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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 아주 잠깐 우리 곁에 머물렀던, 기억

그토록 바라던 해방은 되었으나, 남북한 어디에서도 환영 받지 못한 사회주의 혁명가 김삼룡의 이 말은 역사로부터 선택받지 못한, 혹은 역사로부터 배신을 당한 자의 허무감이 짙게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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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소설 『파업』의 작가 안재성이 쓴 『경성 트로이카』에는 역사로부터 선택받지 못한 혁명가의 슬픔이 곳곳에 배어 있다. 『경성 트로이카』는 1930년대 경성에서 활동했던 사회주의 혁명가들을 소설로 옮긴 것이다. ‘모던 보이’와 ‘모던 걸’로 북적이는 경성 거리를 유유히, 그리고 일제의 눈을 피해 잠행하던 이재유, 김삼룡, 이현상, 이관술 같은 혁명가들을 만날 수 있다. 안재성은 소설의 상상력을 빌려, 해방 후 남로당 총책임자로 활동하였던 김삼룡이 자신을 심문하는 경찰 간부에게 털어놓는 회한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일정 때 우리가 놈들의 힘을 빼앗으려고 싸우는 동안 당신들은 자신들의 힘을 키웠소. 우리가 학업과 생업을 포기하고 공장과 감옥을 떠도는 동안 당신들은 국가를 운영할 기술을 배우고 사람 고용할 돈을 모았소. 일제가 물러나고 보니 우리 같은 사람은 쓸모가 없고 당신 같은 사람들이 이 나라를 지배하는구려. 참 허무한 일이요. 허무한 일이요.” (『경성 트로이카』 중에서)

그토록 바라던 해방은 되었으나, 남북한 어디에서도 환영 받지 못한 사회주의 혁명가 김삼룡의 이 말은 역사로부터 선택받지 못한, 혹은 역사로부터 배신을 당한 자의 허무감이 짙게 배어 있다.

김삼룡 등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에게 해방 후 한국 현대사는 무엇이었을까. 고문받는 자보다 고문한 자를 선택한, 배신의 역사였을 것이다.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은 남쪽에서 활동하였던 사회주의 혁명가들을 적대시하였다. 남한은 친미파로 돌변한 친일파가 여전히 경찰과 관료로 있으면서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했던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하였다. 쫓기듯 지하로 들어간 그와 빨치산 총대장이 되어 지리산에 들어간 이현상 같은 이들로서는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역사의 흐름 앞에서 그는 무엇을 느꼈을까. 이념의 허망함이었을까. 그러나 자신의 사상을 되돌리기에도 너무 먼 길을 달려왔을 터이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느꼈을 것은, 철들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한눈팔지 않고 민중을 위하고 민족을 위하여 살아온 생의 무기력함, 한때 그의 자부심의 전부였던 그 생 전체가 한꺼번에 허물어지는 허망함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의 생은, 앞으로도 쉽게 복원되지 않을 것이다. 안재성이 일제시대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삶을 소설로서 되살렸다고는 하나, 역사의 선택을 받지 못한 까닭에 한국 현대사 저 깊숙한 망각의 감옥 안에 갇힌, 실패한 혁명가들을 기억 속으로 불러오기는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2>
리영희는 1980년대 혁명을 꿈꾸었던 젊은이들에게 사상적 지표였다. 『전환시대의 논리』『우상과 이성』 등을 통해 자본주의와 반공독재체제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던 대표적인 반정부 지식인이었다. 리영희에게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는 평생의 신념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것인 듯했다. 그는 사회주의의 패배를 인정하면서 “세계가 30% 정도의 타락과 60% 정도의 도덕성, 인간성을 유지하면 성공이라고 보아야” 한다며 이기적 동물로서의 인간의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했다.

리영희가 던진 고백은 충격적이었다. 1980년대 혁명을 꿈꾸던 사람들이 가슴 맨 밑바닥에 품고 있던 신념에 대해 그가 문제제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휴머니즘이었다. 유시민의 「항소이유서」가 표현하듯, 1980년대의 운동은 시대의 불의에 맞선 정의감과 민중에 대한 사랑, 미안함 등에서 시작한 까닭이다.

빛나는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 설레던 열아홉 살의 소년이 7년이 지난 지금 용서받을 수 없는 폭력배처럼 비난받게 된 것은 결코 온순한 소년이 포악한 청년으로 성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가 가장 온순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를 만들어 내는 부정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이 성스러운 날에 인간 해방을 위한 투쟁에 몸 바치고 가신 숱한 넋들을 기리면서 작으나마 정성들여 적은 이 글이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것을 기원해 봅니다. 모순투성이이기 때문에 더욱더 내 나라를 사랑하는 본 피고인은 불의가 횡행하는 시대라면 언제 어디서나 타당한 격언인 네크라소프의 시구로 이 보잘것없는 독백을 마치고자 합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유시민의 「항소이유서」 중에서)

누구나 말하듯 1980년대는 가장 평범한 청년들을 열렬한 투사로, 그 투사들을 혁명가로 만들었다. 그들 중 누군가가 사회주의를 가슴에 품었다면, 그것은 이념 때문이 아니라 학살자가 ‘정의 사회 구현’을 말하는, 가치가 전도된 사회 전체를 부정하는 과정에서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 누군가가 맑스를 탐독하였다면, 그것은 맑스 이론의 과학성 때문이 아니라 맑스가 말하는 유토피아가 미래로서 지향할 만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에게 다시, 감옥 가고, 고문받고, 미래마저 희생해야 하는 일을 왜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때 그들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 그때에 그들의 대답은 사회주의도 맑스도 아니고, 그저 ‘더불어 같이 잘 살고픈 인간 사랑’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 혁명가들은 분명히 레닌 동상이 땅에 처박히는 장면과, 사회주의가 젖과 꿀이 흐르는 유토피아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말 못 할 충격을 받았겠지만, 더불어 살고자 하는 인간의 사회적 본성이 남보다 더 많이 가지려는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이길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 더 큰 낭패고 슬픔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사회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달려가는 개인으로 꽉 차 있음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후, 그들은 ‘도대체 인간은 더불어 같이 사는 사회적 본성이 있기나 한 것일까’라는 의문마저 들었을지 모른다.

