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부산의 바닷바람이 그리워져 새해 첫 나들이로 부산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은 다음 여름에 가보지 못한 ‘이주홍문학관’이 생각이 났다. 토요일에 도착하는 관계로 일요일에 방문하고 싶다는 메일을 보내자 이번 일요일에는 오픈을 하지 않지만 멀리서 찾아오신다니 반갑게 기다리겠다는 반가운 답신을 받았다.
부산에 도착한 다음 날, 친구들과 아이들과 명륜동 지하철역에서 내려 미리 출력해간 지도를 들고 한참을 걸었다. “야, 문학관은 원래 전망 좋은 언덕 같은 곳에 있더라. 그러니 더 걸어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친구의 말에 “그런가?” 하며 모퉁이를 돌 즈음 갑자기 아이들이 “여기 있어요!” 하고 소리친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그곳, 바로 이주홍문학관의 이정표를 찾은 것이다.
| 이주홍문학관 앞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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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홍문학관은 명륜동역에서 내려 동래 원예고와 유락여중 쪽으로 가다 보면 길 하나 사이로 학교를 마주하고 주택가 쪽에 위치해 있다. 작은 나무 대문이 나 있는 담벼락에 길게 ‘이주홍문학관’이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니 “누구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왠지 어린 시절 이모네를 찾아 갔을 때나 친구 집 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를 때처럼 정겨운 느낌이 들어서 “우리 왔어요.” 하고 말하자 주인장이 “네, 어서 오세요.” 하고 문을 열어준다.
| 문학관 옆에 위치한 사저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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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하고 차분한 인상의 여자분이 반갑게 열어준 문으로 아이들과 함께 들어서는 순간, 그곳은 별세계처럼 우리 눈에 들어왔다. 한쪽 담벼락에 나 있는 문을 통해 살짝 보이는 정원과 집은 이주홍 선생님의 가족분들이 사는 사저라고 했다. 우리는 2층에 유리로 된 발코니가 딸린 현대적인 건물 안으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주홍문학관은 원해 향파 이주홍 작가(1906~1987)가 1971년부터 1987년 별세할 때까지 기거했던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 1동 177-18번지 가옥을 부산광역시의 지원금으로 구입하여 개축한 것인데, 이 지역의 개발 공사로 인하여 2004년 5월 현 위치에 문학관을 신축하여 이전한 것이라고 한다.
1층에는 ‘이주홍문학당’이라는 글씨와 함께 벽면마다 책꽂이로 가득한 세미나실이 있었는데 이곳은 문학세미나와 토론회 장소로 쓰이기도 하지만 조만간에 시민도서관으로 거듭날 예정이라고 한다.
| 2층 전시실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는 선생님의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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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심히 설명을 듣는 아이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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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으로 나 있는 계단을 조용히 걸어 올라가니 그곳에 이주홍 선생님의 유물과 작품전시실이 나왔다. 그때 이주홍 선생님의 작품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분이 올라오셔서 아이들에게 이주홍 선생님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작품들을 설명해주셨다.
“향파는 세상살이의 자잘한 관심을 기록하기 위해 늘 만년필과 수첩을 가까이 두는 버릇을 지녔다. 사진 찍는 일 또한 묵은 취미였다. 따뜻한 해학과 폭넓은 현실긍정을 오래도록 다층적으로 담아낸 향파 문학의 남다른 온기를 낡은 애장품들은 증언한다.”
| “이게 바로 선생님의 유품이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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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의 한 쪽 벽에 적힌 글귀를 읽은 뒤 중앙에 마련된 전시물들을 살펴보니 2~30자루는 족히 넘어 보이는 손때 묻은 만년필부터 안경과 안경집, 역시 손때 묻은 오래된 수동카메라와 외출 시에 썼던 모자까지 작가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물건들이 빼곡히 전시되어 아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선생님은 어린 시절부터 문학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습니다. 아동문학뿐만 아니라 희곡과 미술, 작곡, 출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셨어요. 특히 경남 지역 아동문학 1세대 작가로 많은 후배들에게 영향을 미치셨답니다.”
