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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우가 다시 무대에 올랐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세계 4대 뮤지컬로 꼽히는 <캣츠> <레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이 모두 영국 작품이지만, <맨 오브 라만차>는 이 가운데 가장 먼저 만들어진 <캣츠>보다도 17년이나 먼저 만들어진 정통 브로드웨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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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전 세계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렸다는 세르반테스의 소설인 만큼 누구나 한 번쯤은 들춰봤을 것이다. 소설 『돈키호테』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Man of La Mancha)>가 국내 무대에 올랐다. 세계 4대 뮤지컬로 꼽히는 <캣츠> <레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이 모두 영국 작품이지만, <맨 오브 라만차>는 이 가운데 가장 먼저 만들어진 <캣츠>보다도 17년이나 먼저 만들어진 정통 브로드웨이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지난 2005년 <돈키호테>라는 이름으로 초연됐는데, 이번에 다시 무대에 오르게 됐다. 뮤지컬계의 흥행 보증 수표, 조승우와 함께!

오랜만에 다시 떠올려 보는 돈키호테

어렸을 때 『돈키호테』를 읽은 기억은 있을 것이다. 갑옷을 입은 기사, 산초, 로시난테, 풍차…. 그런데 책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먼저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내용부터 짚고 넘어간다.

스페인의 지하 감옥. 신성 모독죄로 끌려온 세르반테스는 종교재판에 앞서 감옥 안에 있는 죄수들에게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야 한다. 그는 자신이 쓴 소설을 토대로 죄수들과 함께 즉흥극을 통해 상황을 설명하기로 한다. 꿈은 허황된 것일까? 아니면 현실이 진실의 적일까?

라만차에 사는 빼빼 마르고 늙은 알론조는 책을 너무 많이 읽은 나머지, 자신을 ‘돈키호테’라는 기사로 착각하게 된다. 그리고 시종인 산초와 모험 길에 나서는데, 남들 눈에는 그는 살짝 미친 노인이다. 돈키호테는 여관 하녀인 알돈자를 레이디 둘시네아라고 부르는데, 그의 진심에 감동한 알돈자는 태어나 처음으로 희망을 품게 된다. 그러나 머지않아 마을 남정네들에게 처참히 짓밟히면서 알돈자의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고, 돈키호테도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자신이 초라한 노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쓰러진다.

돈키호테, 조승우 & 정성화

돈키호테에 더블 캐스팅된 조승우와 정성화. 참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번에 두 사람의 무대를 보면서 제대로 정리한 것은 연기를 하는 데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는 것이다. 카리스마를 물씬 풍기며 눈에서 레이저 광선이라도 뿜어낼 듯이 광적으로 연기하는 유형(김희애가 떠오른다)이 있는가 하면, 연기인지 원래 모습인지 모를 정도로 친숙하고 편안하게 연기하는 유형(임현식이 대표적)이 있다는 것. 물론 조승우는 전자에, 정성화에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먼저 조승우. 이번에도 그가 무대에 서는 날은 대부분 자리를 찾기 어렵다고 하니, 그 명성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일단 외적으로 아담하고 빼빼 말랐지만 두 눈만은 이글이글 불타는 돈키호테 역에 안성맞춤이다. 그러나 노인을 연기하기에는 너무 젊지 않나? 웬걸! 구부정한 허리며 힘없는 두 다리, 특히 조승우라고는 믿기지 않는 노인 목소리는 탁월할 정도다.

광기어린 돈키호테 조승우

어느 기사에서 주변 스태프들이 ‘조승우는 그냥 내버려두면 혼자 알아서 다 한다’라고 말했다는데, 이번에 그의 연기 내공을 확실히 가늠할 수 있었다. 뭐랄까, 모든 배우가 그러겠지만(아니 그러려고 노력하겠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 순간 조승우는 사라지고 정말 돈키호테가 된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신감, 광기 그리고 성량에 ‘얼마나 잘하나 보자’ 하고 팔짱 끼고 바라보던 객석도 어느 순간 속수무책으로 압도당하고 만다.

