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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 소설 독자라면 반드시 거쳐가야 할 관문 - 《사조삼부곡》 3부작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나오신 분이라면 누구나 추억이 가득할 법한 시간이 야간자율학습 시간입니다. 정규 수업이 끝나고도 감독 선생님이 따로 남아 진행되는 이 시간은 조용하면서도 온갖 즐거운 일들이 벌어지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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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나오신 분이라면 누구나 추억이 가득할 법한 시간이 야간자율학습 시간입니다. 정규 수업이 끝나고도 감독 선생님이 따로 남아 진행되는 이 시간은 조용하면서도 온갖 즐거운 일들이 벌어지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빙고와 오목, 연습장 노트로 플레이하는 야구게임까지 오락의 장르는 다양하지만 그중 가장 점유율이 높았던 장르는 독서였습니다.

김용(金庸, 1924~ )
수많은 장르와 카테고리가 난무했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인기가 좋았던 책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김용의 무협 3부작 《사조삼부곡射雕三部曲》일 것입니다. 국내에는 《영웅문》 3부작으로 널리 알려진, 사실상 무협소설의 시작이었던 이 책은 주로 남성 독자를 중심으로 널리 읽혔던 여타 무협과는 달리 유려한 문체와 세밀한 묘사로 상당수의 여성 독자까지도 확보했던 보기 드문 소설이었습니다.

《사조삼부곡》의 폭발적인 인기는 다양한 현상들을 이끌곤 했습니다. 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사조삼부곡》을 보다가 감독 선생님께 걸리면, 간혹 머리 굵은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던지는 논쟁의 요지는 자못 심도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장르문학은 문학이 아닌가?’ ‘김용의 《사조삼부곡》을 장르문학의 범위에 한정시킬 것인가?’ 등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이러한 반항은 물론 ‘공부나 해라.’라는 윽박지름에 묻히기 일쑤였지만, 그 시절 숨어서 몰래 김용의 책들을 읽었던 학생들은 지금도 간간이 그 의문을 떠올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난 정말 재미있게 읽고 감명 깊었고, 내 삶의 목표와 모습을 찾는 데 도움을 받았건만… 무협이라는 이름으로 아직까지 천대받아야 한단 말인가?’

그전까지 해적판스러운 번역과 복잡한 판권 문제로 책의 모양새조차 B급으로만 여겨졌던 김용의 《사조삼부곡》 시리즈가 정식 계약과 번역을 통해 출간되기 시작해 마침내 『의천도룡기』의 출간으로 완연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3~40대의 추억과 지금 1~20대의 희망을 담은 김용의 《사조삼부곡》을 오늘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조삼부곡》은 과거 고려원 버전 《영웅문》 시리즈로 나왔던 김용의 대표 무협 3부작의 통칭입니다. 《사조삼부곡》은 첫 번째 이야기 『사조영웅전』(구 번역명 《영웅문》 1부 『몽고의 별』), 두 번째 이야기 『신조협려』(구 번역명 《영웅문》 2부 『대륙의 별』), 마지막 이야기 『의천도룡기』(구 번역명 《영웅문》 3부 『중원의 별』)로 구성되며, 대략 송나라 말엽 몽고 칭기즈칸의 원정 전 시절부터 명나라 건국기까지의 배경에서 강호 협객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제1부 『사조영웅전』의 주인공은 곽정입니다. 약간 우둔하고 단순해 보이는 성격의 곽정은 어린 시절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고 몽고로 몸을 피해 온 어머니를 따라 몽고에서 성장합니다. 이후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무공을 익혀 강호에 나가게 된 곽정은 후일 배필이 되는, 영리하고 입심 좋은 여성 황용과 함께 무림을 돌며 수많은 강호들을 만나고, 때로는 배우고 때로는 싸우며 서서히 성장해 나가며, 후일 무림 최고수를 논하는 화산논검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과정 속에 진정한 대협으로 거듭납니다.

《사조삼부곡》의 두 번째 이야기 『신조협려』는 1부보다 강하게 로맨스적 요소를 뿜어냅니다. 『사조영웅전』에서 곽정에게 죽임을 당한 양강의 아들 양과는 세상 모두로부터 버림받아 가며 살아가던 중 우연찮은 기회로 고묘파의 장문인 소용녀의 도움을 ?고, 그녀를 스승으로 모시고 무공을 연마하며 살아갑니다. 사제간임에도 불구하고 싹트는 연정을 거둘 수 없는 두 사람이 강호의 혼탁한 바람 속에 만나고, 헤어지고, 그리워하는 순환의 축을 중심으로 주인공 양과의 고독이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신조협려』의 줄거리입니다.

