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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영웅을 기다리며, 80년대의 협객, 장총찬의 이야기 - 『인간시장』

! 저 이름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신들린 듯한 표창 솜씨와 무술 실력, 불타오르는 정의감으로 80년대의 어두웠던 시절을 환히 밝혔던 인물. 비록 실존 인물은 아니었지만 정의의 대명사가 된 장총찬은 드라마와 책 속에서 읽는 이의 피를 끓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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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총찬!

저 이름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신들린 듯한 표창 솜씨와 무술 실력, 불타오르는 정의감으로 80년대의 어두웠던 시절을 환히 밝혔던 인물. 비록 실존 인물은 아니었지만 정의의 대명사가 된 장총찬은 드라마와 책 속에서 읽는 이의 피를 끓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시절의 법과 정의가 흔들리는 듯한 뉴스를 볼 때마다 저 이름이 생각납니다. 한 공장에서 여러 명이 같은 병으로 죽어도 공장에는 원인이 없다는 발표, 바닷가에 기름을 쏟아 붓고도 사과 한 마디 없는 대기업들을 보면 80년대의 그 이름이 생각납니다. 간만에 도로 꺼내 읽어본 책은 김홍신의 소설 『인간시장』입니다.

소설의 배경은 한국의 80년대입니다. 광주의 피로 서막을 연 군부의 정권 찬탈, 격렬했던 저항과 그에 상응한 무자비한 탄압, 갓 풍요로워지기 시작했던 사회 구석에서 터져 나왔던 빈부격차의 갈등들, 천민자본주의의 득세로 인한 구석구석의 부패들이 눈코입이 아닌 피부로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고 하면 맞는 표현일지 모르겠습니다. ‘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의 밝은 멜로디와 ‘새악시 하나 얻지 못해 농약을 마시던 참담한 농촌 총각들은 말고~’의 어두운 가사가 같은 노래 제목으로 (두 노래는 모두 ‘아,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이고, 앞곡은 정수라, 뒷곡은 정태춘입니다) 불리던 시대였으니, 그 기이한 모순성을 알 만합니다.

『인간시장』의 주인공 장총찬은 그런 시대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산 속 어느 고승으로부터 다양한 무예를 전수받은 이 총각은 의협심을 가득 품은 채로 세상에 나와서는 서민들의 일상 주변에부터 만연한 온갖 비리와 부정의에 몸뚱이 하나로 맞섭니다. 장총찬의 여자친구이자 서브 캐릭터 역할을 하는 르포기자 정다혜가 사회의 어두운 면을 밝히려 들고, 그 와중에 발생하는 폭압을 장총찬이 뚫어내는 방식으로 이야기는 전개됩니다.

약 한 권 반 정도의 분량씩으로 구성된 매 에피소드는 기본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것과 유사한 구조로 진행되지만, 그 소재는 정말 당대의 모든 풍속과 은밀히 전해지는 ‘카더라 통신’ 류의 루머를 망라했습니다. 맛있기로 유명한 커피숍을 뒤져보니 알고 보니 마약을 섞었더라는 이야기부터, 뉴스에도 한참 나왔던 카바이트 섞은 막걸리 제조공장, 80년대의 가장 음울했던 구석인 인신매매와 성 노예 매매단, 새우잡이배와 앵벌이 같은 일상적 서민의 삶을 위협하는 수많은 부조리들이 장총찬의 표창 앞에 쓰러집니다.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위처럼 일상 속의 부조리들을 단죄하는 내용으로 채워집니다. 사법의 정의가 제대로 서 있는 나라라면 응당 법으로 처분해야 할 문제들이 그러나 경찰과 부패세력간의 은밀한 커넥션을 통해 어물쩍 넘어가고, 오히려 민간인 신분의 별 권력 없는 청년에 의해 해결되는 과정들은 국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이러니입니다만, 소설 『인간시장』의 인기는 오히려 바로 이런 점에서 시작됩니다.

단순히 낮은 심급만의 에피소드를 다루던 소설은 후반부로 갈수록 그 주제의 무게를 더해갑니다. 서민들의 일상에 개입했던 부정부패를 넘어서 대기업의 농간, 정치권과의 결탁, 그 권력층과 서민 사이를 메우는 조폭집단의 횡포 등을 조금씩 그려냅니다. 그러면서 장총찬의 신변에 가해지는 위협도 점점 커지지만, 주인공은 쉽게 싸움을 그치지 않습니다.

1988년 MBC에서 방영한 박상원 주연의
드라마 <인간시장>의 한 장면

『인간시장』이 출간되고, 또 드라마로 방영되던 시기 장총찬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어른들의 술자리에서, 집에서 모여 뉴스를 보는 자리에서, 동네 꼬마들의 골목 놀이에서도 장총찬은 80년대의 홍길동이자 임꺽정 정도의 무게를 차지했습니다. 저만 해도 당시 놀이터에서 칼싸움 한 판을 하더라도 누가 장총찬일지를 놓고 티격태격했던 기억이 납니다.

