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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 - 어른들의 세계를 엿보는 아이들의 섬

동시상영관은 빌딩과 빌딩 사이로 얽히고설킨 도심의 길을 따라가는 아이들이 만나는 첫 번째 장소였을 뿐이다. 동시상영관이 시들해질 때, 아이들은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도시의 길이 반드시 지나는 그곳, 세운상가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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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좌우로 꼬며 말을 달리는 고난도 기술을 선보인 안소영(1982)에 관해선 이미 말한 바 있다 침대에 누운 그녀가 말 탄 꿈을 꾸는 것인지, 말을 모는 그녀가 침실 꿈을 꾸는 것인지를 중3이 다 말할 수야 없었겠지만, 동시상영관은 돌아온 외팔이와 안소영 때문에 후끈 달아올랐다

1967년생 ‘권혁웅’의 『마징가 계보학』에 실린 시 ‘애마부인 약사(略史)’의 일부다. 권혁웅이 그랬듯 1980년대에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던 도시의 아이들은 ‘동시상영관’에서 어른들의 세계를 훔쳐봤다. 1대 애마 ‘안소영’, 2대 애마 ‘오수비’, 3대 애마 ‘김부선’, 그리고 ‘엠마누엘’이자 ‘차타레 부인’이면서 우리들의 ‘개인교수’였던 ‘실비아 크리스텔’을 멋대로 제 애인으로 삼아버렸다.

동시상영관은 도심에서 떨어진 변두리의, 권혁웅의 같은 시집에 실린 ‘세상의 끝’이란 시에서 말하듯, “어디나 연애담을 담고” 있을 것 같은 삼거리에 주로 있었다. 동시상영관은 연소자도 관람할 수 있었던 홍콩무술영화나 공포영화를 양념처럼 끼워, 공식적으로는 연소자 관람불가였던 ‘에로영화’를 동시 상영하며 사타구니가 가려웠던 도시의 아이들을 유혹하였다. 아이들은 극장 안 어둠 속에서 금지와 용인 사이에 놓인 경계의 줄을 아슬아슬하게 타곤 하였다. 가끔은 몽둥이를 든 학생주임의 급습에 놀라 줄에서 미끄러진 아이들이 반성문을 쓰고 화장실 청소를 하곤 했다.

그러나 그도 잠깐, 동시상영관도 시들해지면 도시의 아이들은 어디로 갈까. 어른들은 알려주지 않는 어른들의 세계를 엿보고 싶어 하는 도시 아이들의 1980년대식 욕망의 스타일은 무엇이었을까.

자연(自然)이란, 그 한자가 뜻하는 것처럼 “스스로 그러한 것들로서 사람의 힘이 더해지거나 보태지지 않은 것”을 말한다. 네이버 사전은 “나와서, 자라고, 쇠약해져, 사멸하며 그 안에서 생명력을 가지고 스스로의 힘으로 생성, 발전하는 것”이라 한다. 이런 뜻에서 본 자연은 하늘과 바다와 땅이며 산과 들과 바람이고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대지나 숲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대지와 숲에 사람들의 집이 세워지고, 그 수가 많아지고 그 높이가 하늘에 닿을 정도가 되어 빌딩이 되고, 그리하여 빌딩이 숲을 이루어 도시가 되고, 그 도시의 빌딩 사이사이로 길이 미로처럼 꼬여갈 때, 아이들의 자연은 무엇인가.

도시의 아이들에게 대지는 더 이상 자연이 아니다. 그들에게 ‘그 자연’은 교과서 속에 있는 것일 뿐이다. 도시의 아이들에겐 바로 도시가 자신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스스로 그러한 것들로서, 스스로의 힘으로 생성하고 발전”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겐 도시에서 자라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빌딩이다. 도시의 아이들은 더 이상 하늘과 바다와 땅을 알지 못하며, 그것들을 노래하지 않는다. 대지의 아이들은 지평선과 수평선 너머의 세상과 사람을 동경했지만, 도시의 아이들은 그리하지 못한다. 이미 도시 아이들의 시선은 사방으로 솟아오른 빌딩에 막혀 길게 뻗지 못한다. 도시의 아이들에게 허락된 것은 자신의 앞으로 열린 골목길이다. 그 길이 어디로 연결되는지 아이들은 모르지만, 아이들은 빌딩 사이사이로 미로처럼 꺾여 사라지는 그 길의 끝이 궁금하다. 아이들은 그 길의 끝에, 바람결이 실어 나르는 어른들의 어떤 세계, 어른들이 절대로 말해주지 않는 세계가 있을 것이라 여긴다.

동시상영관은 빌딩과 빌딩 사이로 얽히고설킨 도심의 길을 따라가는 아이들이 만나는 첫 번째 장소였을 뿐이다. 동시상영관이 시들해질 때, 아이들은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도시의 길이 반드시 지나는 그곳, 세운상가를 만나게 된다.

