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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국토에서 피어난 역사기행 - 한길역사기행 ②

1986년 5월, 연휴를 맞아 2박 3일에 걸쳐 진행한 지리산 역사기행은 한길역사기행의 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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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고단에서 멀리 섬진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일행 ⓒ 한길사

아, 지리산의 역사와 사상이여

1986년 5월, 연휴를 맞아 2박 3일에 걸쳐 진행한 지리산 역사기행은 한길역사기행의 절정이었다. 강의와 토론, 등산을 통해 지리산으로 상징되는 국토의 위대함과 그 역사의 뿌리와 정신의 깊고 아름다움을 확인하는, 가히 역사적인 역사기행이었다.

우리는 ‘지리산과 민족사’라는 방대한 주제를 내걸었다. 박현채·이이화·송기숙·박태순 씨가 강의와 안내를 맡았다. 아마도 1985년 5월의 지리산 역사기행에서 강의되고 토론된 내용은 지리산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확대하고 지리산을 보는 문제의식을 심화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고 할 것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피로 물든 이데올로기의 갈등사로서뿐 아니라 지리산은 사실 훨씬 넓고 깊고 방대한 우리 민족사의 근거가 되는 것이었다. 피아골에서 진행된 강사들의 본격적인 강의와 토론을 통해, ‘아! 지리산이 이렇게도 엄청나구나’ 하는 놀라움을 참여자들은 누를 길 없었다.

1980년대에 지리산은 이 땅의 의식 있는 사람들에겐 하나의 성지 또는 당위였다. 지리산을 오르는 것은 반드시 치러야 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산에의 순수를 추구하는 등산객들에겐 역시 산은 지리산이었을 터이지만, 오늘의 민족사적 상황을 고뇌하는 지식인들에게 지리산은 사상과 정신의 근거 같은 것이었다.

내가 지리산 역사기행을 기획할 때 우리 출판사를 담당하고 있던 형사가 물어왔다. 왜 지리산에 가느냐고. 지리산이 아름답기 때문에 우리는 지리산을 간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는 그 많은 산들 가운데 왜 하필 지리산에 가느냐고 다시 물었다. 지리산이 제일 큰 산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다시 대답했다. 문공부의 한 관리도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왜 하필 지리산을 가느냐고.

지리산에서 우리 민족사의 모든 것을 토론해 볼 수 있다는 생각을 나는 하고 있었다. 저 아름답고 큰 지리산은 그 어떤 토론도 용납할 것이라는 생각을 나는 하고 있었다. 우리의 고대사와 고대사상사, 중세·근대사와 그 정신사·사상사는 물론이고 현대사의 비극을 성찰해보는 가장 좋은 공간 또는 역사의 무대가 아닌가 말이다.

우리의 이런 기획의도는 사람들에게 이심전심으로 받아들여졌을까. 버스는 어느새 만석이었고 지방에서도 몰려들었다. 그 피아골 산장에서 우리는 밤을 지새우면서 민족사의 빛과 그림자를 토론했다. 지리산의 장대함과 그 정기로 사람들을 잠들 수 없었을 것이다. 지리산에서의 2박 3일은 그 역사와 인문지리와 정신과 사상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학습하는 경이로운 국토인식운동이었다. 피아골 산장에서 일행들은 하나가 되어 밤을 새우면서 강의하고 토론했지만 지치지 않았다.

이튿날 새벽 4시에 기상하여 화엄사 대웅전 앞에 집결했다. 노고단을 오르는 것이었다. 노고단에서 바라보는 지리산의 장엄함이란 참으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리산을 오르는 것을 생의 당위로 여기는 것이다. 피아골 계곡을 내려오면서도 지리산의 깊음을 새삼 실감했다. 일행이 다시 피아골 산장에 모였을 때는 밤 9시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다시 강의와 토론을 멈추지 않았다.

첫 날 밤과 이튿날 밤의 이이화·박현채 두 강사의 강의는 아마도 그때까지 접하지 못한 본격적인 지리산론이었다. 두 강사는 치밀한 준비로 우리 역사에서 지리산이란 무엇이었고 그 정신사·사상사는 어떤 것이었는가를 열강했는데, 이런 강의는 어떤 대학원 강의에서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이화 선생의 ‘지리산의 정신사와 저항사’는 실로 실증적이면서 지리산의 역사와 정신을 새롭게 인식시키는 내용이었다. 지리산이 역사에서 어떻게 이해되었는가를, 또 어떤 역사가 지리산에서 이루어졌는가를 찬찬히 설명하는 강의였다.

광해군 때에 남원부사를 한때 지낸 유몽인(柳蒙寅)이 그의 책 『어우집(於于集)』에서 금강산은 뼈다귀가 많으면서 고기가 적고, 지리산은 고기가 많으면서 뼈다귀가 적다고 한 기행문을 소개하면서 이이화 선생은 금강산은 지자(知者)와 이지의 산이고, 지리산은 인자(仁者)와 덕성의 산이라고 말했다. 다섯 번째 지리산을 찾았다는 그는 지금까지 지리산을 언저리만 맴돌며 역사의 꿈속을 헤매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 긴 화엄사 골짜기와 노고단, 피아골의 깊은 계곡을 오르고 내리며 어머니를 연상했다고 했다.

“나를 포근히 감싸주고 나에게 자양분을 날라다 주시던 우리 어머니, 그야말로 유몽인의 ‘다육소골’(多肉少骨)이라는 표현에 나는 흔쾌히 동의한다. 이렇게 먹을 것이 있는 곳, 몸을 감싸주는 곳이기에 지리산은 인간과 너무나 친밀한 산이었다. 그러나 이런 덕성 속에 비극이 흐르고 있었다. 천 년 만 년 우리 겨레와 함께 숨쉬면서 안식처가 되기도 했지만, 피가 튀기고 살림이 찢기는 비밀을 그는 알고 있으리라.”

