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추상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시간의 지속>에는 시계가 나뭇가지에 빨래처럼 걸려있거나 각진 면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런 곳에선 시간의 흐름 또한 흐물흐물할 것만 같다. 『시간의 놀라운 발견』(유영미 옮김, 2007)에서 학술칼럼니스트 슈테판 클라인(Stefan Klein, 1965- )은 시간의 이모저모를 차분하게 이야기한다.
“이 책은 시간의 숨겨진 비밀을 다루려고 한다. 분이나 시로는 잴 수 없는, 시간과 관련한 모든 현상이 이 책의 주제다. 중요한 것은 ‘시간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어떻게 하면 시간을 더 신중하게 활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시간 감각은 고도의 정신 능력이라고 한다. “신체지각, 의미지각, 기억, 미래계획능력, 감정, 자의식 등 두뇌의 거의 모든 기능이 협력하여 시간을 감지해낸다. 이 메커니즘 중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기능하지 않으면 시간 감각은 일그러져버린다.”
그런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해도 우리의 시간 감각은 속아 넘어가기 쉽다. 우리는 속도가 일정해도 소리가 점점 커지면 속도가 빨라진다고 느낀다.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는 같은 멜로디와 같은 리듬을 되풀이한다. 소리의 크기와 울림이 변할 뿐이다. 연주가 진행될수록 음량은 계속 커진다. 청중은 곡의 템포가 점점 빨라진다고 여긴다.
1초는 원자량 133인 세슘원자가 91억 9263만 1770번 진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말한다. “그러나 내면의 시간을 측정하는 기준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의 시간 경험은 끊임없이 사건과 연결된다. 시간 감각과 관련하여 순수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어떤 사건이 벌어져야 경험할 수 있다.
“시간은 외부의 현상일 뿐 아니라 우리의 의식에서 생겨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시간 경험은 이 두 가지-환경과 두뇌-가 결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슈테판 클라인은 시간의 속성, 정확히는 시각 감각의 특성을 해명하기도 한다.
“즐거운 순간들은 너무 빨리 지나가고, 불쾌한 순간들은 끝날 줄을 모른다.” 어째서 그럴까?
“우리가 시간을 얼마나 긴 것으로 경험하는가는 두뇌가 시간을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달려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만큼 주의를 집중하고 있는가이다.”의식이 어떤 일에 몰두하고 있으면 흘러가는 시간을 과소평가하게 된다. 반면, 시간을 계속 의식할 때는 불과 몇 초도 길게 느껴진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현상은 기억의 기능과 연관 짓는 설명이 설득력을 얻는다.
“기억 속에서 불러올 수 있는 장면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 시기를 더 짧게 느낀다.”따라서 두뇌를 자극하여 시간 감각의 노화를 늦출 수 있다. 머리를 쓰지 않으면 기억력은 40대부터 감퇴하기 시작한다.
“일생동안 두뇌를 사용한 사람은 나이 들어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시간이 질주한다는 느낌이 덜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중년의 세월이 더 느리게 간다.”‘시간의 미스터리에 빠진 사람들을 위한 시간사용설명서’라는 앞표지 문구가 말하듯 이 책의 겉모습은 실용서다. 그런데 속내는 꽤 인문적이다. 우리를 시간의 노예에서 시간의 주인으로 탈바꿈하게 하는 ‘6단계 시간활용법’ 같은 건 이 책의 외양적 장르 정체성을 대변한다. 하나 시간의 정의는 그렇지 않다.
“시간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표현하는 아주 짧은 단어다.”이 책은 흔해빠진 ‘시간관리서’와 구별된다는 저자와 은근한 주장과 번역자의 호의적인 시각에 공감한다. 그래도 엄밀함이 다소 떨어진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시간관리서’에 집어넣기는 부족함이 없다.
소아시아의 철학자는 헤라클리트가 아니라 헤라클레이토스다. 그가 기원전 500년경에 말한 “사람들은 두 번 다시 같은 흐름을 탈 수 없다”는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는 좀 더 친숙한 표현이 있다. 1657년 전례 없이 정확한 추시계로 특허를 받은 천문학자 크리스티안 호이겐스는 덴마크 사람이 아니라 네덜란드 사람이다. 한편, 아인슈타인의 거울사고(思考)실험은 검증이 불가능하다.
“2개의 거울을 정확히 평행이 되게” 맞세울 수 없어서다.
