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뮤지컬 <밴디트>에 출연할 배우 전아민, 한지상을 인터뷰하기 위해 연습실에 찾아간 적이 있다. 사실 <밴디트>의 주인공들은 따로 있는데 모두가 여자다. 전아민과 한지상은 그녀들의 기가 어찌나 센지, 최대한 쪼그라들지 않는 게 목표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밴디트>의 주연배우들이 바로 이정화, 소찬휘, 이영미, 리사다. 이름만 들어도 카리스마가 확 달려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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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콘서트형 뮤지컬 <밴디트> | |
드디어 그 광분할 기가 뿜어져 나오는 무대를 직접 찾아가 보았다. 보컬 역에 이정화, 소찬휘, 건반 역에 이영미, 리사가 각각 더블 캐스팅된 만큼 4색의 무대에서 선택의 기로에 빠졌으나, 과감히 ‘이정화-이영미’ 조합을 골랐다. 무대가 열리자마자 스탠딩 마이크를 휘어잡은 그녀들은 마음의 준비를 할 사이도 없이 거침없는 열정을 뿜어냈다. 쩌렁쩌렁한 사운드, 파워풀한 가창력과 내지름, 객석을 장악하는 강렬한 눈빛과 절도 있는 몸짓. 한지상과 전아민의 말대로 점점 쪼그라드는 나를 느끼며, 자꾸만 무대로 빨려 가는 듯한 느낌에 의자 손잡이를 꽉 부여잡았다.
뮤지컬 <밴디트>는 대표적인 콘서트형 뮤지컬이다. 원작 영화가 있지만, 우리 정서에 맞게 또 뮤지컬 무대에 적합하게 내용은 많이 각색됐다. ‘밴디트’는 교도소에 갇힌 여자 재소자들이 결성한 록 밴드 이름이다. 답답하고 무료한, 무엇보다 자유를 박탈당한 이들에게 음악은 유일한 피난처이고 희망이다. 모양새와 나이가 다르고, 살아온 배경과 죄목이 다른 것처럼 모두가 제각각의 슬픔과 활화산 같은 분노를 가진 그녀들은 오로지 음악을 통해서만 소통할 수 있다. 그러던 밴디트는 ‘경찰의 날’ 행사에 참여했다 탈옥을 감행한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자유! 게다가 어느새 그녀들의 음악은 라디오만 틀면 나올 정도로 유명세까지 타고 있다. 그러나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쥐었으나 그녀들은 전혀 행복하지 않다. 감옥을 나왔으나 여전히 경찰의 수사망에 쫓기고 있으며, 노래 한 소절 시원하게 부를 수가 없다. 그들을 억압한 것은 감옥이라는 공간이 아니었으며, 밴디트는 음악 안에서 자유를 찾은 것이다. 결국 자수를 결정한 그들은 마지막으로 콘서트를 연다. 정말 화끈하고, 열정적이며, 무한 자유가 느껴지는 격정의 무대를.
예상치도 못했다. 이 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릴 줄이야. 절절한 사랑 이야기도 아니고, 뜬금없는, 죄수들이 노래를 통해 자유를 얻는다는 이상적인 주제. 배우들의 연기가 궁금했을 뿐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덧 내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뿐 아니라 여기저기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신나는 록 사운드에 눈물을 흘리도록 만든 원동력은 단연 배우들의 열정, 그리고 열정, 또 열정이다.
원래도 가창력 있는 뮤지컬 배우지만, 평소 무대에서 볼 수 있었던 예쁘장한 모습한 음색을 뒤로하고 내지르고 또 내지른 이정화. 독보적인 카리스마와 몸을 내던진 무대매너, 무엇보다 가슴은 물론 머리까지(이 배우가 나온 작품은 꼭 또 다시 보리라 다짐하고 되새겼다) 강타한 가창력으로 객석을 장악한 이영미. 또 깜찍하고 통통 튀고, 기대 이상의 연주와 연기, 대 선배들의 카리스마에도 눌리지 않고 자신들만의 젊음과 패기를 유감없이 드러낸 록 그룹 ‘벨라마피아’ 멤버들. 그리고 내레이션으로, 교도관으로, 아이돌 스타로 모습을 바꿔가며, 광기를 뿜어내는 여인들 사이에서도 꿋꿋하게 제 역할을 다 해내며 웃음까지 선사한 전아민과 한지상. 음악을 통해, 무대를 통해 자유와 열정을 불사르는 그들의 모습은 연기인지 실제인지 모를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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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이정화, 한지상, 이영미 | |
얼만 전 TV에서 각종 중독에 대해 말하는 걸 스치듯 들었다. 알코올이나 약물을 비롯한 물질중독이든 사랑, 쇼핑, 운동, 일, 인터넷 중독 같은 행위중독이든 각종 중독증세가 중추신경에서 발현되는 과정은 동일하다는 내용이었다. 소스는 다르지만 결국 쾌감중추를 자극해서 기쁨이나 흥분을 느끼게 하는 도파민을 분비하게 만든다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또는 즐기고 있다는 이유로 어떤 일에 몰입하는지도 모른다.
‘열정’이라는 것도 결국 하나의 중독증세가 아닐까? 지금 무대에서 연주하고 노래하고 있는 이들에게 ‘내일’이란 먼 세상 시간 같다. 오로지 지금 이 무대, 노래하는 이 순간만이 존재한다. 저렇게 노래하면 목이 남아날까, 저토록 열광하면 체력이 곧 바닥날 텐데, 앞으로 공연이 계속 이어질 텐데 어쩌려고 저러나…. 그들의 광적인 무대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어쩌면 그 공연장에서 열정이 가장 부족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삶이 무료하다면, 그래서 도파민이 좀 과다 분비될 필요가 있다면 <밴디트>라는 촉매제를 강력 추천한다. 올 연말까지 문화일보홀에서 공연되는 뮤지컬 <밴디트>는 내년 초에는 대학로 무대로 자리를 옮길 예정이다. 시간의 여유가 다소 있지만, 앞서 말했듯 현재 배우들이 몸을 사리지 않고 노래하고 있다. 계속 그 컨디션이 유지되길 간절히 바라지만 혹시라도 있을 성대와 체력의 무리를 감안한다면, 도파민의 수치가 급격히 높아진 초반에 냉큼 관람하는 센스를 발휘해보자.
필자는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소찬휘-리사’ 조합을 비롯해 나머지 3색의 무대도 찾아가야겠다. 이런 나는… 공연 중독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