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일 년에 걸친 이 르포를 통해 내가 해왔던 일은, ‘산다는 것’의 실감을 되살리기 위한 작업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서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아무리 높은 빌딩도 순식간에 오를 수 있다. 표를 사서 전철에 오르기만 하면, 꾸벅꾸벅 졸면서도 목적지에 갈 수 있다. 돈만 내면, 세계 어느 곳, 어떤 계절의 과일이나 채소도 그 자리에서 얻을 수 있다. 쓰레기는 규격봉투에 넣어 대문 밖에 내두기만 하면 누군가가 치워준다. 에어컨 스위치 하나로 여름도 춥게, 겨울도 뜨겁게 보낼 수 있다. 그런 현실감 없는 세계를 우리는 살고 있다.
- 본문 중에서
켄세이 씨를 만난 것은 3년 전 여름, 후쿠오카에서였다. 자그마한 체구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앞머리가 벗겨진 그는 마치 이웃집 아저씨처럼 정겨운 모습이었다. 활짝 웃으면 순식간에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 잡히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당시 나는 ‘느림의 발견’이라는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었는데, 자료조사를 하던 중 마이니치신문의 한 기자가 펴낸 책을 읽고 관심을 갖게 됐다.
『즐거운 불편』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저자가 1년 동안 스스로 실험대상이 되어 일상에서 ‘느림’을 실천하고 그 과정을 기록한 것. 그가 바로 후쿠오카 켄세이 씨였다. 당장 섭외에 들어갔다.
현대사회의 키워드는 속도다. 꿈의 속도였던 광속(光速)이 광케이블을 타고 일상으로 침투하면서 메가(초당 1백만 회)에서 기가(초당 10억 회)로 확장된 디지털 시대의 속도 처리능력은 이제 테라(초당 1천억 회)의 시대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그에 대한 반작용일까, 사람들은 느림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현대사회가 너무 빨리 움직인다고 불평하고, 여유로웠던 옛날이 좋았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리워하던 그 시절은 과연 그렇게 아름다웠는가. 다시 과거로 회귀하자고 한다면, 선뜻 동의할 사람은 또 얼마나 될 것인가. 무한 질주하는 현대 사회에 발맞춰 줄달음치는 현대인들의 모습은 왜 항상 연민의 눈길과 우려의 목소리로 획일화되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들이 바로
『즐거운 불편』을 주목하게 된 이유였다.
자전거로 통근하기, 자동판매기에서 물건 사지 않기, 외식하지 않기(매일 내 손으로 도시락 싸기), 제철 채소나 과일이 아닌 것은 먹지 않기,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 이용하기, 전기청소기 쓰지 않기, 고장이 나도 새로 사지 않고 수리해서 쓰기… 켄세이 씨의 실험 목록이다. 결코 거창하지 않다. 하지만 실행에 옮겨보면 그리 녹록치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 실험은 하나의 가설에서 시작됐다. 그는 ‘정보나 쾌락, 편리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소비하고 있는 물질 가운데 대부분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이 아니라, 단순히 중독된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라는 가설을 세웠다. ‘중독된 것’으로 의심되는 물질이나 편리함을 실제 생활에서 끊어보고, 그 반응을 살펴보자는 것이 이 실험의 요지다.
