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밉고 싫고 감정은 파도치고 삶은 휘청대는 날 읽는 책

일방 통행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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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더 어리고 더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을 땐 집에 와서 남반구에서 만들어진 세계지도를 마룻바닥에 펼쳐놓고, 세상의 중심이 서울이 아니라 시드니, 오클랜드, 난디 같은 도시인 지도들의 의미를 읽어보곤 했었다.

‘사소한 충돌들, 의견의 불일치들, 논쟁이랄 것도 없는, 눈치 보며 주저하는 소신 없는 갈등들, 짜증, 신경질, 흥분, 좌절, 실망, 배신이랄 것도 없는 배신, 왜소함, 질 떨어짐, 무릎이 팍 꺾이는 느낌. 비난, 책임 전가, 무능력, 콤플렉스가 엿보이는 과민반응, 흉보기, 토라짐, 맹목적인 편 가르기, 등에 꽂히는 싸늘한 시선들 혹은 무심한 시선들, 눈동자에서 아무런 의미도 읽을 수 없게 하는, 심드렁하고 쿨한 얼굴들, 무관심함, 면도 자국에서도 냉담함을 읽게 만드는 자신만만한 사람들, 나보다는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더 옹호하는 주위의 공기. 텔레비전 화면 속의 회색빛 재해같이 일순간 멍해지게 하는 일들, 이민 가버릴까? 확 때려치울까? 그만두면 그만이지 뭐, 다시 안 보면 되지 뭐. 뭐 좀 신나는 일 없어? 인생 이게 다야? 정말 그런 거야? 그럼 왜 열렬히 살아야 한다는 거지?’ 이런 쌍둥이 같은 단어들과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우왕좌왕하는 날들은 도대체 뭘 해야 한단 말이야?

예전에 더 어리고 더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을 땐 집에 와서 남반구에서 만들어진 세계지도를 마룻바닥에 펼쳐놓고, 세상의 중심이 서울이 아니라 시드니, 오클랜드, 난디 같은 도시인 지도들의 의미를 읽어보곤 했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와 완전히 거꾸로인 지도들의, 의심할 바 없어서 처음엔 어처구니없지만 나중엔 당당해지는 의미들. 트레이싱 페이퍼에 그 지도들의 선을 따라 그리다 보면 세상의 중심이 내가 아니란 걸 서서히 받아들이게 되고 관점이 이동되면 차분해지곤 했다.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내 명함은 트레이싱 페이퍼 용지다. 내 명함은 항상 다른 명함 속의 이름들을 읽게 해준다. 희미하긴 해도 원한다면 나는 읽을 수 있다. 내 명함에는 회사 이름과 직책 대신 결코 표현된 적은 없었지만 사실은 꼭 알아줬으면 싶은 이력들을 써넣는 상상을 한다. “아마추어 여행 작가, 고기 요리를 싫어함, 귀를 뚫지 않았음, 스타킹 수집가, 증명사진 싫어함. 옆얼굴에 더 자신 있음, 자고 나서 푸석푸석할 때 가장 예쁨, 출신 대학과 직책을 말하는 것을 싫어함. ‘어쩔 수 없다’란 말을 싫어함. 예외 없다는 말을 싫어함. 누군가를 많이 알고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을 싫어함, 누가 나를 안다고 말하면 깜짝 놀람, 프로보다 아마추어를 편애함, 나의 장점을 찬양하는 사람보다 나의 단점에 웃어주는 사람을 편애함.”

그리고 또 이런 짓도 한다.

-지는 해를 보면서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는 말을 떠올리지 않기. (즉, 쉽게 희망을 품지 않기. 희망의 자리는 안달복달 다음 자리.) 차라리 가라앉는 태양이 나에게 빛을 던져주는 이유를 따져보기, 가라앉는 태양빛 때문에 백 배는 더 나은 어떤 광경들에 시선을 두기. (나의 얼굴도 대체로 그런 편이니 혹시 궂은 일 속에 내 얼굴이 더 고유한 미감을 갖지 않을까? 은밀하게 생각하기.)

-퇴근하다가 비 걷힌 텅 빈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서 철봉에 박쥐처럼 매달려 보기.

-비틀즈의 ‘she loves me’를 틀어놓고 그들의 목소리에 흘러넘치는 자긍심을 들어보며 정확하게 그 감정으로 나를 위해 그 노래 불러주기.