기술적인 면을 보자면 천부적인 자질도 있겠지만, 스스로 많이 보고 많이 경험하고 많이 공부한 흔적이 역력하다. 흔히 아나운서가 뉴스를 전할 때, 정확한 발음에 틀리지 않는 것은 그야말로 기본이다. 거기에 귀에 쏙 감기는 말의 리듬과 운율, 적절한 호흡, 남다른 이미지가 곁들여졌을 때 그제야 ‘뉴스 잘하는 아나운서’라는 말을 듣는다. 연기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조승우의 연기가 탁월한 것은 보통 사람들이 하는 연기에서 특정 말을 늘리고, 강약을 조절하고, 자기만의 독특한 리듬을 타고, 게다가 남다른 시선과 몸짓을 던져야 할 포인트를 제대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흉내가 아니라 제대로 자신의 것으로 흡수한 완벽한 모습에 객석에서는 소름 돋는 무대를 보게 되는 것이다.

연습실에서… 극이 시작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정성화. 지금은 ‘뮤지컬 배우’라는 타이틀로 활동하고 있지만, 그는 개그맨으로 데뷔했다. 다시 말해서 코믹한 요소가 세포 하나하나에 녹아들어 있다. 편안한 연기의 최대 무기는 친숙함. 무대에서 정성화가 발산하는 친숙함은 관객에게 자연스러운 웃음을 주고, 덕분에 그는 뮤지컬 시장에서 어느덧 확고한 팬을 확보하고 있다. 이번에 그가 돈키호테로 캐스팅된 것은 그래서 의외면서 한편으로는 끄덕끄덕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풍부한 성량이 돋보인 정성화

정성화가 보여준 돈키호테는 역시나 편안하고 친숙했다. 살짝 머릿속이 어지럽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할아버지다. 게다가 그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웃기다. 멍한 표정, 팔다리가 따로 노는 몸짓은 잔잔한 미소를 짓게 한다. 가장 돋보인 부분은 정성화의 성량. 우렁찬 성량에 널따란 LG아트센터가 쟁쟁 울린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배역 역시 연기자를 거듭나게 하는지, 마지막 무대 인사 때 늠름한 정성화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이상과 현실에 대한 생각

이번 무대의 포인트는 역시 돈키호테가 거울의 기사 앞에 선 모습일 것이다. 자신을 늠름한 기사로만 알던 그는 거울 속 늙고 볼품없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몹시 괴로워한다. 그리고 몸져누워 시름시름 앓는다. 정신분석가 발린트는 ‘자기가 세워놓은 이상과 지금 서 있는 현실 사이의 괴리가 너무 커서, 도저히 그 차이를 메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감을 느끼는 것이 우울증의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돈키호테에게는 결국 죽음에 이를 절망감을 주었다. 이상 세계… 나는 가끔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혀야 하는 걸까 고민한다. 동화책에 나오는 이상적인 세상은 없지 않던가. 어떤 아이는 분명히 그 괴리감에 괴로워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모두 꿈을 꾼다. 비록 그것이 이룰 수 없는 환상이라 해도, 이제는 더 이상 바라거나 기다리지 않는다 해도, 꿈은 그저 마음속에 품어보는 것만으로도 희망을 주며, 온전히 내 것이니까. 돈키호테는 알돈자가 찾아와 “당신은 나의 기사입니다”라고 말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당당한 기사로 되돌아간다. 그렇게 가장 행복한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돈키호테를 연기한 세르반테스는 죄수들에게 무죄를 인정받는다.

당신의 이상 세계는 어떤 곳인가? 또한 지금 밟고 서 있는 현실은 어떤가? 나는 이상주의자다. 그래서 몹쓸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는지 모르지만, 제아무리 냉철한 현실주의자라도 돈키호테가 부르는 ‘이룰 수 없는 꿈’을 듣고 울컥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 싸움 이길 수 없어도 / 슬픔 견딜 수 없다 해도 / 길은 험하고 험해도 /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 힘껏 팔을 뻗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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