켄세이 씨를 처음 만난 곳은 마이니치 신문사(후쿠오카 지부) 앞. 밤 1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신문기자라는 직업의 특성상 밤늦게까지 일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사무실에서의 모습은 여느 신문기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퇴근 시간이 되자, 그는 주섬주섬 보자기에 담긴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다. 보자기에 담긴 것은 60-70년대 영화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은 양은 도시락. 그는 한손에 도시락을 든 채 주차장 한쪽에서 자전거를 꺼내왔다. 양복 차림에 도시락 보자기를 매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신문기자. 뭔가 엉뚱한 조합처럼 느껴지면서도 제법 잘 어울렸다. 안전띠를 반짝이며 밤공기 속으로 멀어져 가는 자전거를 보고 있자니 슬며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다음 날은 휴일이어서 켄세이 씨 집을 직접 방문했다. 후쿠오카 다자이후 시에 위치한 아담하고 조용한 주택가. 현관 앞에는 자전거가 놓여 있고, 뒷마당에는 자그마한 텃밭이 있는 소박한 집이었다. 켄세이 씨의 부인과 딸 둘이 함께 맞아주었는데, 모두 눈매가 서글서글하고 잘 웃는 가족이었다. 1년간의 실험에 대한 인터뷰를 했다. 일상에서 ‘불편’을 실천하는 과정은 신문 기획기사로 연재됐는데, 상당히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처럼 주위의 주목과 기대를 받기 시작하자, 무슨 일이 있어도 목표를 달성해야 할 것만 같은 부담감이 생겨났다. 심한 감기에 걸렸을 때도 목표를 달성하려고 강행군을 하다가, 오히려 상태를 악화시키는 등 무리가 따르게 됐다고 한다. 그의 실험은 당연히 가족한테도 영향을 미쳤는데, 노력이 지나쳐 아내가 지병의 악화로 쓰러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때 가족들이 내린 결론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어깨의 힘을 빼자는 것. 무리하지 않고 즐겁게 하는 것이 오래 지속할 수 있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1년간의 실험은 켄세이 씨의 삶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자전거로 통근하면서, 자동차를 타고 다닐 때는 볼 수 없었던 계절의 변화들을 일상의 길목에서 느낄 수 있게 됐다. 유채꽃으로 노랗게 물든 강둑, 길가에서 배를 뒤집고 일광욕을 하고 있는 고양이, 자전거 옆에서 나란히 따라오던 갈매기, 눈처럼 흩날리던 연분홍색 벚꽃과 바람을 따라 부드럽게 흩어지는 꽃향기… 스피드에 대한 집착을 버리자, 잊고 지냈던 주변의 소소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날씨와 기후의 변화를 몸으로 직접 느끼는 것은 참으로 자극적이고 신선한 경험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계단을 이용하게 되면서 따로 운동을 하지 않아도 체중이 줄었고, 자판기 사용이나 외식 등 불필요한 낭비를 하지 않게 되면서 주머니 사정이 넉넉해지는 부수적인 효과도 얻었다. 온 가족이 모여 아침 도시락을 준비하면서, 가족 간의 대화도 늘어나게 됐다. 이후 그는 ‘즐거운 불편’의 목록을 확장시켜, 텃밭을 가꾸고 손수 농사를 짓기도 했다. 주변의 도움을 얻어 생전 처음 농사를 지으면서 사람들 사이의 유대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노동이 어떻게 ‘여가’로 탈바꿈될 수 있는지를 몸소 실천으로 보여줬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켄세이 씨의 큰딸은 수확했을 때를 떠올리며 “바구니에 하나 가득 딸기를 채웠을 때 너무 기뻐서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현대사회에는 두 개의 거대한 시간적 흐름이 존재한다. 표면적인 것이 속도의 흐름이라면 그 이면에는 느림의 축이 자리 잡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두 흐름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축이 다른 하나를 규정짓는, 서로가 서로를 의미 있게 만드는 상대적 가치의 구현인 것이다. 생텍쥐페리는 ‘사막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그 안에 샘물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추함이 있기에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고 그림자가 있기에 빛은 더욱 밝게 느껴진다. 현대사회는 느림의 의미를 다시금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그 역할이 결코 작지 않다. 뿐만 아니라, 빠르게 돌아가고 있는 현실은 이미 하나의 전제다. 현대 물질문명은 속도를 그 본질로 하는 까닭에 지금 와서 그 흐름을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다. 우리가 적응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사고를 전환하고 인식을 새롭게 하면 된다.
켄세이 씨의 실험이 의미 있는 것은, 그것이 과거로의 회귀나 귀향 등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라 ‘도시의 삶에서 실천 가능한 범위가 어느 정도인가’를 직접 보여줬기 때문이다. 또한 그 실험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강요하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이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지쳤을 때는 안락한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이 있을 때 비로소 불편을 진정한 자극으로 즐길 수 있고, 또 무리 없이 장기간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켄세이 씨의 실험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다.
완행열차, 산보, 인생을 즐기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 일이나 돈이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애정이 넘치는 생활, 주변을 천천히 돌아볼 수 있는 여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자신의 속도에 맞춰서 하는 것… 도쿄 신주쿠 한복판 거리 인터뷰에서 나왔던 대답들이다. ‘느림’이라는 단어를 듣고 떠오르는 것들을 물어봤었다. 현대인들이 지향하는 바가 묻어나는 답변들이었다. 내가 인터뷰를 했을 무렵은 이미 켄세이 씨의 실험이 종료된 시점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다가 큰 교통사고도 한 번 겪었다. 그러나 그의 가족들은 여전히 몇 가지 ‘불편’들을 일상에서 계속 실천하고 있었다. 작은 실천만으로도 삶이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이미 경험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