-지금 입체영화 전용 안경(스테레오 스코프)을 끼고 입체영화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난 어떤 착시 같은 것은 것에 사로잡혀 있지 않나?

-‘인간이 남들 앞에서 벌거벗지 않는 이유는 자신을 숨기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분노를 일으켜서’라는 말을 알고 있긴 해도 샤워하다가 뛰어나와서는 정말 아무에게도 벗은 몸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걸까 궁금해 하기. 정말? 한 사람도?

-사람이 입을 맞추기 위해서는 먼저 끌어안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수천 가지 연애감정을 적어놓은 스탕달의 『연애론』 아무 페이지나 펼쳐놓고 읽기.

이를테면 이런 문장들, ‘확고한 성격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의 위에 타인의 영향을 느낀 적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호감을 사는 사람은 깊은 호감을 받지는 못한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갖게 되는 것은 사랑이 깊지 않을 때뿐이다’ ‘사람은 그 정신의 크기에 준하여 의무를 갖는다’ (시계 소리가 울릴 때마다 횡격막을 때리는 촉감으로 소리를 느끼는 것도 『연애론』을 읽고 생긴 버릇이다. 세상 모든 감정을 연애 감정과 비교하면 감각의 전이가 이뤄지고 비루함까지도 열렬함을 부르는 감정 같다.)

-내 스트레스성 위경련의 이유는? ‘최선의 것을 배우지 못했으며 모든 것을 너무 일찍 너무 빨리 배웠고 제대로 씹어 먹지 못했기 때문에 위장에 탈이 나는 것이다’라고 니체가 이미 말했던 것을 떠올린다.

-화장기 없는 맨얼굴을 자꾸만 거울로 들여다보기. ‘입술이 아래로 처져 있는 이유는 지상에서의 작은 소망이 아직도 그 입술 위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니체)’라는 말 떠올리기. 혹은 ‘너 자꾸 화내면 미워진다’라는 충고를 떠올리기. 혹은 ‘나는 너무 빨리 늙었다. 온실 속에 살아서’란 취지의 플로베르의 말을 떠올리며 내가 지금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란 것에 다소 안심하기.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란 캔디의 노랫말을 거부하기, 하지만 운다면 히치콕 영화의 금발 여주인공들처럼 우아하게, 아니면 아주 비통하게. (인간은 언제 비통하지? 사실은 누군가 미치듯이 그리울 때 아닐까? 아니면 사회적인 분노를 느낄 때?) 즉, 비통함보다 낮은 수준의 감정일 때의 눈물은 사실은 눈물이 아니라 제스처다.

-모든 고통은 과장이 있다고 생각하기.

-내가 고통스러운 것은 실제로 내가 감당 못할 만큼 나쁜 일이 있어서인가? 아니면 내 머릿속의 적합지 않은 기대감 때문이었나? 즉, 내 자작극의 혐의는 없나?

-경박한 열등감이란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순간은?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만 끝없이 마음 쓰는 순간.

-내가 지금 불쾌하거나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혹시 예전에 너무나 큰 것을 이미 맛본 뒤인 측면은 없나? 그렇다면 난 기분 좋게 감당해야 한다.

-언제나 마음에 들어 했던 그리스 로마 신화의 한 부분. 아리아드네의 실 이야기. (영웅 테세우스가 괴물 미노타우루스를 물리치려 미궁에 들어갔을 때, 그는 미궁 밖에서 실 뭉치의 끝을 잡고 기다려주던 공주 아리아드네 덕분에 성공적으로 미궁 밖으로 나온다.) 나는 누군가? 너는 왜 책을 좋아하느냐? 혹은 여행을 좋아하느냐? 물으면 그건 어떤 경우에도 내가 길을 찾게 해주는 아리아드네의 실 같은 것이 내겐 책이고 여행이라 대답하곤 했다. 그런데 오늘 나의 포지션은? 테세우스인가? 아리아드네인가? 혹은 미궁 자체인가? 어쩌면 맡은 바 역할을 다하고 영웅을 탄생시키기 위해 죽어야 하는 괴물은 아닌가?

-여행자였을 때 마음에 들지 않는 도시를 만나면 재빨리 스쳐간다(차라투스트라가 그랬듯이)는 것을 일상에도 적용해야 한다. 모든 감정에 다 힘을 뺄 수는 없다. 보낼 풍경은 보내야 한다.