1, 2부와 상당한 시간적 격차를 갖는 3부 『의천도룡기』는 제목에 들어있는 두 자루의 칼이 만든 강호의 피바람 속 주인공 장무기가 성장하는 모습을 중심으로 그려냅니다. 『신조협려』의 주인공 양과가 쓰던 전설의 검 ‘현철중검’을 곽정과 황용 부부가 받아 녹여 두 자루의 무기를 만들어 내는데, 이것이 도룡도와 의천검입니다. 이 두 개의 무기를 갖는 자가 천하의 지배자가 될 것이라는 풍문에 강호의 무리들이 모두 달려들고, 그 속에서 정직하고 조금 소심한 성격에 우유부단하기까지 한 주인공 장무기가 무림의 혼란함을 정리하는 이야기를 그려 냅니다.

총 분량만 20여 권이 넘고, 시대 배경만 해도 송-금-원-명으로 이어지는 긴 세월을 다룬 줄거리는 다 이야기하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괜한 스포일링으로 읽는 재미만 날릴 뿐입니다. 다만 세 작품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뿌려두는 것은 김용의 소설이 갖는 매력을 더욱 한껏 느껴보기 위한 사전 작업을 위해서입니다.

위의 세 작품은 보셨다시피 아주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일단 그리 특출할 것이 없는 상황이고, 주변 누군가의 도움과 자신의 꾸준함을 바탕으로 무림에서 성장하여 대협의 이름을 얻으며, 항상 곁에 주인공을 돕는 여인이 존재합니다. (3부 장무기는 특히 많습니다.) 이는 비단 김용의 소설뿐 아니라 이른바 정통무협으로 분류되는 장르소설의 기본 구조입니다.

사실 이 부분까지는 김용 소설이 다른 여타 무협 소설과 큰 차이를 드러내기 어렵습니다. 김용의 《사조삼부곡》이 유독 독보적인 매력을 가지는 이유는 그러한 장르의 기본 구조에 신뢰도를 크게 더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역사적 배경을 들 수 있습니다. 단순히 중국 중원 중심의 이야기만 다루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예 배경도 모를 어느 시골구석이나 가상의 시대 배경을 들지도 않습니다. 《사조삼부곡》은 매우 명확히 시대를 짚어 두고 출발합니다.

『사조영웅전』의 배경은 송나라 말기입니다. 칭기즈칸은 몽고 내부의 통일을 마치고 서역을 정벌한 뒤, 중국을 막 눈여겨보기 시작할 때 즈음이었고, 송은 금나라의 부흥으로 인해 수도를 내주고 남송으로 천도할 시점이었습니다. 송-몽고-금의 3국 대립 속에 주인공은 한족 출신이면서도 몽고에서 자란 통합자로서의 격을 갖춥니다. 그렇기에 『사조영웅전』의 배경은 매우 명확하면서도 일반적 무협의 배경보다 운신의 폭을 넓힌 유라시아 전체로 볼 수 있는 확장성과 신빙성을 갖추게 됩니다.

무협을 가상의 공간에 두지 않음으로써 《사조삼부곡》은 역사 소설이 갖는 사실감을 고스란히 살려 냅니다. 『신조협려』의 양과가 몽고군과 싸우는 장면이나, 『의천도룡기』의 장무기가 명나라 탄생의 주역인 ‘명교’ 교주로 나타나는 장면 등은 실제 역사에 기반을 둔 픽션이 갖는 사실적 재미를 독자에게 전달함으로써 협俠이라는 대의가 실존한다는 가치를 심어주어 소설의 재미를 북돋웁니다.

시공간적 배경에서의 신뢰도는 세세한 캐릭터 묘사를 통해 더욱 강해집니다. 잠깐 등장하는 캐릭터 하나에도 부여하는 말투와 성격, 습관은 인물과 인물이 만드는 관계의 숲, 무림武林을 더욱 풍성하게 합니다. 대부분의 사건과 흐름은 인물들이 가진 성격에 의해 촉발되고, 심지어는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해당 인물의 판단이 어떠할는지를 독자도 쉽게 알 수 있을 만큼의 세밀한 묘사를 통해 《사조삼부곡》은 머나먼 시공간의 이야기를 현실로 잡아당기는 효과를 냅니다.