| 향파 이주홍 선생님 앞으로 보낸 이원수 님의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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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을 들으며 전시실을 둘러보니 정말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작가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전시해놓은 곳에서 엄홍섭, 정지용, 김소운, 채만식, 김동리, 황순천, 이원수 같은 분들의 이름이 발신인으로 되어 있는 편지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넓고 깊은 작가의 친분관계를 느낄 수 있었다. 아이들은 다른 문인들이 보낸 편지를 자세히 살펴보면서 오래된 편지지에 저마다 각기 다른 글씨들이 재미있게 생각되었는지 유심히 보다가 한마디 한다. “에이. 글 쓰는 아저씨들이 글씨는 되게 못 쓴다.” 그래서 우리는 즉석에서 어떤 분이 명필인가 투표를 해보았는데 아이들에게서 제일 많은 표를 받은 글씨는 바로 이원수 님의 것이었다. ^^
| 생전 집필활동을 하셨던 서재 앞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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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홍 선생님이 아이들을 위해 쓰신 작품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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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홍 선생님이 직접 쓰고 그린 시 ‘석류꽃’이 담긴 족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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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편에는 평소 창작활동을 했던 작가의 서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고 맞은편에는 어린이들을 위해 작가가 쓴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동시집인 『현이네집』, 시집인 『풍경』을 비롯하여 『못난 도야지』『이순신장군』
『피리부는 소년』『살찐이의 일기』 등 지금 읽어봐도 재미있을 것 같은 제목의 책들이 아이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 외에 《신소년》《별나라》 등 잡지에 표지그림을 그릴정도로 뛰어난 그림실력을 지닌 작가가 남긴 서예와 그림, 만화작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소장하고 있는 잡지 단행본 6,000여점 중 희귀본들을 모아 전시하고 있었다.
“와, 이런 것 한번 읽어 보고 싶다.” 아이들의 말을 들으셨는지 찬찬히 구경을 마치고 1층으로 아이들과 함께 내려가자 문학관 측에서는 1층 세미나실에 아이들을 위한 작은 다과를 마련해놓고 클래식음악을 틀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주홍 선생님께서 쓰신 시집 한 권을 내오셔서 우리 엄마들에게 한 명씩 나와서 아이들에게 시를 읽어 주지 않겠느냐는 제안까지 하셨다. 집에서야 늘 책 읽어주는 것이 일이지만 이렇게 아이들 앞에서 마이크에, 더군다나 배경음악까지 깔고 시를 읽으려니 떨리는 마음이 더 앞섰지만 나와 친구들은 용기를 내어 맘에 드는 시를 찾아 아이들에게 하나씩 정성껏 읽어 주었다. 처음에는 아이들도 과자를 먹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이내 마이크 앞으로 조로록 나와 앉아서는 엄마들이 읽어 주는, 처음 듣는 그러나 따뜻하기만 한 시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 시간만큼은 참으로 경건하게 느껴졌다.
| 열심히 방명록을 적는 아이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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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석에서 시 낭송의 시간을 가진 뒤 모두의 마음에 따뜻함이 베어들 즈음 아쉬운 작별의 시간이 되었다. 아이들은 처음 문을 들어섰을 때와는 뭔가 다른 눈으로 방명록에 자신들의 느낌과 이름을 정성껏 적고는 “다시 또 올게요!” 하고 인사를 한 다음 아쉬운 발걸음을 옮겼다.
새해 덕분에 좋은 곳에서 멋진 시간 보내게 되어 고맙다는 친구의 칭찬에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아이들도 이주홍 선생님의 작품들을 도서관에서 꼭 찾아서 이번 방학 때 독후감으로 써내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추억이 될 만한 물건은 뭐든지 소중하게 보관하여 자료로 남긴 선생님처럼 나중에 자신들도 어른이 되었을 때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그런 물건들을 하나하나 모아볼 수 있기를 바라보았다. 이주홍문학관은 아마도 ‘부산’ 하면 떠오르는 다른 어떤 추억들보다 더 귀중한 보물처럼 아이들과 내게 남을 것 같다.
◆ 이주홍문학관 //www.leejuhong.com/
관람시간 - 화요일~일요일(오전 10시 ~ 오후 5시), 월요일, 국가공휴일 휴관
관람문의 - 051-552-1020(관람 전 사전 예약 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