석주관, 섬진강이 붉게 물들었다

▲ 녹우당에서 걸어나오는 박석무, 박태순 선생 ⓒ 한길사

지리산은 무속의 고향이었다. 지리산은 화랑의 터전이었다. 지리산은 또한 도가의 이상향이었다. 지리산은 불교와 유교의 한 근거였다. 지리산은 민족사적 저항의 근거였다. 의병의 고향이었다. 또한 지리산은 민중적 운동과 세력의 집결지였다. 화적의 거점이었다. 8·15와 6·25 와중에서 빨치산의 아지트가 되었다. 그들이 토벌되는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었다.

박현채 선생의 강의 ‘지리산과 민족운동사’는 한 사회경제사학자의 역사인식·자연인식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지리산의 민족사적 위치를 본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산이 갖는 의미를 본다는 것”이라면서 시작된 그의 ‘특강’은 하나의 비장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산의 사회경제사적 인식, 우리 역사에서 시대적 상황에 따른 지리산의 의미를 구체적 사료로 제시했다.

“산의 모성은 내일의 창조를 준비하게 한다. 민족과 민중의 에너지는 때로는 민족과 민중의 한이 되기도 한다. 산은 우리 밖에 있지 않고 우리 속에, 우리들 그 자체로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지리산 역사기행은 늘 그렇듯이 밤에는 강의·토론하고, 낮에는 우리 역사·우리 국토를 발로 걷는 것이었다. 박현채·이이화 선생은 답사의 길잡이로 열강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일찍이 지리산을 발견하고 있던 『국토와 민중』의 소설가 박태순은 탁월한 길잡이였다. 고은 시인이 역시 동행하여 비수 같은 감성과 언어로 지리산을 통찰했다.

한말 조국이 망해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순국한 매천 황현의 사당에 들러 우리 일행은 묵념을 올렸다. 정유재란 때 왜병과 항쟁하다 3,500명의 의병과 150여명의 승병이 숨진 석주관 전투의 처절함에 우리는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국토가 너무 아름다워서인가. 이렇게 장렬한 역사가 진행되다니.

석주관은 지리산의 한 봉우리인 왕실봉 줄기 아래, 섬진강가에 있는 관문이었다. 곧 경상도와 전라도, 백제와 신라를 가르던 곳으로 지난날에는 석주성이 있었고 조선조 때는 나루가 있었던 곳이다. 진주성을 함락한 왜군은 섬진강을 따라 남원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병들은 밀리고 밀고 하다가 결국은 왜병의 보급료를 끊는 항쟁을 펼쳤는데, 이 석주관 전투에서 엄청난 희생이 있었다.

그때 우리가 찾은 석주관 터에는 의병에 참여하다 숨진 일곱 선비의 초라한 무덤이 있을 뿐이었다. 그 옆에 세워놓은 자그마한 비석에는 “피가 강물이 되어 푸른 강물이 붉게 물들었다”(血流成川 爲碧爲赤)고 기록해 놓았다. 그 이후에 나는 이 일대를 지나면 반드시 일행을 이끌고 이곳 석주관을 들르곤 했다.

아름다운 섬진강은 여전히 아름답게 흘러내린다. 지금은 ‘성역화’해서 석주관의 흔적이 제법 그럴듯해졌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아름다운 국토에서 전개된 역사와 그 사상과 정신을 오늘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고 구현하느냐일 것이다. 구례에서 하동으로 넘어가다보면 왼쪽 언덕 위에 있는 그 무덤들과 돌비석에 새겨둔 선연한 역사의 자취를 체험해야 한다고 나는 이야기하는 것이다.

조성기의 ‘황홀한 슬픔-지리산’

▲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길 ⓒ 한길사

지리산 역사기행에 참여한 소설가 조성기 씨는 <중앙일보> 1986년 5월 12일자에 ‘황홀한 슬픔-지리산: 한길역사기행에 다녀와서’라는 제목의 글을 남겼다.

“과연 거기에는 죽은 영혼들에게도 젖줄을 대어주고 있는 듯한 어머니 젖꼭지 모양의 돌제단이 봉곳이 쌓여져 있었다. 지기 시작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피기 시작하는 진달래 무더기 너머로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굽이굽이 산자락, 계곡물, 섬진강 줄기, 구름바다, 간간이 들려오는 새소리, 자그마한 동네들… 그 풍경들이 자아내는 황홀한 슬픔. 그렇다, 그것은 황홀한 슬픔이었다.

무넹기 노고단에 우뚝 서서 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나는 신라시대 김유신 부대의 화랑이었고, 이성계를 거부한 백록동 그 고려 스무 충신 중의 하나였고,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를 따르던 승병이었고, 구한말에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 싸우던 고광순 휘하의 의병이었고, 그리고 눈에 핏발이 선 산도적이었고 피난민이었고 징병기피자였고 빨치산이었고 토벌꾼이었다.

그런 생각들이 들자 나의 황홀은 그만 슬픈 황홀이 되었고 급기야 그 모든 것은 황홀한 슬픔이 되었다. 그와 같은 감정은 공기마저 연초록빛인 듯한 32킬로미터의 숲무더기 피아골로 내려서면서 더욱 짙어졌다. 일행 중의 한사람인 숙희라는 이름의 직장 아가씨는 피아골에 대해 설명해준 송기숙·이이화·박현채 교수들의 여관방 강의를 상기해서인지 말을 지어내어 나직이 중얼거렸다.

‘피(稗)를 심어 피를 먹고 살다가 피(血)를 흘린 우리 조상들의 골짜기!’