사회주의 붕괴로 그들이 받은 충격은 1980년대가 꿈꾸었던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의 허물어짐과도 닿아있다. 광주에 적을 둔 출판사 ‘남풍’이 1989년에 출간한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는 1980년대 혁명을 꿈꾸었던 이들이 어떻게 자신을 단련하고자 했는지를 알게 해주는 책이다. 이 책은 러시아 ‘차르’ 체제를 타도하기 위해 활동했던 혁명적 낭만주의자 체르니세프스키가 감옥에서 쓴 소설이다. 인간관계의 이상적인 모습과, 특별한 인간들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이끈 레닌이 가슴에 품고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고, 그 영향으로 같은 제목의 정치 팸플릿까지 썼을 정도였다. 전투적 민중시인 김남주도 감명을 받은 듯 긴 독후감을 후기로 남겼다. 김남주가 특별히 주목했던, 가장 ‘특별한 인간’은 ‘라흐메토프’였다.

우리들은 사람들이 생활을 충분히 향수하게 되기를 요구한다. 우리들이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개인적 욕망의 만족을 위해서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도 아니고 인류 전체를 위해서라는 것, 이것은 틀림없는 원칙의 문제이고 개인적인 욕망이 아니라 확신에 기초한 것이라는 것, 이것을 우리들은 자기 자신의 생활로써 실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할 것인가』 중에서)

그래서 라흐메토프는 항상 민중을 중심에 두고 사고하였고, 행동의 기준도 ‘민중을 위하여’였다. 그는 고문에 대비해서 못을 박은 침대에 누워 고통의 극한을 체험했다. 민중의 삶을 이해하고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농부, 목수, 뱃사공의 일을 배우는 것에 열심이었다. 혁명과 관계없는 것에 일분일초도 낭비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감성보다는 이성으로 삶을 통제하고, 자신에게는 엄격하나 타인에게는 관대하였다.

김남주가 그린 ‘전사’의 모습도 이와 같았다.

일상생활에서 그는 / 조용한 사람이었다 / 이름 빛내지 않았고 모양 꾸며 / 얼굴 내밀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 시간엄수가 규율엄수의 초보임을 알고 / 일분일초를 어기지 않았다 / 그리고 동지 위하기를 제 몸같이 하면서도 /비판과 자기비판을 철두철미했으며 / 결코 비판의 무기를 동지 공격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 조직생활에서 그는 사생활을 희생시켰다/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모든 일을 기꺼이 해냈다 /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궂은 일이건 가리지 쪾았다 / 그리고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 먼저 질서와 체계를 세워 / 침착 기민하게 처리해 나갔으며 / 꿈속에서도 모두의 미래를 위해 / 투사적 검토로 전략과 전술을 걱정했다

이윽고 공격의 때는 와 / 진격의 나팔소리 드높아지고 / 그가 무장하고 일어서면 / 바위로 험한 산과 같았다 / 적을 향한 증오의 화살은/ 독수리의 발톱과 사자의 이빨을 닮았다 / 그리고 하나의 전투가 끝나면 / 또 다른 전투의 준비에 착수했으며/ 그때마다 그는 혁명가로서 자기 자신을 잊은 적이 없었다. (「전사 1」)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라흐메토프’나 김남주의 ‘전사’는 세상을 적과 동지의 이분법적 틀로만 바라보고 있어 편협하게 보인다. 너무 고지식하고, 원칙적이어서, 비현실적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편협하고, 비현실적으로 비치는 바로 이 모습이야말로 1980년대 혁명을 꿈꾸었던 이들이 찾아내고, 그리고 기어이 도달하고자 노력했던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 바로 혁명가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이런 모습으로 자신을 단련하고자 했던 것은, 혁명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모래성처럼, 1980년대와 함께, 사회주의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3>
한국사회에서 공동체의 꿈을 모색했던 마지막 시기를 찾는다면, 그것은 1980년대가 될 것이다. 남은 것은 그것에 대한 희미한 기억뿐이다. 시간 앞에서 모든 것은 무디어져, 앞으로 그런 자위도 속절없어질 것이다. 지금, 우리가 혁명을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고, 그것을 추억으로든 아니면 여전히 버리지 못한 이념으로든 스스럼없이 쓰다듬을 수 있는 곳은 헌책방이다. 혁명의 시대는 끝났고, 더 이상 그때를 기억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유행이 끝나고, 소장할 가치가 사라진 책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곳, 그곳 헌책방에서, 한때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구속이 되었던 그 책들에 갇혀버린 혁명은 세월만큼 쌓인 먼지를 뒤집어쓰며 이젠 현실 대신 망각과 투쟁하고 있다. 그러나 알 것이다. 그것들은 다시 살아나지 못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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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트로이카
안재성 저 | 사회평론 | 2004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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