드를 살펴본다.
연극 <라이어>
차로 5분 거리인 두 동네에 각각의 아내를 두고 두 집 살림을 하는 택시 운전기사 존 스미스. 정확한 스케줄에 따라 별 탈 없이 두 집을 오가던 그의 이중생활은 가벼운 강도사건에 개입되면서 베일이 벗겨진다. 강도에게 머리를 맞은 그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두 아내가 각각의 관할 경찰서에 실종신고를 한 것이다.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면서 스미스와 그의 비밀을 알고 있는 친구 스탠리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또다시 마주치는 상황과 새로운 사람들에 의해 거짓말은 폭포수처럼 번지고,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꼬여간다. 도저히 말이나 글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연극 <달링>
| 연극 <달링> 주인공 톰과 그를 둘러싼 여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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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 숍을 운영하는 톰은 부인이 여행간 사이 섹시한 스트립걸에게 최고급 모피코트를 선물하고 하룻밤을 같이 보낼 생각에 부풀어 있다. 비싼 모피를 선물하면 조직폭력배인 그녀의 남편이 의심할까 봐, 싼 값에 남편이 직접 모피를 사줄 수 있도록 숍의 디자이너인 친구 제리에게 값을 거의 치렀다. 그러나 조폭은 아내가 아닌 애인을 데려와 모피를 선물한다. 더 큰 일은 그 사이 모피를 못 입게 된 스트립걸이 홧김에 직업정신을 발휘해 옷을 홀라당 벗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여행 갔던 톰의 부인과 조직폭력배 애인의 남편까지 숍을 찾으면서 각 커플의 이중생활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 퍼레이드는 역시나 화려하게 펼쳐진다.
연극 <룸 넘버 13>
| 연극 <룸 넘버 13>의 배우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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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국회의원 리처드와 야당 총재의 비서인 제인이 호텔 13호실에서 밀회를 즐기려던 찰나, 발코니 창틀에서 시체가 발견된다. 경찰에 신고하자니 스캔들이 퍼질까 두려워, 리처드는 시체를 옷장에 숨기고 자신의 비서인 조지를 불러 모든 일을 무마하려 한다. 그러나 창틀에 사람이 달려있다는 제보를 들은 호텔 지배인이 찾아오고, 팁을 좋아하는 얄밉고 눈치 빠른 웨이터가 수시로 13호실을 방문하는 통에 시체를 도통 밖으로 옮길 수가 없다. 게다가 제인의 남편과 리처드의 부인까지 호텔을 찾으면서 밀회의 장소였던 13호실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거짓말이 만발하는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레이 쿠니 작품의 대 원칙
레이 쿠니 작품의 기본 포맷은 같다. 대전제는 ‘거짓은 또 다른 거짓을 낳는다’는 것. 남녀의 이중생활로 시작한 거짓말은 극이 진행되면서 주변인물들이 등장하고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이 덧씌워지면서 겉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커진다. 이렇게 다각도에서 공격해 들어가는 진실게임에 치밀하게 돌려 막는 거짓말 퍼레이드가 레이 쿠니 작품의 백미다.
특히 극이 중반을 넘어가면 몇 줄기의 거짓말들이 충돌하면서 열심히 쫒아가던 관객들도 포기할 지경에 이른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에 또 다른 거짓말로 응수하면서 동일 인물이 한 번에 3~4가지 다른 인물과 수십 가지 다른 상황에 놓이는가 하면, 덕분에 등장인물들의 촌수도 찬란하게 얽히게 된다. 레이 쿠니는 아마도 커다란 칠판에 인물도를 그려놓고 작품을 써 나가지 않을까. 그 복잡한 회로 속에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레이 쿠니 작품의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희생양’이 있다는 것이다. 문제를 일으키는 주인공과 그 사건의 모든 진실과 비밀을 알고 있는 측근. <라이어>에서는 친구 스탠리, <달링>에서는 디자이너 제리, <룸 넘버 13>에서는 비서 조지가 바로 희생양이다. 이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이 사건에 말려들며 주인공을 돕기 위해 가장 분주히, 그리고 처절하게 뛰어다닌다. 애처롭지만 관객들에게 가장 큰 웃음을 주는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레이 쿠니 작품, 보고 또 봐도 웃기는 이유는
레이 쿠니의 작품을 한 번이라도 본 관객이라면 극이 어떻게 진행될지 큰 틀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도 또 보고, 또 웃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 씨는
『소통의 기술』에서 ‘웃찾사’나 ‘개그콘서트’를 몇 주 보면 웃음을 터뜨려야 할 결정적 대사로 치달을 때 관객들이 그 시점을 정확히 알아차리고 똑같이 반응한다고 했다. 그것이 ‘공명’의 원리라고. 레이 쿠니의 작품을 접하는 관객들 또한 그와 함께 복잡한 거짓말의 회로를 돌아다니며 함께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극장에 가면 웃음소리는 물론 다음 상황을 짐작하거나 거짓말을 함께 만드는 관객들의 추임새를 쉽게 들을 수 있다.
여기에 배우들의 열연이 웃음을 증폭한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대사와 거짓말을 무마하기 위한 능청스러운 연기. 덕분에 연극이 진행되는 100분 동안 배우들의 얼굴은 시뻘게지고 옷은 땀으로 흥건하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그러나 몸을 아끼지 않는 그 열연에 관객들은 또 다시 극장을 찾는 것이다. 역으로 이렇게 치밀한 작품일수록 배우들의 연기가 다소 미진하거나 호흡이 맞지 않을 경우 그 균열은 크다. 덕분에 필자도 세 작품 가운데 하나는 큰 재미를 못 느꼈다.
포복절도할 거짓말 퍼레이드와 그 치밀한 회로를 노련하게 달려갈 배우들, 그리고 떨어진 배꼽을 꽂아가며 웃을 준비가 돼 있는 관객. 이렇게 삼박자가 들어맞는다면 레이 쿠니 작품이 만들어내는 웃음바다는 앞으로도 더 넓고 크게 퍼지지 않을까 한다. 아직도 안 봤는가?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레이 쿠니의 작품을 감상하시라. 웃다가 기절할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