종로 4가에 있는 세운상가는, 1964년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김현욱이 종로 일대의 윤락가 일소 차원에서 김수근에게 설계를 맡겨 1968년에 완공한 주상복합건물이다. 연예인이나 대학교수들이 입주하면서 서울의 대표적인 명소가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강남으로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곧 슬럼이 되어 청소년을 대상으로 음란서적을 파는 상인들이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도시의 아이들에게 ‘신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미국판 마분지 소설 휴먼 다이제스트로 영어를 공부했고 해적판 레코드에서조차 지워진 금지곡만을 애창했다 나의 영토였던 동시 상영관의 찌린내와, 부루라이또 요코하마 양아치, 학교의 개구멍과 세운상가의 하꼬방, 난 모든 종류의 위반을 사랑했고 버려진 욕설과 은어만을 사랑했다 나는 세운상가 키드, 종로3가와 청계천의 아황산 가스가 팔 할의 나를 키웠다 청계천 구루마의 거리, 마도의 향불 아래 마상기와 견질녀, 꿀단지, 여신봉, 면도사 미스 리 아메리칸 타부, 애니멀, 뱀장어쑈, 포주, 레지, 차력사……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 등을 연출하여 영화감독으로 더 유명해진 ‘유하’의 시집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에 실린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3’의 한 대목을 행 구분없이 옮겨 적은 것이다. 1995년 발표한 이 시집은, 물론 이 시집이 처음은 아니지만, 통속적인 대중문화의 아이콘을 공공연하게 시적 대상으로 끄집어 올렸다. 유하로 인해 시적 대상이 된 이것들은 시에 대한 대중의 일반적인 기대와는 다르지만, 1980년대에 소년과 청춘의 시기를 보낸 이들에게는 익숙한, 그러나 공공연하게 밝힐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해적판 레코드, 동시상영관, 만화방, 포르노 등이었다. 그리고 이것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세운상가였다.

유하는 시집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을 통해 자신은 ‘할리우드 키드’보다 한 차원 더 ‘밑바닥스러운 세운상가 키드’였다고 고백한다. 시인이 자신의 팔 할을 키웠다고 말하는 세운상가는 시인과 함께 동시대의 거리를 헤매고 다녔던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아이들에게 알려주지 않는 어른들의 세계로 갈 수 있는 비밀의 장소며, 사회가 금지하는 것을 구할 수 있는 만물상이었다.

세운상가 한 바퀴만 돌면 미사일은 물론 잠수함을 만들 수도 있다는 말처럼 세운상가에서는 구할 수 없는 물건이 없었다. 세운상가에 없는 것은 세상에 없는 것이라는 말은 빌딩 숲을 헤매며 어른들의 세계를 기웃거리는 아이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존재하지만 아이들에게는 금지되어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던 그것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을 다녀온 아이들은 보물섬을 찾아 대양을 가로지르며 수많은 위기를 헤쳐 가며 보물을 가지고 귀환한 ‘해적’의 영웅담 같은 것을 토해 내었다.

네가 욕망하는 거라면 뭐든 다 줄 거야 환한 불빛으로 세운상가는 서 있고 오늘도 나는 끊임없이 다가간다 잡힐 듯 달아나는 마음 사막 저편의 신기루를 향하여, 내 몸의 내부, 어두운 욕망의 벌집이 웅웅댄다 그렇게 끝없이 웅웅대다가 죽음을 맞으리라 파열되는 눈동자, 충동의 벌떼들이 떠나가고 비로서 욕망의 거울은 나를 놓아줄 것이다

대지의 아이들이 바람결에 실려 오는 지평선과 수평선 너머의 세상을 향해 탈출을 꿈꾸는 것처럼, 도시의 아이들이 어른들의 세계를 찾아 도시의 미로 속에서 헤매며 세운상가를 찾아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까닭에 어른이 되어버린 시인, 그러니까 시인과 같이 나이를 먹어 온 1980대의 아이들이 세운상가를 통해 욕망하고 꿈을 꾸었던 그 시절과 그 시절의 정서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시인은 “청춘의 레지스탕스”를 격렬하게 벌였던 그 시절의 상상력을 긍정한다. 세운상가와는 대척에 서 있는 “호화양장본의 세상”을 상상력이 거세당한, 누렇고 메마른 세계라고 여겨 거부하고 풍자하겠다고 선언한다.

세상이 나를 원하지 않을 것이기에, 태양의 언어 밖에서 난 노래한다, 박쥐의 눈으로 어둠의 광휘를 난 무능력한 자이므로, 풍자한다 호화 양장본 세상의 기막힌 마분지성에 대해서 나는 부유하는 육체의 세운상가 곰팡이를 반성하지 않는 곰팡이, 그리하여 곰팡이꽃의 극치를 향해가는 영혼

지금은 21세기, 2007년이다. 도시의 아이들은 바뀌었다. 그들은 더 이상 종로구 4가에 있는 세운상가를 찾지 않는다. 어른들의 세계를 엿보려고 도심을 헤매고 다니지 않는다. 그들은 도시의 아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방’ 혹은 ‘밀실’의 아이들이 되었다. 2000년대의 아이들은 자신의 방에서 개인용 컴퓨터로 인터넷에 접속한다. 아! 그 속엔 수천수만의 ‘사이버 세운상가’가 있다. 1980년대의 아이들이 빌딩 숲을 지나 도심 가운데에 있는 욕망의 섬 세운상가를 향해 비행했듯이, 2000년대의 아이들은 인터넷 저편에 있는 사이버 세운상가에 로그온하려고 항해한다. 세상은 변해가나 어른들의 세계를 엿보는 아이들의 욕망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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