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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 루이스 세풀베다의 「엘베 강의 해적」

「엘베 강의 해적」은 루이스 세풀베다의 단편집 『소외』에 실린 서른다섯 편의 이야기 중 하나다. 겨우 다섯 쪽에 불과한 작은 이야기지만, 그 안에 담긴 감동의 크기는 결코 작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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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영자가 알립니다.
<이선희 PD의 책갈피> 연재를 시작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주홍색 수염을 기른 해적이 말했다.
“내가 첫 번째가 되고 싶소. 그게 다가 아니오. 시장, 이 진풍경을 더욱 흥미롭게 하기 위해 내가 당신에게 한 가지 거래를 제안하겠소.”
“말해 보아라” 시몬 폰 우트레히트가 명했다.
“내가 첫 번째가 되고 싶소. 나는 선 채로 참수형을 당하겠소. 그래서 내 머리가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후, 내가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내 부하들을 한 명씩 살려주시오.”
(…)
날카로운 칼날이 아침 공기를 가르며 해적의 목덜미로 들어가 턱수염이 있는 쪽으로 나왔다. 머리가 다리 기둥이 있는 곳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놀라서 지켜보는 가운데, 참수형을 당한 해적은 쓰러지기 전에 열두 발짝을 떼었다.

- 본문 중에서


주인공 클라우스 슈토르테베커는 해적 두목이었다. 일명 엘베 강의 해적. 그는 험상궂은 얼굴에 주홍색 수염을 기른 거대한 체구의 사나이였다. 때는 14세기 후반, 한자동맹이 활개 치던 중세 유럽. 당시 한자동맹은 무력으로 북대서양과 발트해의 상권을 장악한 거대 조직이었다. 이런 독점구조에는 자연히 횡포가 따르게 마련. 한자동맹은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고, 일방적으로 물건 가격을 결정했다. 그리고 수천 척에 달하는 배들을 지휘하는 한자 선장들은 조금만 잘못해도 모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런 부조리한 상황에 저항하며 봉기한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주홍 수염의 클라우스 슈토르테베커였다. 그가 이끄는 ‘생명력의 형제’들은 “인간은 행복을 누리기 위해 신의 선택을 받았고 행복만이 그 어느 고통도 참아 낼 수 있는 생명력을 준다.”라는 내용의 행동강령을 발표하고, 배 한 척을 차지해 자유 항해를 시작한다. 이후 이들의 행보는 홍길동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재물을 가득 실은 배를 공격해 엘베 강 주변의 가난한 주민들에게 고루 분배했고, 당시 가난한 사람들은 슈토르테베커와 ‘생명력의 형제’들을 축복처럼 기다렸다.

허균의 소설 속에서 홍길동은 율도국을 세우고 스스로 왕이 된다. 그러나 독일판 홍길동 슈토르테베커의 결말은 달랐다. 그는 결국 체포되고 만다. 1400년 어느 봄날 아침, 해적과 그의 부하 백여 명의 처형식이 ‘토이펠스브뤼케(악마의 다리)’에서 열렸다. 첫 처형자는 계급이 없는 말단 선원이어야 했다. 부하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이 슈토르테베커에게 내려진 형벌의 일부였다. 그러나 주홍 수염의 해적은 자신이 첫 번째가 되기를 자청한다. 앞에서 인용한 장면이다. 한 발짝, 두 발짝, 세 발짝…. 그는 모두 열두 발짝을 떼었고, 부하 열두 명의 목숨을 구했다.

「엘베 강의 해적」은 루이스 세풀베다의 단편집 『소외』에 실린 서른다섯 편의 이야기 중 하나다. 겨우 다섯 쪽에 불과한 작은 이야기지만, 그 안에 담긴 감동의 크기는 결코 작지 않다. 억압되고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죽음의 공포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 것인가. 마지막 순간까지 부하들을 조금이라도 더 살리기 위한 슈토르테베커의 필사적인 몸짓을 보면서, 순간 심장이 저려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짧지만 강렬한 무엇인가가 가슴을 관통한 것 같은, 그런 충격이었다. 가장 졸렬할 수 있는 것도, 가장 위대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저자인 루이스 세풀베다는 칠레 출신의 망명 작가다. 피노체트 독재정권에 반대해 투쟁하던 그는, 칠레의 많은 지식인들이 그러했듯이 목숨을 건지기 위해 기약 없는 망명길에 오른다. 2000년도에 발표된 단편집 『소외』는 제목 그대로, 소외되고 잊힌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세풀베다는 서문에서 독일의 한 유대인 수용소를 방문했던 경험에 대해 적고 있다. 수용소 한쪽 구석, 누군가 칼끝이나 못으로 아주 처절하게 새긴 글귀가 있었다. “나는 여기에 있었고, 아무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이 글귀를 새긴 사람이 누군지 아무도 모른다. 언제 쓴 것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떤 구체적 상황에서 어떤 심정으로 쓴 것인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신문이나 전기에 실리지 않은 소외된 목소리라는 것. 작가는 그 자리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결심한다. 세상의 그늘지고 구석진 곳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 그래서 잊히고 사라진 사람들의 이야기. 「엘베 강의 해적」은 독일 함부르크의 한 거리 이름에 얽힌 이야기다. 그 거리에는 시몬 폰 우트레히트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하지만 함부르크 시민 중 누구도 그 사람이 누군지, 왜 기억되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알려진 거라곤 거의 6백 년 전, 이곳의 시장이었던 시몬 폰 우트레히트가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기억과 구전 속에 전해 내려오는 한 남자의 처형을 명령했다는 것뿐. 처형된 남자는 바로 주홍 수염을 가진 해적 슈토르테베커였다.

사람들은 영웅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도 한다. 정말 그렇다. 거대담론이 지배하는 시대, 억압과 혼란의 시기에는 항상 영웅이 존재해 왔다. 그러나 그 모습이 항상 눈부신 것은 아니었다. 이문열은 소설 『영웅시대』에서 “안일한 성공의 영웅, 행복한 결말의 영웅은 동화의 주인공일 수는 있어도 참다운 영웅은 못 된다.”라고 썼다. 진정한 영웅의 모습은 화려한 껍데기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진정성과 남다른 용기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우리가 기억하는 이름보다 잊힌 이름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엘베 강의 해적」처럼 비극적 숙명을 짊어지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간 사람들. 익명으로 남은 영웅과 그를 처형한 시장. 세상은 엉뚱하게도 시장의 이름을 역사에 남겼다. 씁쓸하다. 안타깝다. 가슴이 아프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개인화되고 인간성이 파편화된 시대, 감동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600년도 더 전에 있었던 작은 사건이 여전히 생생한 감동을 던져주는 이유다.


삶이 짧고 허망한 건 확실하지만, 자존심과 용기가 삶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는 것 역시 확실하다. 생명력은 우리가 살면서 부딪히는 함정과 불행을 견딜 만하게 해준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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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

<루이스 세풀베다> 저/<권미선> 역7,920원(10% + 5%)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의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의 단편집.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각별한 추억, 잊혀진 것들에 대한 애정을 불러 일으키는 서른 다섯 편의 이야기를 담았다. 유대인 수용소, 아마존의 환경파괴 등 사회 불의에 맞서는 인간 존재의 존엄성을 그린 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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