-어렸을 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이미지는 액자 속에 있던 스페인 대형 범선의 이미지였다. 그것이 (정치적 맥락은 잠시 차치하고) 위대해 보였던 이유는 (훗날 발터 벤야민이 힌트를 줬다) 늘 먼 바다의 수평선을 배경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위대해지기 위해선 내 배경으로 먼 바다의 수평선 같은 게 필요하다. 이것이 내가 사회적 인간인 이유다. 고쳐 나가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불행히도 지금 당장 내 옆에 아무도 없어도 나 자신을 위해 뭔가 들려주려고 애쓴다는 것. 한숨을 쉬더라도 힘이 없더라도.

오늘 내가 나에게 들려주기 위해 책장에서 뽑은 책은 발터 벤야민의 『일방 통행로』 그리고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책을 읽는 이유는, 이런 책들은 반성을 권하지 않아서다. 이런 책들은 반성하라고 말하는 대신 성찰하라고 말한다. 쉽게 화해하라고 말하는 대신 오랫동안 싸우라고 말한다. 무조건 받아들이고 사랑하라고 말하는 대신 극복한 연후에 사랑하라고 말한다. 내가 온몸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삶뿐이며 삶을 증오할 때가 삶을 가장 사랑하고 있는 순간일지도 모른다고 알려준다.

먼저 발터 벤야민 방식. 그는 우리 주위의 물건을 끝까지 깊숙하게 들여다보면 인생의 결정타 같은 힌트들이 주위에 무한히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피가 나는 일이 없도록 우리 주위의 일이 품고 있는 가시를 요령 있게 잘 다뤄야 한다고 말한다. 피가 나는 일이 없도록, 이란 말을 입술을 꽉 깨물고 읽는다. 피가 나지 않을 정도로만 깨물고.

내가 읽는 동안 사랑스러운 미소로 화답할 수밖에 없는 구절은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오로지 그에게만 열렬히 빠져 있을 때는 거의 모든 책 속에서 그의 초상을 발견하게 되는 경험을. 그렇다. 그는 주연인 동시에 악역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온갖 이야기 속에서 장단편 관계없이 다양한 소설 속에서.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의 상상력은 무한히 작은 것 속에서 해답을 구할 수 있는 능력, 즉 내적으로 집중되어 있는 모든 것 속에서 새로운, 압축된 충만함을 담을 수 있는 어떤 외연적인 것을 찾아내는 재능이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펼쳐졌을 때야 비로소 숨을 쉬고 새로 넓은 공간을 확보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모습을 안쪽에서 활짝 펼쳐 보이는 부채의 그림처럼 받아들이는 재능이라고 말이다.” 나는 오늘 접힌 그림 속에서 어떤 이미지들을 찾아내고 있는가? 그것이 해답이다. 그는 토르소에 대해선 이렇게 말한다.

“한 사람이 살아온 과거란 기껏해야 운반 도중 사지가 잘려나간, 지금은 덩어리밖에 남지 않은 아름다운 조상과 같은 것으로 그는 그러한 덩어리로부터 자기의 미래의 상을 깎아내야만 한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낙담하고 쓰러져 있을 시간이 없이 당장 인생에 정과 끌을 들이대고 뭔가 조각하고 싶다. 내가 토르소에 달아줘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는 피렌체 세례당을 보면서 힌트를 준다. “피렌체 대성당 정문에 조각가 안드레아 피사노의 {희망(spes)}, 그녀는 앉은 채 아무래도 닿지 않을 과일 쪽으로 맥없이 양팔을 뻗고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날개가 달려 있다. 이것보다 더 진실인 것도 없다.”

팔이 닿지 않으면 날개라도.

그는 거리의 아크등을 보면서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떤 사람을 아는 사람은 희망 없이 그를 사랑하는 사람뿐이다.” 지금 나에게 희망 없음은 지금 내가 인생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이 어스름 저녁에.

