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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하게 섹시하고 의외로 코믹한 뮤지컬 <시카고>

재즈의 농염함과 관능미, 의외의 재치가 있는, 섹시하고 코믹한 뮤지컬 <시카고>의 무대로 함께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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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에서 영화 그리고 뮤지컬로 모습을 바꿔가며 전 세계 극장가를 누비는 <시카고>가 또 한 번 국내 무대에 올랐다. 작품 자체에 대한 기대는 물론이고, 최정원, 배해선, 성기윤 등 굵직굵직한 배우들에, 뮤지컬 <아이다>로 신고식을 치른 옥주현의 가세로 시작 전부터 관심을 모았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오랜만에 뮤지컬다운 뮤지컬을 본 기분이다. 물론 오리지널 팀이나 영화에 비해 약하다는 평도 있지만, 그간 최정원의 겉도는 연기나 옥주현의 책 읽는 연기에 다소 실망했던 뮤지컬 팬이라면 이번에야말로 두 배우에게 큰 박수를 보내고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재즈의 농염함과 관능미, 의외의 재치가 있는, 섹시하고 코믹한 뮤지컬 <시카고>의 무대로 함께 가보자.


단순한 무대와 의상, 독특한 구성의 뮤지컬 <시카고>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오른 뮤지컬치고 이렇게 단순한 무대가 또 있을까? 무대 절반은 경사진 사각의 틀이 차지하고 있고, 그 안에는 오케스트라가 자리하고 있다. 배우들은 겨우 무대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데, 무대 전환이나 특별한 특수효과도 전혀 찾을 수 없다. 또한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비롯해 모든 배우의 의상은 블랙. 디자인에 차이가 있고, 가끔 흰색이 곁들여질 뿐 온통 검정 일색이다. 조명은 또 어떤가. 전체적으로 전구를 켤 때 보이는 황금빛 조명이 압도적이다. 화려하고 볼거리 많은 뮤지컬을 바라는 관객이라면 전환도 없는 무대며 상복 같은 의상, 침침한 조명에 비싼 티켓 값이 아까웠을 수도 있다. 게다가 죄를 짓고 감옥에 갇힌 죄수들이 연일 신문에 실리고 스타가 된다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이란….

그러나 이번 공연은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무대 디자인과 똑같이 제작된 것이다. 오케스트라 단장이 극 진행을 설명하는가 하면, 단순화된 세트와 상징적인 의상을 통해 재즈 선율, 연기자들의 춤과 노래의 극대화를 꾀하고 있다. 또한 뮤지컬 <시카고>에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1920년대 미국 사회와, 그 사회의 모순을 비꼬는 작품에 숨겨진 비판의식을 짚고 넘어가면 훨씬 수월하다. 뮤지컬 <시카고>는 이른바 ‘1전 신문(penny paper)'이라 불리며 당시 언론을 주도하던 싸구려 저널리즘에 대한 풍자와 미 형법제도의 모순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진실보다는 돈이나 외형을 중시하는 사회 풍조도 보란 듯이 꼬집는다.

옥주현의 눈부신 발전

뮤지컬 <아이다>에서 봤던 옥주현은 두말하면 잔소리인 뛰어난 가창력으로 큰 박수를 받았고, 늘씬한 팔다리로 몸매가 드러나는 무대의상까지 맵시 있게 소화해 내면서 깊은 부러움을 자아냈다. 그러나 결정적인 아쉬움이 있었으니, 바로 어색하고 투박한 연기였다. 부자연스러운 움직임과 시선 처리, 알아듣기 힘든 숱한 저음의 대사들. 그런 그녀가 이번에 <시카고>의 록시 하트 역에 배해선과 더블 캐스팅됐다. 처음이야 ‘처음이니까’라는 면죄부가 적용되지만, 두 번째는 ‘뮤지컬 배우로 살아남느냐’의 문제일 터. 이에 옥주현은 베테랑 배우 전수경에게 특별 연기지도까지 받으며 각고의 노력을 보였고, 다행히 누가 봐도 인정할 만큼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

연습실에서. 옥주현의 연기가 많이 늘었다.

