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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고은의 시 <가을편지>를 김민기가 동명의 노래로 만들었다. 낙엽이 쌓이고, 흩어져, 마침내 사라져버리는 가을 동안의 설렘과 기다림과 쓸쓸함이 담겨 있다.
김민기가 굵은 저음을 건조한 기타 반주에 실어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라고 노래를 부르면, 그때서야 가을이 시작되는 듯하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 낙엽이 흩어진 날 / 헤매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 모든 것을 헤매인 마음 보내드려요 / 낙엽이 사라진 날 /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고은의 시 <가을편지>를 김민기가 동명의 노래로 만들었다. 낙엽이 쌓이고, 흩어져, 마침내 사라져버리는 가을 동안의 설렘과 기다림과 쓸쓸함이 담겨 있다. 그때의 설렘과 기다림과 쓸쓸함이란, 당연하게도 여자를 그리는 남자의 외로움이며, 남자를 기다리는 여자의 그리움이다. 혹은 그 반대라 해도 상관없다. 어쨌든 편지란 연인에게 쓰는 것이라는 편견이 나에게 있기 때문에, <가을편지>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외로운 사람의 '사랑 노래'로 다가온다.
<가을편지>도 그렇지만, 가을은 편지와 궁합이 잘 맞는 듯하다. 김광석의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나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 같은 노래에서의 궁합도 좋다. 가을이 편지와, 또는 편지가 가을과 어울려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다. 하지만 ‘아무 이유 없어’가 이상하게도 행복한 이들의 궁합을 더 그럴듯하게 한다. 가을이 풍기는 쓸쓸함이 누군가가 부재(不在)하기 때문에 쓰는 편지의 설렘과 날과 씨로 엮여 ‘연가戀歌’가 되는 것이다.
지금은 편지 쓰는 일이 아주 의식적인 일이 된 듯하다. 휴대전화와 메일의 등장 때문이다. 그래서 “가을엔 메일을 하겠어요.”나 “가을엔 전화를 하겠어요.”가 요즘 추세에 맞는 가사겠지만, 원래의 맛은 딱 사라지고 말 것이다. 메일은 한 글자 한 글자 써가면서 생각과 감정을 되새김하는 편지의 망설임을 담을 수 없다. 그것은 비즈니스에 가깝고, 그래서 딱딱하다. 한 이동통신사가 “전할 수 없는 마음까지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사람을 향합니다.”라고 광고하고 있지만, 실제로 휴대전화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가깝게 만들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사람과 사람의 기다림이 짧아졌지만, 기다림으로 오는 그리움의 ‘밀도’는 엷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디지털 감성보다 아날로그 감성이 더 좋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매체가 달라지니까 감정의 밀도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편지’라는 단어와 함께 떠오른 책은 작고한 평론가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다. 까닭은, 편지는 여자나 연인에게 쓰는 것이란 편견을 이 책에서 주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 앞에서 기억은 미아가 되어 버린다. 책장을 이리저리 넘겨 찾아봤지만 없었다. 드디어 편견은 미로 속에 영원히 갇혀버린 것이다. 낭패다.
그렇지만, 편지와 함께 『행복한 책읽기』를 떠올리는 것이 그렇게 빗나간 유추는 아니다. 이 책은 김현이 죽은 후에 출판된 까닭에,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편지, 그러니까 ‘유서’가 되어버렸다. 물론 그가 죽음을 의식하고 이 책을 쓴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출판을 염두에 두고 이 글을 꼼꼼히 정리했고, 죽음을 예감한 병상에 누워 그의 절친한 제자 이인성에게 맡겼을 때, 이 글은 그가 평생을 씨름했던 독자에게 띄운 마지막 편지가 되어 버렸다.
새벽에 형광등 밑에서 거울을 본다 수척하다 나는 놀란다
얼른 침대로 되돌아와 다시 눕는다
거울 속의 얼굴이 가득하다
두 배, 세 배, 방이 얼굴로 가득하다
나갈 길이 없다
일어날 수도 없고, 누워 있을 수도 없다
결사적으로 소리지른다 겨우 깨난다
아, 살아 있다
12월 12일자로 끝나는 그의 글의 마지막이다. 며칠 후 그는 “녹즙”이란 말을 끝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실, 모든 책은 작가가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줄 독자’에게 띄우는 편지다.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작가의 글을 읽는 독자는 작가의 긴 노동이 향하는 연인일 터이다. 아, 그러고 보니 나는 이 책을 그의 편지를 받고 어쩔 줄 몰라 하던 때, 그때 읽었던 것 같다. 책으로 둘러싸인 좁은 자취방에서 그의 편지를 되씹어 읽던 기억 때문에, 편지라는 단어 속에서 이 책이 머물고 있던 것인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통혁당 사건으로 무기수로 복역 중이던 신영복 선생이 20여 년 동안 선생의 계수씨와 형수님과 어머님과 아버님께 보낸 편지를 묶은 책이다. ‘검열필’이란 잉크 도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고 선생의 붓글씨로 제목을 편집한 이 책은,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선생의 눈부신 사유의 편린이 담겨 있다. 선생의 책을 읽던 때는 이런저런 이론을 들먹이며 금방이라도 세상이 변할 것처럼 조급증을 떨던 얼치기 ‘이데올로그’ 시절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턱없이 부족한 경험과 얄팍한 사고로 선생의 사유를 다 따라잡진 못해도, 얼치기 인생이 이리저리 치이며 좌충우돌할 때 가끔 선생의 글 가운데 몇 개가 떠올라 삶에 빨간 신호등이 되어주곤 한다.
가령, 선생의 유명한 여름 징역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고정적인 것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편협한가를 여전히 생각하게 한다. 사람을 미워하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감옥의 잠자리에서 여름 징역은 옆 사람을 단지 37도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하여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증오하게 만들곤 한다는 선생의 체험은, 항상 상대방이 처한 환경으로부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매번 새롭게 고민해야 한다는 깨우침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잊히지 않는 말.
“사랑은 분별이기 때문에 맹목적이지 않으며, 사랑은 희생이기 때문에 무한할 수도 없습니다.”
상처받은 후배의 예민한 감정을 이 말로 달래주며, 선생의 책을 권해주던 그 사람과의 소식은 끊어졌다. 이 말을 잊지 않고 살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분별 있는 사랑을 한 것도 아니다. 바닥을 걱정할 만큼 그렇게 사심 없이 사랑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아직도 이 말을 다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세월이란, 모든 것의 선생이라고 하지만 세월이 모든 것을 다 알려주진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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