“싸움의 역사는 늘 긴 거 가진 놈이 이기는 역사였다. 권총보다도 나은 게 장총 아니냐.”라는 논리에서 만들어진 주인공의 이름이 장총찬입니다. 장총찬이 그토록 매력적인 캐릭터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시대상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부정이 부정으로 여겨지지 않고 비리가 비리로 치워지지 않는 세상이 그 시대였습니다. 갑작스런 경제성장으로 인해 일확천금의 기회가 널려 있던 개발 시기, 많은 이들이 윤리와 도덕을 저버린 채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 하는 세상이 왔고, 세상은 온통 비리로 얼룩졌습니다. 사람이 못 먹을 불량식품, 사는 집을 통째로 밀어버리는 재개발과 강제철거, 사람을 납치해 노예로 부려먹는 인신매매, 심지어는 마취시킨 뒤 장기를 떼어다 파는 일까지 돈이 되면 안 벌어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런 일들을 통제해야 할 권력기관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챙기지 않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등장한 장총찬은 그 가치를 위한 등장만으로도 충분히 독자들의 매력을 사로잡을 만한 기본을 갖추고 있습니다.

거기에 이른바 ‘협俠’으로서의 가치가 더해집니다. 슈퍼맨, 배트맨과 같은 개인의 능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인간이 올바른 가치를 위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한국이라면 암행어사와 같은 케이스이겠고, 중국이라면 『영웅문』 등에 등장하는 대의를 위한 협객이겠습니다. 이러한 초인적 능력을 갖춘 캐릭터로서의 장총찬은 정의의 협객으로서 자리매김합니다.

독자들이 협객의 협행에서 느끼는 감성은 카타르시스 그 자체입니다.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고 누가 도와주지도 않을 여러 가지 어처구니없는 사회 문제들을 초인적 무술을 가진 젊은이가 나타나서 복잡한 법적 절차나 이런 거 없이, 간단명료하게 때려 부수어 정의를 복구하는 단순 명쾌한 컨셉은 모든 이들로부터 크게 환영받기에 손색이 없었습니다. 어린이용 로봇 만화에서 명확한 악당들을 정의의 로봇이 때려 부수는 서사와 크게 다를 바 없지만, 그 똑같은 줄기의 이야기는 80년대의 실제 시대상이 ‘악의 무리’로 1:1 대응이 될 만큼 최악이었기에 독자들에게 엄청난 쾌감을 가져다 줄 수 있었습니다. 마치 진짜 세계에 장총찬이 나타나서 모든 악을 응징해 줬으면 하는 기대를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매력을 가진 『인간시장』은 21세기 최근에 와서도 몇몇 판타지 계열의 소설에서 명맥을 잇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아예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 세계를 다루는 소설 외에, 현실 속에 등장하는 초인이나 영웅의 이야기를 다루는 몇몇 책들에는 이와 유사한 설정이 자주 나타납니다.

고대의 무술을 습득한 이가 국가정보원 비슷한 기관에서 비밀 요원으로 활약한다는 설정이나, 만년 과장이 엄청난 힘을 얻어 사회악을 구석구석 쫓아다니며 척결한다는 류의 이야기들이 상당합니다. 대부분 전문작가라기보다는 아마추어 작가들의 책에서 많이 나타나는 이러한 흐름의 컨텐츠들은 대부분의 서민들이 가지고 있는 부조리한 현실을 타개할 강력함에 대한 갈망이라고 짚어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 점을 돌이켜 볼 때, 어찌 보면 요즘의 우리 곁에는 그런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실체도, 컨텐츠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 생각납니다. 현실은 여전히 부조리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시장』의 배경인 80년대보다 더 고도화된 형태로 우리의 삶을 압박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 시대를 갈랐던 장총찬의 매력만큼을 끌어갈 수 있는 누군가는 현실에도, 소설에도, 드라마에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오히려 부조리한 현실을 타고 성공했음을 암묵적 전제로 깔고 있는 이른바 ‘성공한’ 이들의 안락한 일상들이 동경의 대상으로서 대부분의 대중문화 컨텐츠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점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현실에서건, 이야기 속에서건, 다시 한 번 장총찬 같은 인물을 만나 봤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시대에 그렇게 막무가내 이야기가 먹히겠느냐는 어느 출판사 편집장의 말을 뒤로 하고서라도 한 번쯤 그런 이야기를 접해 본다면 다시 한 번 가슴이 뛸 것 같습니다. 시대가 막막해질수록 어린시절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던, 스스로를 장총찬이라고 다짐했던 그 심경은 커져만 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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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아하고 고고? 이미지가 되어버린 책 읽기가 어느 날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어디 가서 취미가 책 읽기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보다 좋은 것은 먼지 날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감성과 지성이 경륜으로 불릴 쯤이 되면 포크 가수로 전업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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