그 피가 삼홍소까지 흘러 내려와서 봄이면 진달래·철쭉으로, 가을이면 단풍으로 면면이 피어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전에는 피(稗)밭으로 경작되었을 논배미들이 산기슭을 타고 층층이 쌓여져 있는 그 생존으로 향한 몸부림, 아니 역사로 향한 그 민중의 끈기와 뚝심을 흘끗흘끗 쳐다보면서 왜 지리산을, 왜 이번 역사기행이 지리산으로 이어졌는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42회까지 진행된 한길역사기행

우리의 역사기행은 왜 오늘 우리가 역사를 탐험해야 하는가의 당위를 각인시키는 교육공간이었다. 유구한 역사를 안고 있는 우리 국토는 온통 역사의 현장이었다. 저 마라도로부터 휴전선으로 가로막힌 강원도 북단 고성까지의 국토 구석구석을 답사하는 역사기행을 통해 우리는 민족사의 빛과 그림자를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우리의 역사기행은 역사강좌와 더불어 새로운 문화프로그램, 문화운동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늘 참여함으로서 친구가 되는 그룹이 형성되기도 했다. 1980년대라는 그 엄혹한 시대에 역사강좌는 역사를 오늘의 시점에서 새롭게 살펴보는 창구가 되었고 역사기행은 역사와 국토의 현장에서 심호흡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우리의 역사는 참으로 찬란했고 그 역사의 무대에서 우리는 감동했다. 지리산 이후에 진행된 역사기행은 다음과 같았다.

▲ 송기숙, 박석무, 박태순 선생이 한반도의 맨끝 마을에 함께 섰다 ⓒ 한길사

제8회 한길역사기행 : 86년 6월 ‘백제문화의 원류를 찾아서’를 주제로 부여·공주·익산 미륵사지·공주 우금치고개 등을 답사. 이이화 선생과 부여문화원 이석호 원장이 강의와 가이드, 소설가 이문구 씨가 충청도론과 그 풍속과 역사를 특강.

제9회 한길역사기행 : 86년 7월 ‘경주 남산의 불교문화’를 주제로 하여 경주의 향토사학자 윤경렬 씨와 한옥전문가 신영훈 씨가 강의와 가이드. 남산 뿐 아니라 황룡사지 등 신라문화를 다시 보았다.

제10회 한길역사기행 : 86년 8월 ‘서원의 문화와 조선조 유학사상’을 주제로 하여 함양·산청·진주 일대의 청계서원·남계서원·덕천서원을 답사. 고려대 김충렬 교수가 남명 조식의 정신과 사상에 대해 특강하고 경상대 철학과 오이환 교수가 가이드.

제11회 한길역사기행 : 86년 9월 ‘동해안 의병의 근거지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경북 영덕·영해지방 답사. 임진왜란 때부터 구한말까지 의병봉기의 고장으로 이름난 영덕지방과 3·1운동 당시 가장 큰 규모의 만세운동을 펼쳤던 영해지방과 한말의병장 신돌석 장군의 생가 답사. 이이화 선생이 강의.

제12회 한길역사기행 : 86년 10월 ‘한국불교문화의 재인식’을 주제로 가야산과 해인사를 체험. 여연 스님으로부터 해인사의 역사와 문화와 사상에 대해 강의 듣고 여러 암자와 팔만대장경, 최치원의 유적 답사.

제13회 한길역사기행 : 86년 ‘일제시대 민족주의자들의 생가를 찾아서’를 주제로 충남 내포지방을 답사. 윤봉길 의사의 생가, 김좌진 장군의 생가터, 심웈 선생의 고택인 필경사, 추사 김정희 선생의 고택을 살피면서 한말 이후 민족운동의 맥락을 공부. 고려대 사학과 강만길 교수가 한말과 일제식민지하의 독립운동을 강의.

제14회 한길역사기행 : 86년 12월 ‘미륵사상’을 주제로 금산사·선운사·운주사를 답사. 고은·송기숙 선생이 미륵사상을 강의했고, 박석무 선생의 안내로 무등산 일대를 돌면서 정철·송순 등의 유적지 살펴보았다.

한 권의 책 <한길역사기행>

1986년 12월에는 무크지 <한길역사기행>을 간행했다. 그동안 한길역사기행에서 한 주제 강의들이 수록되었다. ‘길의 역사 길의 사상’(최영준), ‘지리산의 정신사와 저항사’(이이화), ‘지리산과 민족운동사’(박현채), ‘정선아라리의 고개를 넘는다’(고은), ‘남한강 뱃길천리’(신경림), ‘호남평야 동학농민혁명군의 함성’(박태순), ‘해남·강진의 유배지 문화’(박석무), ‘백제는 살아 숨쉰다’(김경미), ‘남명 조식의 학문세계와 실천’(김충렬), ‘서원의 역사와 유학사상’(권인호), ‘조선시대 서원건축의 양식’(김지민), ‘한국건축문화의 확립을 위하여’(이상해)가 실렸다. 민족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글들이었다. 김근원·황헌만의 사진이 <한길역사기행>의 품격과 생명력을 북돋았다. 나는 책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한길역사기행은 역사의 현장 삶의 현장에 가서, 가슴으로 우리의 역사와 삶을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우리 모두의 열린 마당입니다. 역사의 현장 삶의 현장에는 우리의 정서와 문화와 사상이 힘차게 살아 숨쉽니다. 우리는 한길역사기행을 통해 우리의 국토 우리의 역사가 크고 아름다우며 넓고 깊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또한 한길역사기행을 통해 이 국토에서 굳건히 살아가는 민중의 세계를 새롭게 만납니다.

