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엉뚱한 사람과 결혼하거나, 중년이 되도록 보람 없는 일만 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삶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고 나서야 비로소 건축은 우리에게 눈에 띄는 영향을 주기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누가 어떤 건물에 “감동을 받았다”고 말할 때, 그 말에서는 그 구조물에 기록된 고귀한 특질과 그 주변에 있는 더 슬프고 더 넓은 현실 ―이제 우리는 그런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사이의 달콤 쌉쌀한 대조의 느낌이 우러난다. 아름다움을 볼 때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것이 암시하는 행복이 예외적인 것임을 알기에 목에서 덩어리가 치밀어 오른다. (본문 중에서)
그는 늘 이런 식이다. 아름다움을 이해하려면 먼저 약간은 좀 슬퍼야 한다고 말한다. 기쁨 뒤에 찾아오는 상실감과 공허감을 담담하게 폭로하기도 한다. 그래서인가보다. 알랭 드 보통의 글을 읽다 보면 왠지 위안이 된다. 살면서 문득 의아하게 생각되는 모순적인 행동들, 혹은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에 대해 ‘원래 다 그래.’라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심상한 말투로. 이 책도 예외가 아니다. 건축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읽다 보면 자꾸 다른 얘기를 한다. 그는 건축물을 보다가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 한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름다움과 슬픔에 대하여, 스타일과 취향에 대하여, 기억과 흔적의 불일치에 대하여, 기대감과 배신에 대하여,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삶의 모순성에 대하여. 무엇보다도 어떤 공간과 마주했을 때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를 사로잡았다.
작가는 어느 비 오는 날 우연히 들어갔던 ‘맥도날드’에서의 경험을 예로 든다. ‘강렬한 조명, 이따금씩 냉동 프라이가 기름통에 가라앉는 소리, 카운터 직원들의 다급한 행동’들이 불안감을 조성하는 가운데, 이 공간에서 생긴 불편함을 해소하는 유일한 해결책은 계속 먹는 것뿐이다. 맥도날드에서 나온 그는 근처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성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바깥 세계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경외와 정적만이 자리 잡은 그 공간에서, 그는 엄청난 이질감을 경험한다. 그리고 한계와 무한, 무력감과 숭고함 등을 떠올린다. 급기야 10분 정도가 지나자, 그는 ‘천사가 당장이라도 런던 위에 겹겹이 쌓인 적운을 뚫고 내려와 회중석의 창으로 들어오면서 황금 나팔을 불며 곧 다가올 천상의 사건에 관하여 라틴어로 고지를 한다고 해도’ 전혀 놀라지 않을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불과 40미터 떨어진 곳, 십대들의 무리와 튀김 기름통 사이에서 들었다면 무시해 버렸을 법한 관념들이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 당위성을 얻게 된 것이다. 단지 건축 작품 하나 때문에. 건축과 공간을 바라보는 이런 식의 시선은, 정말 ‘알랭 드 보통답다.’
도로변의 식당이나 심야 카페테리아, 호텔의 로비나 역의 카페 같은 곳에 가면 쓸쓸한 공공장소에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이 희석되기도 하고, 그 덕에 독특한 공동체 의식을 다시 발견할 수도 있다. 가정적인 분위기의 결여, 환한 불빛, 특징 없는 가구가 외려 가정의 거짓 위안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도 있다. 익숙한 벽지와 액자에 걸린 사진들―위안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린 실내장식들―이 있는 집의 거실보다는 이곳이 슬픔에 마음을 여는 데 더 편할 수도 있다. (알랭 드 보통, 「슬픔이 주는 기쁨」 중에서)
| <자동 판매식 식당(Automat)>, 1927,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1882~19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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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시각. 여자가 혼자 커피를 마시며 앉아 있다. 여자의 모자와 외투로 보건대 밖은 춥다. 여자가 있는 실내 공간은 크고, 불이 환하고, 텅 비어 있는 것 같다. 장식은 기능적이다. 돌을 덮은 탁자, 튼튼하게 만든 검은 나무 의자, 하얀 벽. 여자는 사람을 꺼리는 듯하고 약간 겁을 내는 것 같다. 공공장소에 혼자 앉아 있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분명하다. 알랭 드 보통이 에드워드 호퍼의 <자동 판매식 식당(Automat)>(1927)를 묘사한 대목이다. 그림을 보지 않았는데도, 벌써 이미지가 떠오른다. 공간이 주는 느낌은 왠지 좀 쓸쓸하다. 이 여자처럼 생각에 잠겨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혼자 커피를 마시는 남자와 여자. 보통은 이것을 ‘공동의 고립’이라고 부르면서, 혼자인 사람이 혼자임으로 해서 느끼는 압박감을 덜어주는 유익한 효과가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어느 날 저녁 런던과 맨체스터를 잇는 고속도로 휴게실에서의 경험을 떠올린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아름다운 건물은 아니었다. 조명은 용서가 없어 창백함과 더러움이 사정없이 드러났다. 의자나 좌석들은 유치한 밝은 색으로 칠해놓아 거짓 미소처럼 긴장된 쾌활함이 느껴졌다. 휴게소 안의 누구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호기심이나 동료의식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멍한 표정으로 서로를 지나쳐 음식이 나오는 카운터나 밖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중략) 나는 외로웠지만, 이 경우는 부드러운, 심지어 유쾌한 외로움이었다. 이 외로움은 웃음소리와 다정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다가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랬다면 나는 내 기분과 환경 사이의 대조 때문에 괴로웠을 것이다. (알랭 드 보통, 「슬픔이 주는 기쁨」 중에서)
혼자서 낯선 곳을 여행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묘사라고 생각한다. 기대감, 불안감, 고독, 흥분, 왠지 모를 슬픔과 쓸쓸함, 두려움, 이유 없이 와락 밀려드는 감동 등등이 마구 뒤섞인 묘한 감정. 그 시각, 그 공간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바로 그 미묘한 감정 말이다. 나는 이 글을 작년 1월 런던동물원 안에 위치한 간이식당 창가 자리에 앉아서 읽었다. 생각해 보면, ‘알랭 드 보통’적인 사고를 하기에 아주 적절한 장소였던 것 같다. 한겨울, 단 1주일 동안의 외국 여행길에, 동물원에, 그것도 혼자서 가 본 적이 있는가? 아마 흔한 경험은 아닐 것이다. 교통도 불편한 데다, 다른 유명한 관광지에 밀려 안내책자에 잘 소개되지도 않은 그곳을, 무려 2시간이나 헤매서 찾아갔다. 특별한 동기는 없었다. 여행길에 챙겨간 알랭 드 보통의 책(
『동물원에 가기』)을 읽다가,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였다.