그는 지금 이 순간에 진행되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지각하는 것이 저 먼 미래를 예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결정적이라고 말해준다.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전조, 예감, 신호들을 해석할 것이냐 이용할 것이냐의 문제만 남는데 발터 벤야민은 비겁과 태만은 (전조를) 해석할 것을 권하고 냉정과 자유는 (전조를) 이용할 것을 권한다 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내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지체 없이 ‘이용’해야 한다. 그는 또 미래에 대해 막연히 불길한 느낌을 충실한 ‘지금’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한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땅에 오르다가 쓰러질 뻔하자 양팔을 크게 벌리고 ‘나는 너를 품에 안는다. 아프리카여!’라고 승리의 암호를 외쳤다.” “카이사르는 배에서 상륙하려다가 바다 속으로 떨어졌을 때조차 이 사고를 길조로 바꿨다. ‘나는 너를 품에 안는다, 아프리카여!’라고 외치며.” 그 둘은 재앙의 전조, 불운의 표징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을 몸으로 순간과 결합시켜 자신을 신체의 막일꾼으로 만들어서 위대해졌다고 벤야민은 찬양한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할 일은 몸으로 불운의 표징을 바꿔버리는 것이란 말이다. ‘오라! 불운한 순간이여. 나는 너를 품에 안는다! 너를 열렬히 환영한다.’

벤야민은 우리의 하루하루를 가장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 “매일 아침 우리 침대 위에 깨끗이 빨아놓은 셔츠처럼 하루가 놓여 있다. 이 비할 수 없이 섬세하고 촘촘한 직물, 이 순수한 예언의 직물은 우리 몸에 딱 맞는다. 이어질 24시간 동안의 운은 우리가 그것을 손에 쥘 수 있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내겐 처세에 관한 한, 두 번 다시 없을 웅변적인 걸작이다. 웅변적인 걸작이란 말로도 부족하다. 남보다 체온이 높은 사람은 폭포 속으로 돌진하듯 읽어야 하는 책이다. 폭포 속으로 일단 뛰어든 자는 더 단단해지지 않으면 다시 나오지 못한다.

“나는 용감한 자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양날의 칼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누구를 벨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자신을 억제하면서 지나가 버리는 데에 보다 큰 용기가 들어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보다 어울리는 적을 맞이하기 위해 자신의 힘을 아끼는 것이다. 그대들은 증오할 가치가 있는 적을 가질 뿐 경멸할 적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적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다 어울리는 적을 맞이하기 위해 아 벗들이여, 그대들은 자신을 아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대들은 웬만하면 스쳐 지나가야 한다.”

“그대들은 왜 그렇게 연약하고 굴욕적이고 유순한가? 그대들의 마음속에는 왜 그렇게 많은 부정과 거부가 들어 있는가? 그대들의 눈길에는 왜 그렇게 시시한 운명 밖에는 들어 있지 않은가? 가장 고귀한 자만이 완전하게 단단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 형제들이여, 나는 그대들의 머리 위에 이 새로운 서판을 내건다. 단단해져라.”


오늘 차라투스트라는 내게 준비하고 아끼라고 말한다. 멋진 사냥꾼은 멋진 사냥을 해야 한다. 자기의 화살을 찾아 욕정에 이글거리는 활처럼, 자신의 정오를 맞아 준비를 갖춘 성숙한 별처럼.

지금부턴 내가 좋아하는 몇 구절을 그저 베껴 쓰기만 하겠다. 베껴 쓴 텍스트는 그것을 옮겨 적은 자들의 영혼에 호령할 수 있다 했다. 오늘 나에게 호령할 수 있는 유일한 자는 차라투스트라다. 그 누구도 안 된다.

-위대한 동경에 대하여
“아 나의 영혼이여, 나는 그대에게 벌레가 야금야금 갉아먹는 것과는 다른 경멸을 가르쳤다. 가장 경멸할 때에 가장 사랑하는, 커다란 경멸, 사랑에 넘치는 경멸을 가르쳤다.”

“아 나의 영혼이여, 나는 그대에게 가르쳤다. 바다에게 자신의 높이에 이르도록 설득하는 태양처럼, 그대가 그대의 근거들을 그대에게 오도록 설득하라고 말이다.”


(인생의 목표란 것도 그렇다. 목표를 향해 계단을 올라가는 게 인생이 아닌 것 같다. 목표가 나에게 오는 것이다.)

-중력의 영에 대하여
“모든 것의 맛을 볼 줄 아는 완전한 만족감, 이것이 최선의 미감은 아니다. 그렇다와 아니다를 말할 줄 아는, 아주 반항적이고 까다롭기 그지없는 혀와 위장을 나는 존경한다.”

“참고로 나도 기다리는 것을 배웠다. 그것도 철저하게 배웠다. 그러나 나는 다만 나를 기다렸을 뿐이다.”