우리는 이 역사의 기반으로서의 국토, 우리의 삶의 터전인 국토를 밟으면서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됩니다. 이 국토를 밟으면서 이 국토에서의 삶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민족공동체적 정서와 논리를 실천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살아 움직이는 이 역사 이 국토의 의미를 바로 세우는 일뿐만 아니라 그것을 반민족적이고 외세적인 것으로부터 지켜 우리 모두의 삶의 터전으로 가꾸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한길역사기행을 통해 늘 다짐합니다. 온당치 못한 생각에 의해 우리의 국토가 훼손되고 있으며 역사적 유산이 제대로 돌보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1985년 여름부터 시작된 한길역사기행은 86년 12월로 열네 번째가 되었고, 그리고 새해에 다시 시작됩니다. 우리가 가야 할 삶의 현장 역사의 땅은 무궁무진합니다. 이 국토는 언제나 싱싱하게 우리를 맞아줍니다.

한길역사기행은 한길사의 출판활동과 하나로 통합됩니다. 한길역사기행은 바로 출판의 주제이고, 참여자들이 더불어 토론하는 그 내용은 책으로 수렴됩니다. 한권의 책이란 우리의 역사적 삶을 담는 그릇 또는 그 논리가 전개되는 마당이라면, 한길역사기행은 바로 또 다른 형식으로 우리의 역사적 삶을 담는 그릇이자 마당일 것입니다.

여기 지금까지 한길역사기행에서 토론된 내용의 일부를 정리하여 책으로 엮어냅니다. 참여하여 토론한 동시대인들의 공동작업의 소산입니다. 앞으로 한길역사기행을 더욱 본격화시키고, 다시 총체적이고 심화된 내용의 책을 만드는 일이 오늘 우리에게 부과되고 있음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 남명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산천제 ⓒ 한길사

제15회 한길역사기행 : 87년 2월 ‘강화도의 사회사’를 주제로 강화도 간척사에 대한 최영준 고려대 교수의 강의와 안내를 받았다. 고려시대 항몽전쟁의 근거와 개화기 프랑스와의 병인양요 등 잘 알려진 역사보다도 강화도에서 진행된 간척의 역사로 살펴보는 기회였는데, 최영준 교수의 강의는 강화도를 다시 보게 하는 것이었다. 국토 간척비가 한 농가의 마구간에 나뒹굴고 있었다. 살아있는 생활사 문화재가 말이다. 연변의 시인 김파 씨가 함께 참여했다.

제16회 한길역사기행 : 87년 3월 ‘갑오농민전쟁의 현장을 찾아서’ 호남평야와 공주 등을 다시 가는 것이었다. 이이화 선생이 강의·안내하고 김개남 장군의 생가터를 찾아갔다. 우리는 생가터 들어가는 입구에 ‘동학농민혁명 김개남 장군 생가터 입구’라는 푯말을 이이화 선생의 글씨로 세웠다. 그리고 지금은 밭으로 변한 생가터에는 ‘동학농민혁명 김개남 장군 생가터’라는 푯말을 역시 이이화 선생의 글씨로 세웠다. 우리출판사는 서울에서 푯말을 만들어 가지고 갔다.

제17회 한길역사기행 : 87년 4월 ‘금강유역 농민의 삶’을 주제로 봄의 호남평야를 걷는 것이었다. 박현채 선생이 강의하고 가이드를 맡았다. 한국근대사와 일제의 농민수탈에 대해 현장에서 토론.

제18회 한길역사기행 : 87년 5월 봄이 오는 지리산을 다시 갔다. 철쭉이 만발하는 장대한 지리산을 박태순·이이화·박현채 선생 등이 강의와 안내를 하고 토론. 지리산 기행은 언제나 만원사례였다.

‘금강산 건봉사’ 답사

제19회 한길역사기행 : 87년 6월 ‘민족분단의 현장을 찾아서’ 금강산 건봉사 유터를 찾아갔다. ‘금강산 건봉사’는 분단 이전에는 천년고찰의 웅장함을 자랑했지만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불타 사라지고 그곳에 대웅전의 주춧돌과 당간지주들만이 남아 있었다.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어 군대의 허락을 받고 군인들의 안내를 받아 답사할 수 있었다. 지금은 복원되었지만 그 시절 건봉사 유터에는 당간지주들만이 서 있었다. 리영희 선생과 소설가 이호철 선생이 ‘체험적 한국전쟁론’을 강의하고 토론.

제20회 한길역사기행 : 87년 7월 ‘낙동강 유역의 민족사와 강의 의미’를 탐험했다. 경북의 낙동강 상류로부터 부산의 하류까지 가는 기행에는 고려대 역사지리학과 최영준 교수가 강의와 안내를 맡았다. ‘낙동강 파수꾼’ 김정한 선생의 특강을 듣는 행운도 누렸다.

제21회 한길역사기행 : 87년 8월 6박7일에 걸친 제주도 탐험. 서울에서 열차편으로 목포까지 가서 목표의 유달산을 보고 다시 배를 타고 제주도로 가는 행로. 바다는 호수처럼 조용했고 석양이 참으로 경이롭게 빛났다. 일행이 제주도 동단 신양리에 도착했을 땐 밤 11시였다. 일행은 심야의 식사를 끝내고 제주도를 탐구하는 강의와 토론에 들어갔다.

제주도는 엄청난 민속사의 보고이자 4·3항쟁이라는 비극의 땅이었다. 낮에는 답사하고 밤에는 강의와 토론을 이어갔다. 한림화·전경수·현기영·현길언 씨 등 제주도 출신의 지식인·문학인들의 강의를 잇달아 들었다. 물론 한라산을 오르고 마을 할머니들과 신나는 노래판·춤판을 그 바닷가에서 펼쳤다. 제주도 답사는 역사기행의 또 하나의 절정이었다.