비수기인 데다 살인적인 추위로, 그 넓은 동물원에 관람객은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코끼리도 보고, 기린과 호랑이, 얼룩말 등 동물원에 가면 응당 봐줘야할 것 같은 동물들을 순례했다. 몸을 한껏 움츠린 채 모든 의욕을 상실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동물들과 마주 서서 한동안 응시를 하고 있자니, 동물원과는 전혀 상관없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스윽-슥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심지어 책상에 굴러다니고 있을 영수증 따위의 사소한 것들까지 떠올랐다. 그러다가 문득 고독이 몰려왔다. 주변의 낯선 환경과 차가운 바람과 황량함에 몸서리가 쳐졌다. 그것은 그 순간, 그 공간이 불러일으킨 아주 특별한 감정이었다. 약 1시간에 걸쳐 동물원을 한 바퀴 돌아본 뒤, 입구 쪽에 위치한 간이식당에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알랭 드 보통의 글을 읽었다. 그때의 감정은, 뭐랄까, 공감 그 이상의 것이었다.
어떤 건물에 대한 이미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공간이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가 하는 점이다. 가끔은 낯선 장소, 특별한 공간을 찾아가 볼 일이다.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좋다. 늘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공간을 가만히 응시해 보는 건 어떨까. 어떤 것이든 ‘알랭 드 보통’적인 감수성과 상상력이 요구된다. 차분히 대상을 관찰하면서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감정을 따라가 보자. 이렇게 특별한 응시하기를 통해서라면,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그동안 잊고 지냈거나 미처 깨닫지 못했던 감정들과 조우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알랭 드 보통은 슬프거나 따분할 때면 히드로 공항에 놀러간다고 한다. 비행기를 타러 가는 것이 아니라 ‘감상하러’ 간다. 공항은 그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이다. 도쿄, 암스테르담, 이스탄불, 바르샤바, 시애틀, 파리… 터미널 천장에 매달린 모니터에 쉴 새 없이 뜨는 안내문들은 그를 들뜨게 만든다.
그냥 복도를 따라 내려가 비행기를 올라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우리는 몇 시간 뒤에 우리에게 아무런 기억이 없는 장소, 아무도 우리 이름을 모르는 장소에 착륙할 것이다. 오후 세 시. 권태와 절망이 위협적으로 몰려오는 시간. 감정에 깊은 크레바스들이 파여 있을 때, 늘 어딘가로 이륙하는 비행기가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알랭 드 보통, 「공항에 가기」 중에서)
그는 공항에서 새로운 기운을 북돋고 돌아온다. 약간의 상상력과 마음의 준비만 되어 있다면, 굳어가는 뇌와 말라가던 감수성을 촉촉하게 만드는 것은 시간문제다. 다른 시선으로 보면, 칙칙한 일상의 공간도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출퇴근길에 지나치던 평범한 건물이 어느 날 갑자기 말을 걸어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냥 좀 슬프거나 감상에 젖게 될지도 모른다. 어쨌든 모두가 그 공간이 선물한 소중한 감정들이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우리가 아름다운 것들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우리 인생이 여러 가지 문제로 가장 심각할 때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낙담한 순간들은 건축과 예술로 통하는 입구를 활짝 열어준다. 그러한 때에 그 이상적인 특질들에 대한 굶주림이 최고조에 이르기 때문이다. 정신이 잘 정돈되어 너저분한 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 콘크리트와 나무로 이루어진 널찍하고 텅 빈 공간에 햇빛이 환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일이 모두 정돈이 잘 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이 로버트 애덤 홈 하우스의 천장 밑에서 살고 싶은 갈망을 느끼지는 ―심지어 그것을 보고 눈물까지 흘리지는― 않을 것이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