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장르를 망라해 공연이라 불리는 무대예술들이 그 안에 담고 있는 것은 결국은 하나이면서 또한 천차만별 다른 모습이 아닐까 한다. 그것은 시각적인 또는 청각적인, 공감각적인 아름다움일 수도 있고, 사랑이나 이별, 가족애와 같은 온갖 감정에 대한 공감이나 아픔에 대한 위로일 수 있으며, 사람과 사회를 꼬집는 풍자일 수도 있고, 예술로서의 구조적 또는 기술적 완벽함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관객들이 무대를 향해 염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두말없이 ‘웃음’이다. 특히, 공연시장에서 주도적으로 지갑을 여는 20~30대 관객층에게 가장 구미가 당기는 요소는 무엇보다 ‘재미’인 것이다. 대학로 소극장을 중심으로 롱런하며 연일 장사진을 치르는 연극이나 뮤지컬의 장르가 ‘코믹’ ‘코믹 추리’ ‘로맨틱 코미디’인 것은 이에 대한 방증이다. 물론 대형 스타를 앞세운 공연의 경우 장르를 불문하고 삽시간에 티켓이 매진되는 기록을 세우기도 하지만, 그 스타가 사라질 경우 무대 생명력 또한 길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역시 대세는 ‘재밌는 공연’이다.
하지만 공연을 만드는 사람들도 나름의 욕심이라는 것이 있고 기획 의도라는 게 있을 텐데, 허구한 날 코미디물만 만들 수는 없을 것 아닌가. 그렇다면 작품성을 유지하면서 관객들을 향한 웃음 코드는 활짝 열어두는 비결은 무엇일까? 필자는 이른바 ‘멀티 맨’에서 해답을 찾았다. 잘 살펴보자. 요즘 잘 나가는 공연에는 주연보다 주목받는 조연이 있을 테니 말이다.
주로 ‘멀티 맨’으로 불리는 이들은 대부분 사실 그다지 얼굴이나 이름이 알려진 배우들은 아니다. 또한 스토리 전개상 필요한 모든 인물을 각기 다른 배우들에게 맡길 수 없는, 제반적으로 제약이 따르는 소극장 공연에서 그들은 불가결한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들은 적게는 3~4가지 역할에서 많게는 20가지 배역을 소화해내며 종횡무진 무대를 오르내린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행보는 주연 배우들보다 더 눈에 띈다. 할머니에서 느끼한 여자로, 엄한 아버지에서 치한으로, 멋진 선배에서 덜 떨어진 친구로, 가끔은 한 무대에서 몸을 반반으로 나누거나 목소리만 달리해 두 역할을 연기하기도 한다. 웃기려고 했던 게 아닌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서 부지런히 연기를 했을 뿐인데, 자연스레 객석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이내 관객들의 웃음보까지 장악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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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기의 능청스러운 연기 - <벽을 뚫는 남자> | |
멀티 맨의 활약이 유독 돋보이는 몇몇 작품을 살펴보자. 먼저 대학로 대표 로맨틱 코미디 뮤지컬로 자리 잡으며 오픈 런으로 이어지고 있는 <김종욱 찾기>. 오만석, 엄기준, 신성록 등에 이어 김무열, 김재범 등 신세대 꽃미남 배우들이 김종욱으로 등장하고 있지만, 사실 무대의 꽃은 멀티 맨 임기홍과 진선규 씨다. 남녀 주인공 외에 나머지 18역을 홀로 연기하는 이들은 고도의 순발력과 재치, 핵심을 정확하게 짚는 과감한 변신으로 모든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이 무대에서 만은 내로라할 꽃미남 배우들의 인기도 멀티 맨의 그것 앞에서는 초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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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욱 찾기>의 1인 18역 인기만점 멀티 맨들 | |
발랄한 상상과 사랑스러운 음악으로 언론의 극찬을 받고 있는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에도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이 있으니, 바로 베테랑 배우 김성기 씨다. 그는 이번 무대에서 알코올중독 정신과의사와 천연덕스럽게 뇌물을 받는 게으른 경찰, 고령의 나이에 처음으로 변호를 맡은 변호사 역을 함께 연기했는데, 각 배역을 수식하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마다 엉뚱하면서도 독특한 역들이다. 때문에 한없이 능청스럽고 늘어지고 기막히고 사랑스러운 그의 연기는 빛을 발할 수밖에 없다. 극본이나 음악은 물론 남경주, 고영빈, 해이 등 내로라할 뮤지컬 배우들의 등장으로 인정받고 있는 뮤지컬이지만, 전개 자체가 밋밋하고 모든 대사가 노래만으로 진행되는 <벽을 뚫는 남자>는 보는 사람에 따라 지루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단 한 사람, 김성기 씨의 멀티 연기는 같은 밋밋함과 지루함 속에서도 홀로 반짝반짝 대박 웃음을 터트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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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화장을 고치고>의 웃음 메이커 | |
가수 왁스가 뮤지컬에 처음 도전한 <화장을 고치고>에도 멀티 맨과 멀티 걸들이 등장한다. 왁스의 노래를 토대로 만들어진 뮤지컬, 그래서 왁스의 노래를 소극장에서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특별함 없이 그저 가볍게 웃으며 볼 수 있는 뮤지컬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있으니, 바로 독특한 멀티 맨 오대환이다. 여자 플로리스트에서 코러스, 웨이터, 점쟁이 등으로 모습을 바꿔가며 풍성한 몸매를 날렵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저 배우 누구야?’라는 궁금증과 함께 공연장을 나설 때쯤에는 열렬한 팬이 되고 만다.
라디오 드라마에서 베스트셀러까지, 수많은 남녀의 공감을 얻었던 이미나 작가의 <그 남자 그 여자>도 연극무대에서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너무 뻔한 사랑 얘기라서 조금은 유치하게 느껴지는 이 작품에 매력 포인트는 단연 ‘그네들 역’에 있다. 대학생과 직장인 커플을 제외하고 극을 이어가는 데 필요한 10인 이상의 배역을 모두 연기하는 단 한 명의 배우. 욕쟁이 할머니에서 느끼한 선배, 발랄한 점원에서 거들먹거리는 상사까지 어찌나 재빠르고 민첩하게, 그러면서도 배역마다 개성을 잘 살려 연기하는지 객석에서는 소극장이 떠나가라 웃음꽃이 터진다.
이른바 ‘멀티 맨’들은 이렇게 무대의 양념 역할을 넘어 주연보다 당당한 그들만의 자리를 다지고 있다. 대형 스타 배우를 보기 위해 공연장을 찾았던 관객들도 마지막에는 그 스타보다 빛나는 조연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게 된다. 스타를 앞세운 마케팅, 특히 그 스타의 무대 정체성이 다소 약하거나 작품성이 지금의 관객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할 때는 전천후 코믹 멀티 맨들의 존재감은 더욱 크게 느껴진다.
물론 멀티 맨의 기본 무기는 ‘탄탄한 연기력’에 있을 것이다. 단 몇 초 사이에 다른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는 연기 내공, 그러면서도 독특한 캐릭터를 드러낼 수 있는 신속한 분위기 전환과 능청스러운 연기 능력, 기대 가능한 또는 예측불허의 변신술. 아마도 지금 그들이 무대 위에서 펼치는 이처럼 현란한 연기는 무대에 대한 열정과 아픔으로 자신의 껍질을 깨나가야 했던 오랜 기다림의 세월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모두가 인생의 주연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열정과 기다림이 있다면 언젠가는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인생이라는 게 뭉클한 것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