제22회 한길역사기행 : 87년 9월 전남의 무안·함평·장성을 가서 호남의 유교문화권을 체험하는 것이었다. 일행은 기정진이 학문을 펼치던 고산서원에서 밤을 지새우며 토론했다. 호남은 영남이나 영동과 확실히 다른 역사적 분위기가 있었고, 우리의 역사기행은 늘 호남의 산하로 쏠리는 편이었다.

박석무 씨의 열강은 참여자들에게 새로운 시선에 눈뜨게 했다. 특히 곤재(困濟) 정개청(鄭介淸)의 사상과 행동에 대한 강의와, 정개청을 모신 초라한 자산서원 방문은 우리 역사기행에서 체험할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이른바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고문 끝에 유배되어 절명하는 선비 정개청의 일생과 그 이후의 정권의 부침에 따라 그가 복원되는 일련의 역사진전을 강의했는데, 당시 노론의 영수로서 정개청을 죽게 한 권력자 정철의 또 다른 얼굴, 그리고 정개청을 복원시키는 데 손수 나선 윤선도의 큰 도량을 우리는 주목하게 되는 것이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벽화

▲ 석주관에 위치한 정유재란 당시 의병대장 7인의 묘 ⓒ 한길사

제23회 한길역사기행 : 87년 10월 ‘거제도와 포로수용소’를 찾아갔다. 지금은 말끔히 정리·정돈되어 전혀 다른 풍경이지만, 그땐 폐허가 된 포로수용소를 그대로 걸을 수 있었다. 막사가 무너지고 그 무너져 내리다 남은 막사의 벽에는 포로들이 그려놓은 그림들이 그대로 남아 있고, 그 막사의 방바닥에서 솟아오른 감나무에 붉게 물든 감들이 열려 있었다. ‘아름다운 우리 강산엔 이렇게 슬픈 역사가 상존하고 있구나’했다. 서울에선 참 멀기도 한 거제도를 역사기행하기 위해서는 물론 나는 사전답사를 해야 했다.

거제도 역사기행을 끝내고 서울로 올 때의 그 국토의 빛나는 풍광이 늘 나의 뇌리에 남아 있다. 통영과 진주를 거쳐 덕유산을 왼쪽으로 하고 우리는 김천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달리는 버스였지만 일행은 차중토론을 진지하게 펼치고 있었다. 10월 초순의 늦은 하오, 들판엔 익어가는 벼가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역광으로 바라보는 그 들녘의 풍광에 사람들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국토란 쳀렇게 아름답구나!

나는 마이크를 잡고, “아름다운 국토 속으로 우리가 달려가고 있다, 빛나는 국토에 살 수 있어 우리는 행복하고, 이렇게 슬픈 역사도 아름답구나”라고 했다. 나는 맑은 물이 유장하게 흘러내리는 계곡 옆에 버스를 서게 하고 모두들 들어가서 손과 얼굴을 씻자 했다. 늘 그러했지만 “넉넉하고 아름다운 우리 국토 우리 산하여, 우리는 당신의 품속에 안길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합니다”라고 했다.

제24회 한길역사기행 : 87년 11월 ‘한국 고건축의 마을을 찾아서’ 영남의 오지인 봉화·풍기를 갔다. 『한국의 민가』『민족건축론』을 저술해낸 김홍식 한양대 교수와 한옥건축가 신영훈 씨가 강의와 안내를 맡았다. 우리 국토는 이렇게 깊은 계곡을 갖고 있고, 그 계곡에는 이렇게도 고아하고 그윽한 옛마을들이 있었다.

제25회 한길역사기행 : 87년 12월 서울 및 근기지방의 역사를 답사했다. 경기도 일원이 사실은 가장 중요한 역사의 땅이다. 다산 정약용의 실학정신이 여실히 구현되고 있는 수원 화성과 실학자 성호 이익의 묘소를 참배하고 양주에 있는 다산의 고향 마을을 답사했다. 남한산성과 잠실의 삼전도를 살펴보았다. 이이화 선생이 강의와 안내를 맡았다.

전라도의 농요를 찾아서

▲ 멀리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남명 조식 선생의 묘 ⓒ 한길사

제26회 한길역사기행 : 1988년 2월 ‘전라도의 농요를 찾아서’ 익산을 찾아갔다. 익산농악은 전라도 농악을 대표하는 것인데, 참가자들은 그곳의 농악패들과 신나게 놀았다. 물론 이 일대는 동학농민의 함성이 우렁찼던 곳이고, 그 역사를 함께 살펴보았다. 호남평야는 늘 걸어도 풍요롭고 가슴 벅찬 우리의 국토다. 이이화 선생이 강의하고 안내.

제27회 한길역사기행 : 88년 3월 ‘남한강 수운(水運)을 따라’ 남한강 유역의 역사와 정취와 풍속사를 답사했다. ‘남한강의 수운’에 관한 연구 등을 포함하는 『국토와 민족생활사』를 펴내게 되는 최영준 고려대 교수가 강의와 안내를 맡았다. 이이화 선생이 강의하고 안내. 『농무』『남한강』의 신경림 시인이 참여하여 강의와 안내를 함께 맡아주었다. 청주의 신채호 선생의 생가와 기념비를 답사했다.

제28회 한길역사기행 : 88년 4월 ‘남원·고창의 판소리’를 찾아갔다. 우리가 펴낸 『명창 임방울』의 저자이자 문학평론가인 원광대 천이두 교수가 안내와 강의를 맡았다. 그는 춘향전의 ‘쑥대머리’를 불러가며 참가자들의 흥을 돋웠다. 특히 남원의 명창 강도근 선생의 우렁찬 판소리를 직접 듣는 행운도 누렸다. 지금은 유명을 달리한 강도근 선생, 그의 동편제 판소리의 목소리는 참으로 우렁찼다. 거대한 쇳덩어리가 깨어지는 것 같았다.

