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형범이의 행복한 책읽기
천상병을 말하다
천상병 시인과 아버지
조금이라도 자신의 생각과 틀어지면 세상에 욕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가족에게, 사회에, 배경에 불평하곤 합니다. 우리가 행복을 우리 밖에서 찾는 것과는 반대로, 시인은 자기 자신에게 행복을 물었습니다.
책을 가까이 두십니다. 흘러가는 세월에 잠도 같이 많아지셔서인지, 책 펴놓고 잠드시기가 일쑤지만 여전히 책을 가까이 두십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을까요. 친구들 불러 모아 넓지도 않은 아파트를 운동장처럼 뛰어놀던 시절에도 그러셨습니다. 방 세 개. 작은 집 여기저기를 천방지축으로 어지럽히고 놀았지만, 책이 많았던 아빠 방엔 잘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들어오지 말라고 따로 말씀하셨던 것은 아니지만, 책이 많은 방은 아빠를 닮아 조용했고, 신나게 떠들고 놀다가도 그 방에만 들어서면 왠지 저도 모르게 조용히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햇빛이 조용히 창문 틈새로 스미고, 바람도 가만히 나뭇잎만 스쳐 지나가는 날들이면 언제나 책 한 권 펴고 자리에 앉아 계시고는 했습니다. 그런 날들처럼, 조용하고 깊은 분이십니다. 평소 부모님께 말도 많이 하고, 장난도 많이 치는 편이었지만 책을 읽고 계실 때는 왠지 어려웠습니다. 의자 다리 옆에 앉아, 무얼 보시는지 여쭈어보기는 했었지만, 온통 모르는 것투성이였습니다. 그러다가 지레 시들해져 의자 다리에 기대 잠들곤 했던 기억도 납니다.
시를 자주 읽으셨습니다. 가끔 옆에 기대앉은 제게 읽어주시기도 했지요. 김소월, 천상병, 서정주, 윤동주……. 시를 조금이나마 즐겨 읽는 것은, 어렸을 적 아빠가 들려주신 시들 덕분이 아닌가 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자주 읽으시던, 좋아하셨던 시는 천상병 시인의 작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살짝살짝 뒤에서 엿보던 책에는 그의 이름이 자주 보였고, 아빠는 그 사람의 시를 어린 제게 자주 읽어주시기도 했습니다.
『천상병을 말하다』. 저는 아빠가 좋아하시던 시인이 어떻게 말해지는지 궁금했습니다. 시인의 주변 사람들이 그의 삶을 기려 기억을 적어둔 책이었습니다. 책장을 넘기면서, 저는 시인과, 그가 보았던 세상을 조금은 엿볼 수 있었습니다.
1993년 4월 28일, 시인은 하늘로 돌아갔습니다. 잠시 지상으로 왔던 소풍을 마치고 말이지요. 그의 몸은 오래전에 겪었던 옥고로 이미 많이 허약해진 상태였습니다. 그가 옮겨왔던 발걸음들을 돌아보면서, 저는 그가 겪었을 그 모든 고통들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단지 같이 술자리를 몇 번 했던 사람의 수첩에서 시인의 이름이 나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시인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3개월, 그리고 교도소에서 3개월 동안 갖은 고문과 취조를 받았습니다.
이젠 몇 년이었는가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당한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무서운 집 뒷 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네 살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시인의 시, ‘그날은-새’ 중의 일부입니다.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라는 표현에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몇 번에 걸쳐 받았던 전기고문에, 시인은 자식도 가질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당했던 온갖 비합리적이고 온당하지 못한 처사에 관련 없는 저조차도 화가 치밀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세상에게 그는 물질로도 보상받지 못했습니다. 빈한한 삶이었습니다. 어려운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행복’이라는 시에서 그는 그렇게 적었습니다. 세상에 한 맺힌 울음만을 토해내도 부족할 거라고 생각했던, 그래서 설움과 고통만으로 가득 차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시구는 마치 성경처럼 담담했습니다. 담담함을 넘어,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생각과 틀어지면 세상에 욕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하듯 말하지만, 돌아보면 저부터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족에게, 사회에, 배경에 불평하곤 합니다. 우리가 행복을 우리 밖에서 찾는 것과는 반대로, 시인은 자기 자신에게 행복을 물었습니다.
“나는 볼품없이 가난하지만 / 인간의 삶에는 부족하지 않다. / (…) / 다만, 하늘에 감사할 뿐이다”라고, 시인은 시 ‘행복’에서 말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무엇 하나 받은 것 없는, 받기보다 빼앗기기만 한 그가 하늘에 감사한다고 말하는 모습에 저는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진정으로 “행복”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 밖이 아닌 안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난 뒤부터 늦게 귀가하게 되어서 아빠가 읽어주시는 시들을 많이 듣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요즘도 가끔 밤늦도록 책을 펴고 계신 모습을 보면 그날들과 함께, 제가 들었던 많은 시와 시인들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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