“나의 가르침은 이렇다. 언젠가 나는 것을 배우려는 자는 우선 서서 걷고 달리고 뛰어오르고 기어오르고 춤추는 것을 배워야 한다. 한꺼번에 배우지 못하는 법이다.”

“여러 가지 길과 방법으로 나는 나의 진리에 도달했다. 나의 눈길이 저 먼 곳을 내려다볼 수 있는 그 높이에 이르기 위해 단 하나의 사다리만을 타고 오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길을 물어본 것은 언제나 마지못해 그랬을 뿐이다. 길을 물어본다는 것은 언제나 나의 미감에 거슬렸다. 오히려 나는 길 자체를 물어보았고 시험해 보았다. 시도와 물음. 그것이 나의 모든 행로였다. ‘이것이 지금 나의 길이다. 그대들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나는 나에게 길을 묻는 자들에게 대답했다. 말하자면 모두가 가야 할 그런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소하게 만드는 덕에 대하여
“그들은 더 왜소해졌고 점점 더 왜소해지고 있다. 행복과 덕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그대들이 의욕하는 바를 언제든 행하라.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의욕할 수 있는 자가 되라. 그대들의 이웃을 언제나 자신처럼 사랑하라. 하지만 우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가 되도록 하라.”


-방랑자
“인간이란 결국 자기 자신만을 체험하는 존재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아끼기만 하는 자는 결국 그렇게 너무 아끼다 병들고 만다. 많은 것을 보려면 자기 자신을 놓아버릴 줄 알아야 한다. 인식하는 자로서 눈에 보이는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어떻게 만사에 있어서 겉으로 드러난 근거 이상의 것을 볼 수 있을 터인가? 그러므로 그대는 그대 자신을 넘어서 올라가야 한다. 위로 더 위로! 그렇다. 나 자얽과 나의 별들마저도 저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 나는 그것을 나의 정상이라 부른다. 그것은 나의 마지막 정상으로 내게 남겨진 것들이다. 가장 높은 산들은 어디서 오는가? 라고 일찍이 나는 물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이 바다로부터 온다는 것을 배웠다. 그 증거는 산의 바위와 산 정상의 암벽에 씌어 있다. 가장 높은 것은 가장 깊은 것으로부터 나와서 그 높이에 도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문장만 더. 내가 생각하는 금세기 최고의 사랑의 문장이 있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라는데 있다.
나는 사랑한다. 몰락하는 자로서 살 뿐 그 밖의 삶은 모르는 자를, 왜냐하면 그는 건너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마음껏 경멸하는 자를, 왜냐하면 그는 마음껏 숭배하는 자이며 저편 물가를 향해 날아가는 동경의 화살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자신의 덕으로부터 자신의 미감과 운명을 만들어내려는 자를. 그런 자는 자신의 덕을 위해 살려고 하고 또 죽으려고 한다.
나는 사랑한다. 너무나 많은 덕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 자를, 하나의 덕은 두 가지 덕보다도 뛰어난 법, 왜냐하면 덕이란 운명을 묶어주는 매듭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자신의 영혼을 낭비하는 자를, 그리고 감사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려고도 하지 않는 자를, 그런 자는 언제나 주기만 할 뿐 자신을 지키려고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주사위를 던져 얻은 행운을 수치로 여기고 나는 사기 도박꾼이 아닌가? 라고 반문하는 자를.
나는 사랑한다. 행동에 앞서 황금의 말을 던지고 언제나 약속한 것 이상으로 행하는 자를. 나는 사랑한다. 다가올 미래의 세대를 옹호하고 인정하며 지난 세대를 구제하는 자를, 그러한 자는 오늘의 세대와 씨름하면서 파멸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그는 말한다. 상처를 입어도 그 영혼의 깊이를 잃지 않는 자를. 자기 자신을 잊은 채 만물을 자신 안에 간직할 만큼 그 영혼이 넘쳐흐르는 자를 사랑한다고.

결국 우리는 말한다. 차라투스트라식으로. “용기는 말한다. 그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그러면 다시 한 번.” 내가 던진 돌에 내 머리통이 깨져도 다시 한 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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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혜윤 (CBS PD)

『런던을 속삭여줄게』,『고전읽기-세계가 두번 진행되길 원한다면』이후 쭉 고전 읽기에 푹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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