제29회 한길역사기행 : 88년 5월 다시 지리산을 찾아갔다. 80년대를 산 우리들에게 지리산은 민족적이고 민중적인 에너지를 공급하는 사상의 물둥지 같은 것이었다. 이번에는 전라도의 지리산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경상도의 지리산을 찾아가는 것으로 남명 조식 선생이 학문하고 제자들을 키워낸 그 정신과 사상을 기리는 산청의 덕천서원에서 토론하고 잠자면서 지리산의 정상 천왕봉을 올랐다. 강만길 교수가 동행했고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동의보감’의 이은성 씨 등도 같이 지리산 정상을 올랐다. 그때 내가 이은성 씨 다음으로 천왕봉을 늦게 오르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제30회 한길역사기행 : 88년 6월 ‘청해진과 장보고: 서남해 역사의 재인식’을 주제로 걸었다. 위대한 해상왕 장보고는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리들의 우상이었다. 다도해의 사회사는 늘 신비로웠다.

제31회 한길역사기행 : 88년 7월 ‘영남의 전통문화’를 찾아서 영남의 오지 상주 등지를 찾아가서 아직도 온존되고 있는 한반도 내륙의 살림살이와 그 풍경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낙동강의 상류일원의 풍광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울릉도의 역?와 생활

▲ 부여문화원장이 궁남지에 얽힌 서동설화를 설명하고 있는 이석호 당시 부여문화원장 ⓒ 한길사

제32회 한길역사기행 : 88년 8월 12, 13, 14, 15일에 걸친 3박4일의 ‘울릉도의 역사와 생활’을 체험하는 것이었다. 동해에서 배를 타고 4시간 가서, 울릉초등학교를 빌려 밤을 새며 강의하고 토론하고, 다시 낮에는 아름다운 울릉도의 산과 바다를 가는 것이었다. 나는 울릉도의 역사기행을 위해 사전답사까지 했는데, 8월 15일 돌아오면서 선상에서 펼쳐진 즐거운 풍경을 잊지 못한다. 광주에서 참가한 4명의 여성들이 배가 출발하면서부터 동해에 도착할 때까지 노래를 부르면서 다른 일행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렇게도 신명나게 노는지, 어떻게 노래도 그렇게 잘 하는지,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리영희 선생이 동행.

제33회 한길역사기행 : 88년 9월 ‘송광사와 선암사의 불교사상’을 찾아갔다. 고찰에서 1박하면서 불교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아마도 가장 한국적인 문화와 정신을 체험하는 것일 터이다. 송광사와 선암사는 성격이 다른 두 고찰이다. 우리들의 한길역사기행은 서원이나 고찰에서 가능하면 숙박하는 것이었는데, 우리의 정신과 사상과 문화의 두 축일 것이기 때문이다.

제34회 한길역사기행 : 88년 10월 ‘서울·부산의 옛길(영남대로) 답사’를 주제로 잡고 최영준 교수가 역시 강의와 안내를 맡았다. 길 강의는 언제나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것이었다.

제35회 한길역사기행 : 88년 11월 ‘오늘의 농촌과 농민’을 살펴보기 위해 호남평야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박현채 교수가 강의와 안내를 맡았다. 호남평야를 달리면서 오늘 우리 농촌의 현실을 이야기했고 식민지 사회경제사의 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군산항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제36회 한길역사기행 : 88년 12월 서울 일원의 성곽을 답사하는 것이었다. 이이화 선생과, 김홍식 한양대 교수가 강의와 안내를 맡았다. 남원산성에 올랐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복한 그 역사의 상처를 기억하기 위해 세운 삼전도 비석을 다시 찾았다.

제37회 한길역사기행 : 1989년 5월 다시 안동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병산서원에서 잠자고 하회마을·도산서원·봉성사 등지를 답사하고 하회마을·도산서원 등의 건축양식을 답사했다. 김홍식 한양대 교수가 강의와 안내를 맡았다.

제38회 한길역사기행 : 89년 6월 전북 부안군과 변산반도 일대를 걸었다. 옛부터 중국과의 교류가 빈번했던 곳일 뿐 아니라 민중반란의 현장이기도 했다. 이이화 선생이 ‘도둑의 사회사’를, 민속학자 주강현 씨가 ‘변산반도의 민속’을 강의하고 안내를 맡았다.

제39회 한길역사기행 : 89년 7월 경주 남산을 다시 집중해서 답사했다. 아름다운 남산은 신라의 사상과 예술의 모든 것을 설명할 것이다. 동국대 문명대 교수가 강의와 안내를 맡았다.

제40회 한길역사기행 : 89년 8월 휴가철을 맞아 다시 제주도를 체험하는 것이었다. 전과 달리 왕복 비행기를 이용했다. 『한라산의 노을』의 작가 한림화 씨가 강의와 안내를 맡았다.

제41회 한길역사기행 : 89년 9월 공주와 부여를 찾아가는 백제기행. 백제의 문화와 예술이 새롭게 인식되고 있는 때다. 부여문화원장 이석호 씨가 다시 강의와 안내를 맡았다. 백마강에서 배를 타면서 듣는 강의와 안내가 감동적이었다.

제42회 한길역사기행 : 89년 10월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과 한국현대사를 주제로 삼아 지리산과 순천·벌교·율어 등 『태백산맥』 무대를 찾아갔다. 작가 조정래 씨와 문학평론가 임헌영·박현채 교수가 동행하여 강의·토론하는 것이었다. 가을의 남도는 참으로 환상적이었고, MBC 문화부 박석태 기자가 동행하여 취재해 9시 뉴스에 피쳐기사로 보도했다. 『태백산맥』 제3부의 출간을 기념하여 나는 그 무대를 찾아가는 역사기행을 기획했던 것이다. 그 후 제4부로 완간되었을 때 나는 지리산 피아골에서 ‘태백산맥제’를 기획하게 된다. 태백산맥제는 KBS가 9시 뉴스에 보도했다.