섹시하면서도 귀엽고, 영악하면서도 어리석은 록시 하트. 검은색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쉴 새 없이 뛰어다니면서 춤추고 노래하는 록시 역에 옥주현은 안성맞춤이었다. 무대에서 노는 모습이 훨씬 편해졌고, 관능적이면서도 푼수 같은 연기도 제법 천연덕스럽게 처리한다. 무엇보다 목소리의 톤이 높아져서 한층 듣기 편한데, 일정 부분을 길게 늘이는 말투나 코맹맹이 소리, 엇박자의 몸짓에서는 언뜻언뜻 전수경이 보이는 듯하다. <아이다>에서처럼 힘 있게 가창력을 드러낼 무대는 없었지만, 농익은 재즈 보컬에서는 가수로서의 매력도 유감없이 뽐낸다. ‘정말 많이 늘었다.’ 그녀의 노력에 뿌듯한 박수로 답한다.

드디어 최정원, 역시 성기윤

숱한 작품에 출연하며 웬만한 뮤지컬 관련 상은 다 받은 최정원.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무대를 보며 여태 큰 감동을 받아본 적이 없다. 연기 자체는 잘하는데, 왠지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착 달라붙지 않은 모습이랄까. 그런데 <시카고>에서 드디어 최정원의 진가를 보았다. 보드빌(춤과 노래를 곁들인 풍자적인 희곡) 배우인 벨마 켈리 역의 최정원은 끈적끈적한 춤과 노래, 도발적인 몸짓, 거만하고 도도하다 이내 기세가 꺾여 꽁지를 내리는 코믹한 연기를 참으로 능수능란하게 펼쳐 보인다. 마지막에 록시와 함께 쇼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옥주현의 긴 팔다리를 뒤로한 채 반짝반짝 빛나던 최정원의 몸짓을 보며, 뮤지컬 배우로서의 관록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뮤지컬 배우의 관록을 보여준 최정원

무대마다 입지를 더욱 굳게 다지고 있는 성기윤은 <시카고>에서도 역시 돋보였다. 뛰어난 언변과 쇼맨십으로 죄수들을 석방하는 변호사 빌리 플린 역을 맡았는데, 신사다우면서도 비열한 역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무엇보다 쩌렁쩌렁 우렁찬 그의 성량과 큼지막한 제스처는 때때로 지루함을 주는 무대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관객의 눈과 귀를 쏙 끌어당긴다. 한없이 선량하고 믿음직스럽게 들리다가도, 대번에 야비하고 치졸하게 변하는 그의 음색은 연기자로서는 신이 내린 큰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오랜만에 만나는 흡족한 무대, 뮤지컬 <시카고>

오리지널 팀의 내한공연에 흥미를 잃는 관객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무대 연출이나 춤과 노래, 이렇게 눈으로 보이는 부분은 분명히 뛰어나지만, 언어를 비롯해 어떤 괴리감이 느껴진다는 얘기다. 국내 무대에 오르는 수많은 창작뮤지컬에도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관객도 있다. 흥행에 성공하자면 대부분 로맨틱 코미디 물이고, 한걸음 나아가 좀 더 비틀면 창작자의 의도를 가늠할 수 없게 되니 말이다. 그래서 풍요 속의 빈곤이라고, 작품은 많은데 특별히 구미에 당기는 무대가 없을 정도다.

그런 마당에 <시카고>는 세계 흥행 뮤지컬이라는 탄탄한 베이스를 깔고(게다가 우리 식으로 잘 버무렸다), 독특한 구성과 무대 연출, 내로라할 배우들의 멋진 연기로, 뮤지컬 팬들의 오랜 갈증에 시원한 청량제가 됐다. 현대 사회에 맞는 재밌는 작품이 아니라, 과거 뮤지컬의 독특한 멋을 맛보고 싶은 관객이라면 흡족한 마음으로 공연장을 나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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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시카고>

2007년 9월 18일 ~ 9월 30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2007년 10월 7일 ~ 10월 14일
대구시민회관 대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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