슈테판 클라인은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앞서 펴낸 자신의 책 두 권에 대해 짧은 코멘트를 한다.
“『우연의 법칙』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우연은 기회다. 그러나 우연을 기회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열린 눈으로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 (…) 독재자인 우연은 이제 아주 다른 빛으로 조명 받고 있다. 우연이 없었다면 우리의 이성은 발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연의 법칙』(유영미 옮김, 2006)은
“독자들을 ‘우연’과 친해지게 하고자 한다.” 그러면 우연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다르게 설명할 수 없거나, 다르게 설명하고 싶지 않은 것은 우연한 것이다.” 또한 이성이나 의도를 벗어나는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다. 우연은 복잡성과 자기연관성에서 비롯한다.
수학의 정보이론에선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는 상태를 ‘우연’하다고 한다. 양자이론에서의 우연은 일상의 그것과 다르다. 일상에서는 무지로 인하여 우연을 경험하지만, 더 많은 지식을 가지면 우연을 잘 제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원자의 세계에서 그런 전략은 통하지 않는다.” 우연이 우리의 무지에 근거하는 게 아니라 자연 법칙에 바탕을 두는 까닭이다.
원자의 세계에서는 측정이 입자의 상태를 변화시킨다. 하이젠베르크가 발견한 ‘불확정성 원리’의 골자다.
“장소와 임펄스(=속도), 에너지와 시간이라는 측량 단위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 그리하여 우리가 한 가지를 결정하면 다른 한 가지는 불확실하고 우연한 결과가 된다는 것, 장소와 임펄스를 함께 확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우연은 역사의 동인(動因)이다.
“독일을 통일에 이르게 한 결정적 계기 역시 아주 우연한 사건이었다. 1989년 11월 9일 동베를린 정치국의 귄터 샤보브스키는 카메라 앞에서 너무 긴장한 나머지 동독 정부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누군가가 그에게 찔러준 쪽지를 읽었다. 동독 주민들의 비자 없는 서독 여행을 허가한다고 말이다.” 이 소식을 접한 열광하는 동독 군중 앞에서 국경수비대가 정신을 못 차렸다고 한다. 글쎄? 믿거나말거나!
“우연은 우리에게 머릿속의 사상누각을 떠나 현실에 발을 딛도록 인도한다. 그러므로 예기치 않은 일에 더 많은 여지를 허용하는 것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모험일 뿐 아니라, 우리의 인식을 더 날카롭게 하고 시간에 대해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한다. 우연은 우리에게 신중함을 가르쳐준다. 이것이 바로 우연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행복의 공식』에서는 행복이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외부의 상황에 그다지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중요한 것은 두뇌가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이며, 이런 해석 습관은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최근 신경생물학계는 인간의 두뇌가 매우 유연해서, 습관을 바꾸면 두뇌 속 회색세포의 망도 변화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따라서 우리는 적절한 연습을 통해 행복 능력을 높일 수 있다. 즉, 행복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역시
『시간의 놀라운 발견』에서 언급한
『행복의 공식』(김영옥 옮김, 2006)에 대한 슈테판 클라인의 자평이다. 이 ‘행복의 과학’을 통해 슈테판 클라인은 “자신의 삶에서 우정을 지워버리는 사람은 세상에서 태양을 없애버리는 것이다”라는 키케로의 말을 인용하면서 ‘사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친구는 또한 오래 살도록 도와준다.” 수명에 관한 한 사회적 관계는 평균적으로 흡연이나 고혈압, 비만이나 규칙적인 운동과 똑같은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얘기다. 나이?성별?건강 상태와 상관없이 외로운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 제대로 배려를 받는다고 느끼는 사람보다 높은 사망률을 보인다. 외로움은 흡연보다도 더 나쁜 영향을 준다.
“강한 사람은 혼자 있을 때 가장 강력하다”는 프리드리히 폰 실러가 남긴 발언을 놓고, 슈테판 클라인은
“독일의 일반적 사상은 고독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고상한 정신적 상태라는 치명적인 오류에 갇혀 있다”고 비튼다. 그렇지만 “나쁜 관계 속에 있는 것보다는 혼자 있는 것이 낫다.”(조지 워싱턴)
“타인과 가까이 있는 것이 인간의 행복에 그처럼 중요하기 때문에 나쁜 관계는 혼자 사는 삶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를 의미하는 것이다.” 슈테판 클라인 책의 한국어판 세 권 모두 웅진지식하우스에서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