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말한다. 공부도, 일도, 취미생활도, 하물며 사랑까지도. 그런데 그 ‘적절한 때’라는 것이 보통 ‘젊은 날’과 상통하는 경우가 많다. 공부도, 일도, 사랑도 모두 머리가 팔팔하게 돌아가고 체력이 뒷받침되고 물불 안 가리고 이 한 몸 내던질 수 있을 때나 가능하다고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더해갈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젊음이라는 나이와 점점 멀어지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재미로, 아니 무엇을 희망하며 사는 것일까? 분명히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가자면 그들에게도 ‘삶의 의미’라는 게 필요할 텐데 말이다.
그래서 이 연극을 꼭 보고 싶었다. 젊음의 거리며, 그들만을 위한 공연이 즐비한 대학로 어느 구석에서 해마다 겨울을 따뜻하게 지피고 있는 늙은 부부의 이야기를 말이다.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
산동네, 툇마루가 있는 아담한 집이다. 햇볕 따사로운 봄날, 동두천 바람둥이 노신사 박동만과 욕쟁이 할머니 이점순은 세입자와 집주인 관계로 대면한다. 예전부터 할머니에게 마음이 있었던 할아버지는 비싼 방세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이사를 결정하지만, 할머니는 찬바람을 쌩쌩 날리며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결국은 남자와 여자. 사사건건 옥신각신 티격태격 말다툼을 벌이던 이들의 실랑이는 또한 서로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 아니었겠는가. 무대 조명이 꺼지고 배경이 매미 소리 나는 여름으로 바뀌었을 때, 그들은 나란히 한 이불 안에 잠들어 있다.
|
외로움의 정점에 만난 노신사와 욕쟁이 할머니 | |
자, 그럼 이제 이들의 러브스토리를 한번 구경해 볼까나. 구부정한 허리에 백발의 노인이 되어도 사랑 앞에 선 남녀는 똑같은가 보다. 일단 할머니는 ‘욕쟁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참한 새색시가 되었다. 할아버지를 바라보는 눈매며 손짓 몸짓 하나하나가 새색시 한복마냥 곱디곱다. 할아버지는 또 어떤가. ‘바람둥이’란 결국 여자의 마음을 잘 안다는 얘기가 아니던가. 그동안 이른바 ‘선수’로서 갈고 닦은 기량을 인생의 막바지에 만난 한 여자에게 모두 쏟아 부으니, 그야말로 닭살 커플이 따로 없다. 무엇보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그것도 외로움의 정점에 만난 두 사람이기에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애틋하고도 눈물겹다.
|
늙은 신혼부부의 닭살행각 | |
그러나 모든 사랑은 이별이라는 짝을 숨겨두고 있기에 ‘영원’이라는 꿈의 동산은 항상 신기루가 되고 만다. 늙은 신혼부부에게는 ‘죽음’이라는 이별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할머니의 불치병으로 다음 봄을 기약하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변하거나 다른 사랑을 찾아 나선 이별이 아니라 생을 다한, 그야말로 마지막 사랑이라서 그럴까? 이 늙은 부부가 이별을 준비하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생애 온 무게로 서로 의지하고, 배려하고, 그리고 사랑하면서 다가올 이별은 물론 그간 살아온 삶의 고단함과 외로움마저 달랜다. 욕심 없는 이별이기에 그 헤어짐에는 성냄이나 분노, 절망이나 서러움도 없다.
늙은 부부를 바라보는 이들연극이 시작되기 전 분장실에 들러 이번 작품에서 할머니 역을 맡은 사미자 씨를 만나봤다. 일단 요즘 TV드라마 두 개 작품에 출연하면서 연극까지 참여하고 있는 사미자 씨의 연기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그러나 드라마와는 사뭇 다른 소박하고 직접적인 연극 무대, 그 안에서 만난 생애 마지막 사랑에 대해 의견을 구했다. “연극은 NG라는 게 없기 때문에 드라마보다 훨씬 많은 준비가 필요한데요, 그래도 오랜만에 연극 무대에 서니까 점점 그 마력에 빠져드는 것 같아요. 그리고 연기를 하면 할수록 ‘이것이 바로 내 얘기일 수 있구나, 부부가 헤어질 때는 이런 아픔이 있겠구나.’ 느끼죠. 그래서 사랑은 두말없고 미움이라는 단어를 가슴속에서 지워버리게 됐다고 할까요? 우리가 사랑하면서 살아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미움이라는 단어는 없애버리자 생각해요. 그래서 그런지 우리 부부도 나이 먹어 가면서 정도 더 느끼고 애틋한 마음도 더 생기는 것 같아요(웃음).”
|
두 사람 만의 눈물겨운 결혼식 | |
관객들은 어떨까? 늙은 부부의 이야기라서 그런지 소극장 객석은 젊지 않은 부부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저 나이에도 함께 연극을 보러 공연장에 왔다는 것, 아직도 정이 옹골지게 이어지고 있다는 말 아니겠는가. 그래서인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실랑이부터 닭살 연애 행각까지 객석의 반응도 여느 연극 무대와는 다르다. 이미 모든 감정이란 감정은 완숙하게 경험해본 중년 부부들은 너털웃음과 때로는 추임새까지 곁들이며 무대와 소통했다. 또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애기 다루듯 위할 때는 각자의 남편들을 바라보며 핀잔주는 모습이 이십 대 커플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마침내 늙은 부부의 이별. 객석은 이내 숙연해져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를 내보낸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마주서야 할 이별이며,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
사랑과 함께 찾아오는 이별 | |
중년의 부부들 사이에 끼어 그런 생각을 해봤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모르지만, 운명이라는 것이 삶을 잘 조율해서 파파 할머니가 됐을 때 첫사랑을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래서 이 연극에서처럼 봄, 여름, 가을, 겨울, 딱 1년만 함께 살아보는 것이다. 흑발의 머리가 이렇게 백발이 된 사이 이런저런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때 이렇게 저렇게 살아왔노라 서로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을 마감하는 길이 전혀 두렵거나 외롭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사람이 굳이 왜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풀리지 모르겠다.
늙은 부부의 마지막 사랑을 보며 첫사랑만큼이나 뜨거운 감동을 느낄 수 있는 무대다. 젊은이들에게도 멋진 연극이지만 부모님께 선물하면 아마 한동안은 집안에 행복한 미소와 맛있는 반찬이 그득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