어서 통일이 되어 북녘땅을 밟고 싶다

▲ 매천 황현의 사당 ⓒ 한길사

우리들의 한길역사기행은 민족사와 국토에 대한 새로운 눈뜸을 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었지만, 동시대의 사람들이 역사기행을 매개로 다양한 동지적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역사에 동행하면서 같이 잠자고 밥 먹는 스킨십으로 사람들은 친구가 되었다. 남녀는 결혼하는 사랑의 여정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나는 그 인연으로 주례를 서주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우리들의 역사기행은 80년대 중·후반 이 국토에서 펼쳐진 아름다운 한 풍경이었다. 나는 한 출판인으로서 역사강좌와 역사기행을 기획함으로써 많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을 너무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역사강좌와 역사기행에 참가한 많은 이들은 우리 사회의 요소요소에서 소중한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역사강좌와 역사기행에서 만난 만화가 윤승운 선생은 늘 만나고 싶은 분이다. 책소식지 <한길> 제8호(89년 5월)에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내주었다.

“나는 원래부터 역사를 좋아한다. 한길역사기행은 8회 이래 단골로 따라 다닌다. 나로서는 참으로 배우는 바가 많다. 역사만화 ‘맹꽁이 서당’을 한 잡지에 7년 이상 연재하고 있는데 나의 부족한 역사지식을 메우기 위해서도 역사기행을 다녀야 한다.

매회 때마다 참가자의 절반 정도는 구면이고 절반은 새로 보는 사람인데, 참가자들의 역사에 대한 열정과 진지함, 그리고 해박한 지식에 나는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기서 사귀게 된 역사기행 벗이 노소를 막론하고 많아졌으니 한길사에 감사할 뿐이다.

어느 여행이나 그렇듯이 제일 중요한 것은 좋은 날씨를 택하는 것인데, 참으로 희한하게도 악천후는 별로 없었으니 김 사장의 택일솜씨는 병아리 감별사의 감별수준처럼 높은 경지인가보다.

비석하나 돌부처 하나를 보기 위해 먼길을 움직이는 것은 개인 여행에서는 잘 실행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역사기행은 귀중한 여행이 될 수밖에 없다. 참가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만사를 떨쳐버리고 나서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어쨌든 역사기행은 나의 어린이 역사만화를 그리는데 도움이 되고 나의 밥벌이에 도움이 된다.

가장 바라는 것은 어서 통일이 되어서 한길역사기행이 휴전선 넘어 분단된 우리의 북녘땅을 마음껏 여행해볼 날이 오는 것이다. 그땐 정말 발바닥이 닳도록 부지런히 다녀야겠는데 이 젊음이 가기 전에 어서 통일이 되었으면 싶다.”


종로 바닥에서의 한길사랑방운동의 시도

80년대의 그 시대적 상황과 조건이 나로 하여금 그 어떤 일들을 계속 꾸미게 만들었을까. 한길역사강좌와 한길역사기행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이런 저런 정신을 체득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친구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역사와 우리 국토에 얽힌 사상과 정신과 이야기를 토론하는 것이 신명났다. 그런 것들이 우리들을 역사마당으로 유혹했다.

우리들은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역사기행을 기다리지 못하고 그 중간쯤에 ‘중간모임’을 해보자했다. 단골들이 모여 작은 역사기행을 해보자는 안을 냈다. 그리하여 북한산성을 답사하고 단양에 있는 김삿갓의 생가터를 찾아가기도 했다. ‘산모임’이란 걸 조직해 또 다른 행로에 나서기도 했다. 강원도의 너와집을 찾아가기도 했다.

드디어 나는 ‘한길사랑방’이라는 걸 구상하게 된다. 안암동 우리 회사의 작은 세미나실에서 역사강좌가 끝나면 으레 강사들과 수강자들은 인근의 음식집이나 맥주집으로 몰려가서 2차 강의를 하곤 했는데, 나는 단골 참석자들과 의기투합해 종로2가 관철동 10-1번지 삼일빌딩 뒤쪽의 한 건물 2층에 ‘한길사랑방’을 열었다.

우리들의 본격적인 아지트를 종로 한 가운데에 마련해서 뭔가를 제대로 해보자는 것이었다. 50여 평이 되는 것이었다. 주변의 학자·문인·지식인들이 우리들을 부추겼다. 내가 좀 많이 출연하고 강좌와 기행의 단골들이 약간씩 냈다.

1987년 9월 21일에 드디어 한길사랑방이 문을 열었다. 전창덕 씨가 한길사랑방의 ‘운영심부름꾼’을 맡았다. ‘한길사랑방에 초대하는 말씀’에서 나는 한길사랑방의 취지와 운영방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가을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폭풍우가 심하게 ?아쳤지만, 이 강산의 가을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 옆에 왔습니다. 이 나라와 이 나라의 역사 그리고 이 국토를 뜨겁게 사랑하는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한길역사강좌와 한길역사기행을 통해 우리는 이 나라의 역사와 이 국토를 가슴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나아가 이 나라의 역사와 그 국토에 대한 사랑을 뜨겁게 키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러분을 알게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선 역사강좌와 역사기행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10여명이 생각과 힘을 모아, 우리들이 모여 가슴을 열고 토론하면서 뜻을 주고받을 수 있는 하나의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한길사랑방’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우리는 ‘한길사랑방운동’을 펼치고자 합니다. 한길사랑방운동을 우리는, 함께 모여 우리들 개인의 문제뿐 아니라 이 시대 이 사회가 당면하는 문제와 현상들을 토론하는 것으로 규정합니다. 한길사랑방은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역사·철학 등 모든 문제들이 토론되는 열린 마당이 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하고 또 그렇게 만들고자 합니다. 물신주의와 개인주의가 판치고 있는 이 시대에 한길사랑방은 우리들 모두의 만남의 자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길사랑방운동’은 우리 모두가 참여하는 문화공동체운동을 의미합니다.”


