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나인>은 지난해 연말부터 화제가 됐던 작품이다. <나인>은 이탈리아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의 자전적 영화 <8과 1/2>을 무대화한 작품으로, 지난 2003년 브로드웨이에서는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열연해 그해 최우수 리바이벌 공연상 등을 수상하며 극찬을 받았다. 그러나 이렇게 탄탄한 작품이 국내 초연을 앞두고 주목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작품 자체에 대한 기대보다는 역시 ‘배우 황정민’ 효과였을 것이다. 영화 <너는 내 운명> <사생결단> <행복> 등으로 어느덧 ‘연기파 배우’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그가 4년 만에 서는 무대. 게다가 뮤지컬 <나인>에 참여하는 남자는 귀도 역의 황정민 단 한 명(9살 귀도로 아역이 등장한다). 나머지는 모두 그를 둘러싼 여자들뿐이다.
뮤지컬 <나인>, 한 남자 그리고 열다섯 명의 여자
귀도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영화감독으로, 아파트 층수마다 애인을 둔 남자다. 막이 열리면 무대에 선 귀도를 향해 그의 엄마에서 정부, 제작자, 배우 등 14명의 여자가 재잘대며 다가온다. 그리고 무대 한 편에 나머지 1명의 여자, 그의 아내 루이사가 이를 지켜보고 서 있다. 귀도는 낼 모레면 마흔이지만 아직도 아홉 살 자신의 모습을 떨쳐내지 못하는 남자다. 게다가 15명의 여자들이 그의 상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주위를 맴도는 통에 큰 혼란에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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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도 정부도 필요해 | |
재촉하는 차기작이 그려지지 않아 고민하던 귀도는 아내 루이사와 베니스에 있는 스파로 휴양을 떠난다. 그러나 귀도에게는 여자를 끌어당기는 보이지 않는 능력이 있는 것일까? 나머지 14명의 여자도 보란 듯이 스파에 몰려들고, 귀도는 현장에서 모두를 출연시켜 자신의 이야기 ‘카사노바’를 주제로 영화를 찍는다. 그리고 영화를 통해 그가 한 여자에게 머물 수 없음을, 사랑하는 아내 루이사도, 열정을 불태우게 하는 정부 칼라도, 영혼을 치유하는 클라우디아도 모두 필요함을 고백하게 된다. 결국 영화에 참여했던 그의 그녀들도 귀도에게 있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하나 둘, 떠나간다. 혼자 남은 귀도는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겨누는데….
뮤지컬 <나인>, 돋보이는 무대예술 그러나 아쉬운 관능미<나인>은 지난 칼럼에서 말한 재밌고 즐거운, 흔히 요즘 사람들이 좋아할 뮤지컬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뮤지컬이 흥행 위주로 코미디만을 추구한다면 역시 될 말은 아니다. 따라서 대형 기획사에서 작품성 있는 뮤지컬을 선정해 스타배우와 뮤지컬다운 볼거리와 들을 거리까지 제공하는 모습은 바람직한 시도일 것이다. 뮤지컬 <나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공들인 무대연출이다. 중앙에 자리 잡은 대리석 계단과 가장자리를 둘러싼 철제 계단, 정면으로 보이는 벽화와 그 벽화를 타고 내리는 물 등은 연출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몽환적 모더니즘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랜만에 접하는 잘 갖춰 입은 무대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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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의상 돋보여 | |
또 10여 명의 여배우들이 바꿔 입는 현란한 의상이나 귀도의 정부 칼라가 커튼을 타고 천장에서 오르내리는 장면 등도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전체적인 음악도 뛰어났는데, 루이사 역의 김선영, 칼라 역의 정선아, 클라우디아 역의 양소민, 제작자 역의 문희경 모두 내로라할 뮤지컬 배우들인 만큼 폭발할 듯 정제된 그녀들의 가창력도 무대를 압도했다.
무대 연출이나 배우들의 역량은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도 어쩐지 아쉬운 이 느낌은 무엇일까? 일단 뮤지컬 <나인>이 표현하고자 했던 ‘몽환적인 분위기’라는 것이 우리 정서에 친숙하지 않아서일까? 게다가 우리가 보아왔던, 그래서 머릿속에 각인된 관능적이고 섹슈얼한 이미지라는 것이 모두 서양의 그것들이라서일까? 무대가 그리고 배우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겠는데, 그 요염하고 관능적인 몸짓이, 몽환적이고 흐릿한 분위기가 머리로 인식될 뿐 피부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극에 집중할 수 없는 안타까움. 섹슈얼한 이미지를 표현하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느끼는 아쉬움이다.
뮤지컬 <나인>, 황정민에 대한 기대와 안타까움앞서 밝혔듯 뮤지컬 <나인>을 보러 온 관객들은 작품 자체보다는 뮤지컬 무대에 서는 배우 황정민에 대한 기대가 컸을 것이다. 황정민의 연기는 물론 돋보였다. 흔히 ‘예술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그 복잡다난한 내면연기를 황정민 특유의 안절부절, 구수하면서 비열한, 우왕좌왕하지만 섬세한 연기로 드러냈다. 또 영화의 각 장면을 떠올리는 장면이나 추기경을 만나 1인 2역을 펼치는 장면에서는 밋밋한 작품에 웃음까지 퍼지게 했다. 마지막 무대 인사에서누구보다 뜨거운 박수를 받았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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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에 둘러싸인 귀도 역의 황정민 | |
그러나 스크린과 달리 카메라가 잡아주지 않는 그의 섬세함은 무대에서 제 빛을 발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전문 뮤지컬 배우가 아니기에 미흡했던 무대 장악력(비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으로 데뷔해 <캣츠>나 <브로드웨이 42번가> 등에 참여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기대 이상이었으나 불안했던 가창력, 발음이나 몸짓의 얕은 울림은 ‘뮤지컬 무대에서도 역시 황정민’이라는 찬사까지는 아끼게 만들었다. 아마도 스크린이었다면 그의 섬세한 표정과 치밀한 몸짓을 읽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 황정민이 뮤지컬 무대에서도 그 진가를 발휘하자면 해결해야 할 숙제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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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란한 춤솜씨 선보인 황정민 | |
황정민은 1월 31일, 영화 <슈퍼맨이었던 사나이>로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낸다. 또 10월쯤에는 ‘연극열전 2’ 시리즈의 <웃음의 대학>이라는 작품으로 연극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연극 무대에서 만날 황정민에 큰 기대를 품고 있다. 결국 ‘황정민’이 나온다기에 보고 싶었던 뮤지컬 <나인>에 대한 소소한 실망을 감출 수 없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