이렇게 시공간과 인물에 대한 탄뫅한 배경을 갖추고 소설이 말하는 이야기의 주제는 인간사 그 속의 이른바 ‘대의大義’입니다. 협俠이라는 가치는 한 개인에게 대의가 부여되는 상황을 묘사하는 것으로, 단순히 말하면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부드럽고, 인민 전체에 이득이 되는 행行으로 살아가는 이’ 정도의 풀이가 가능할 것입니다.

협俠은 특히 소설의 배경이 혼탁한 시대상이기에 더욱 빛을 발합니다. 끝없는 전란과 부패, 도덕의 타락으로 불거지는 개인과 개인의 불신을 주인공들은 비록 아둔하고 거칠고 소심하지만 올곧은 심지 하나로 정리해 냅니다. 어찌 보면 현실 사회에서 한 개인의 올곧음만으로 이뤄낼 수 없는 이상적인 가치를 무협소설이라는 장르가 가진 판타지적 측면으로 구현해 냄으로써 독자들은 누구나 꿈꾸는 대의의 실현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얻습니다.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 이들이 만드는 이상과, 그 이상이 구현되어 나가는 과정이 소설이 갖는 가장 큰 매력일 것입니다.

그렇게 구성된 소설의 매력은 치밀하고 방대한 소품과 배경으로 더욱 몰입도를 높입니다. 곽정의 주요 무공이자 개방파의 전수 무공인 ‘강룡십팔장’은 주역의 건괘에 대한 풀이를 기초로 하여 만들어졌고, 개방, 소림, 전진교, 무당파, 아미파 등의 단체들은 실존했고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현실의 소재입니다. 실제 각 문파들의 행동 양식이나 주요 무공 초식들 또한 각각의 문파가 갖는 교리에 맞게 구성되어 있어 딱히 어긋나는 점을 20여 권 전체를 통틀어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점들이 맞물리면서 비로소 《사조삼부곡》의 매력이 완성됩니다.

혹자는 동아시아의 무협과 유럽권의 판타지를 같은 선상에 놓고 분류하기도 하지만, 저는 그러한 분류에는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둘의 가장 큰 차이는 동류同類의 범주 문제인데, 무협의 경우 대부분이 인간사회 속의 통합과 분열을 주제로 다루지만, 판타지의 경우에는 상당수의 무게가 인간 대 비인간(또는 인간처럼 생기지 않은 것)에 두어져 있는 점은 상당한 시사점입니다. 이는 ‘괴력난신을 논하지 않는’ 공자의 유교 사상과도 닿아 있는 부분이며, 무림이라는 가상의 배경을 통해 결국 인간 사회의 이야기를 다루고자 하는 나름의 목표를 갖는 무협만의 특징입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할 때 최근 무협의 흐름인 신무협, 퓨전 무협과 같은 형태는 확실히 기존 무협과는 추구하는 바가 많이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신무협 독자든, 정통무협 애호가든 간에 구분하기 어려운 공통점은, ‘어쨌든 김용 소설은 반드시 거쳐 가야 할 관문이다!’라고 부르짖는 점일 것입니다. 하나의 장르 소설을 완성의 경지에 이끌고 간 작가는 늘 거장의 칭호를 받으며, 김용도 그 반열일 것입니다. 독서의 계절도 어느새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는 시점에 김용의 소설을 한 번쯤 손에 잡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그 독서가 추억을 되새기는 의미가 되는 나이의 분들도, 처음 김용을 접하게 될 보다 젊은 세대의 분들도 말이죠.

* 참고 - 김용 주요 소설 연대기
천룡팔부(북송)
사조영웅전(남송 말기)
신조협려(남송 말기~원)
의천도룡기(원 말~명 초)
소오강호(명 중기)
녹정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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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아하고 고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책 읽기가 어느 날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어디 가서 취미가 책 읽기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보다 좋은 것은 먼지 날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감성과 지성이 경륜으로 불릴 쯤이 되면 포크 가수로 전업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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