판화가 이철수 화백의 판화전이 한길사랑방의 개관을 장식했다. 한길사랑방은 10월 20일부터 11월 17일까지 작가와의 대화를 개설했다. 고은 선생의 ‘시와 역사’, 이호철 선생의 ‘민족문학에 대하여’, 신경림 선생의 ‘시교육에 대하여’, 박태순 선생의 ‘시대정신과 산문정신’,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 이야기’ 등이 진행되었다.

한길사와 민요연구회 공동주최로 10월 23일 ‘정산아라리의 밤’을 열었다. 정선아라리 기능보유자 김병하 씨와 그의 따님 김길자(정선여고 1년) 양의 정선아라리를 서울에서 다시 들어보는 기획이었다. 그러나 그날 정선의 아우라지에서 듣던 그 정선아라리는 아니었다. 나는 순간 생각했다. 아, 민요는 그 역사와 삶의 현장의 노래이구나, 어디 민요뿐인가, 모든 사상과 이론, 예술과 정신은 그 현장에서 살아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의지와 생각은 그러나 서울의 도심 종로2가에서의 공간을 운영하기에는 너무나 아마추어적이었다. 일꾼을 맡은 전창덕 씨도 사랑방을 제대로 운영해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몇 차례의 찬조를 시도했지만 낭만적인 생각만으로는 사랑방을 계속 유지하고 기획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1년 정도 사랑방을 운영하다가 우리는 문을 닫아야 했다.

역사유적을 파괴하지 말라는 진성서를 보내다

▲ 우금치 고개에 세워진 동학군 위령탑 ⓒ 한길사

우리는 역사기행을 통해 우리 역사의 크고 넓고 의미심장함에 각성되는 한편 우리 역사와 국토의 보존정신의 빈곤에 분노하기도 했다. 우리가 늘 찾곤 하던 백산성지, 동학군이 일어서던 바로 그 언덕이 채석업자에 의해 무참히 잘려나감에 우리는 뜻을 모아 1987년 3월 15일 다음과 같은 진정서를 만들어 국회의장·문화공보부장관·내무부장관에게 보내기도 했다.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답사에 나선 바 있는 한길역사기행 일행은 동학농민혁명의 유적지 백산성지(白山城址, 지방기념물 31호)가 무참하게 파괴되고 있는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그 대책을 마련해주시길 진정합니다.

전북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소재의 백산성지는 옛 백제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다시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농민군이 집결한 유서 깊은 민족사적 유적입니다. 따라서 백산성지는 우리의 역사적 전통과 민족운동의 정신을 간직하고 있어 당연히 제대로 보존되어야 합니다.

최근 정부에서도 동학농민혁명의 유적지를 성역화하는 작업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학농민혁명의 중요한 유적지인 백산성지가 채석업자에 의해 흉물스럽게 파괴되고 있습니다. 지방당국으로부터 ‘합법적 허가를 받아’ 이 성스러운 유적의 한 부분이 없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 어떤 ‘합법’을 내세우더라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지난 3월 14, 15일 이 일대를 답사한 바 있는 우리 한길역사기행 일행은 이 역사적 유적지가 사정없이 파괴되고 있는 사실에 일대 충격을 받고 채석업자 측에 항의한 바 있습니다. 이 지역의 주민들도 백산성지가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크게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습니다.

우리의 역사적 유적에 대한 보호·관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조되고 있는 지금, 동학농민혁명의 전적지가 성역화되고 있는 이 마당에 이 같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저질러지고 있다는 사실에 통분을 금하지 못하여, 이미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더 파괴되기 전에 조처가 강구되어야겠다고 생각되어 귀 당국에 진정하게 되었습니다.”

87년 6월 변산반도를 역사기행 했을 때 반계수록의 유형원 선생의 고향을 찾았을 때도 우리는 경악했다. 그의 사상을 기리는 한옥을 그의 마을 산쪽에 지었는데, 그것을 돌보지 않아 날로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다. 산길 1km를 걸어올라 갔을 때 우리는 귀신이 나오는 집인줄 알았다. 문짝들이 나자빠져 있고 마당은 잡초로 무성하고 천정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집만 지어놓고 관리를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제발 저것 어떻게 해달라고 했다. 우리는 다시 진정서를 보냈지만 그것이 과연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역사기행 시집: 국토여 역사여』를 펴내다

박태순의 『국토와 민중』에 이어 신경림의 『민요기행』 1, 2를 1985년과 1989년에 펴낸 한길사는 『역사기행 시집: 국토여 역사여』를 1991년에 신경림·정희성 편으로 펴냈다. 나는 시인들의 역사와 국토에 대한 시적 육성을 듣고 싶었던 것인데, 『역사기행 시집』은 시인들의 국토사상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역사기행 시집』은 이 땅의 시인들이 노래한 민족문학의 또 다른 얼굴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시인들이 노래한 그곳들은 한길역사기행을 통해 답사한 곳이기도 했다. 황헌만 씨가 역사기행에 동행해 촬영한 ‘우리 국토 우리 역사’의 사진들을 함께 실어 역사의 현장을 한층 실감나게 했다. 시인들의 열정과 통찰과 미학을 통해 우리는 역사의 이성과 감성, 민족 공동체적 당위와 미학을 일깨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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