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폭도가 아니란 말이야”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았습니다. 영화 평론가와 전문기자 출신 기획자의 다소 ‘냉정한’ 평을 읽고 볼까 말까 망설이기도 했지요. <화려한 휴가>는 봐 줘야 할 영화가 아니라 제가 봐야 할 영화더군요. 광주민중항쟁을 다룬 영화가 아니라면 올 들어 세 번째로 개봉관을 찾진 않았을 겁니다.
영화는 관객을 웃기고 울립니다. 어느 순간부터 눈시울이 뜨거웠습니다. 더러 스크린을 응시하지 못해 몇 장면을 놓칩니다. 겁이 나서 그런 건 아닙니다. 두 번 본 <꽃잎>은 볼 때마다 몹시 두려운 장면에서 눈을 질끈 감았지요. 회한 같은 게 밀려왔나 봅니다. 부끄러움과 함께 희생자의 끔찍한 영상이 떠올랐어요. 라스트신 주인공의 외침에 가슴이 시립니다. “우리는 폭도가 아니란 말이야.”
저는 역사책을 잘 안 읽습니다. 이따금 읽어도 감동을 거의 못 느낍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 ‘나와 무슨 상관이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지만, 그것보다는 ‘욕된 역사’가 싫어서겠지요. ‘욕된 역사’라도 보듬어 나아가야 한다면, 광주항쟁관련서로 소설가 황석영 선생이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풀빛, 1985)를 권합니다. 이 책은 아직은 역사책이 아닙니다.
독특한 접근법
영국의 역사학자 클라이브 폰팅(Clive Ponting)의 번역서 두 권은 여느 역사책과 구별된다.
『진보와 야만-20세기의 역사』(김현구 옮김, 돌베개, 2007)는 접근법이 다르다. 20세기의 세계사 집필에는 두 가지 물음이 뒤따른다. “첫째, 그 역사는 어떻게 구조화되어야 하는가? 둘째, 한 세기라는 것이 연구하기에 적합할 만큼 통일성 있는 시기인가?”
연대기적 접근법은 지난 100년에 걸친 세계사의 형성과정을 이해하는 데 별반 도움이 안 된다. 나라별 또는 지역별 접근법은 연대기적 접근법보다는 일관된 틀을 제공하지만, 이것 역시 한계가 있다. 세계에 영향을 미친 공통의 주제, 문제, 힘 같은 것을 확인하자면 여러 차례 반복을 감수해야 한다.
이 책은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만들어낸 ‘세계체제론’의 역사적 접근법에 바탕을 둔다. “1900년과 20세기를 통틀어 세계 구조를 파악하는 가장 좋은 분석법은 그것을 중심, 반주변, 주변이라는 세 개의 불평등한 부분으로 나누는 것이다. 1900년에는 단지 네 주요국,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가 중심부를 지배했다.”
『진보와 야만』은 “첫 장과 마지막 장을 제외하면, 각 장은 자체적으로 시작과 끝이 있는 개별적인 여행으로서 20세기의 풍경을 가로지르며, 도중에 각기 다른 장소를 방문한다. 몇몇 경로는 서로 교차하거나 같은 풍경을 다른 입장에서 조망한다. 각 장은 독립적이며 각각 별도로 읽을 수 있다.”
이 여행은 우선, 1900년의 세계를 살핀 다음, 근본적인 사회적?경제적 요인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특히, 2부의 마지막 장인 「사회들」에선 20세기에 일어난 커다란 사회적 변화를 다루는데 노동의 본성, 문맹률, 도시화, 여성의 지위 변화, 여가와 범죄의 측면이 그것이다.
3부는 국제적 이슈를 검토한다. 거대 제국과 그것의 붕괴, 민족주의의 영향, 지구적인 세력 균형의 변화, 20세기에 발생한 갈등의 본성 등이 그런 주제다. 국내사의 주제를 다룬 4부는 전통적인 정치구조와 사상의 존속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어 20세기 고유의 ‘철학’인 파시즘을 살피고, 20세기의 가장 일반적인 정부 형태인 독재의 변종을 검토한다.
“이 책은, 조심해서 다루어지기만 하면 20세기는 역사적 분석의 합리적인 단위가 될 수 있다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그렇다고 1900년이나 2000년을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여기진 않는다. 1900년과 2000년은 단지 숫자가 딱 떨어지는 연도일 따름이다. 하여 20세기 초에 나타난 중요한 추세를 확인하고자 19세기 후반을 되돌아보고, 책의 말미에선 21세기 초의 모습을 이미 규정하고 있는 핵심적 추세를 확인하려고도 한다.
흥미롭고 의미 있는 통계숫자 각 장마다 고유한 주제에 적합한 별도의 연대기가 있다. “한 세기의 상대적으로 ‘중립적’인 연대기적 틀을 사용하면, 세계사를 하나의 지리적 영역의 역사 혹은 경제적?군사적?외교적 혹은 어떤 것이든 한 가지 유형의 역사에 적합한 프로크루스테스적 침대에 억지로 끼워 맞추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세계사를 다루는 이 책은 각 장마다 국제적 틀을 채택하고 있으며, 세계의 상이한 부분들에서 일어난 다양한 추세가 미친 다양한 영향을 평가하고자 했다.” 클라이브 폰팅은 그의 책을 읽을 주된 독자층으로 서유럽과 북미, 그리고 호주의 교양 있는 중산층 시민을 꼽는다. 그래도 그는 20세기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경우,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윤택한 삶은 늘 운 좋은 극소수에 국한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이 책은 해석을 위한 하나의 시도이며 주로 이차적인 자료에 의존했다. 이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나는 내가 읽은 모든 책들에서 정보를 얻었지만 그중 일부만이 추가 독서를 위한 안내자료로서 부록에 실렸다. 나는 주석으로 책을 지나치게 두껍게 만들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주석을 달려고 하면 끝도 없기 때문이다.”
669쪽에 이르는
『진보와 야만』의 방대한 분량에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을 듯싶다. 각 장의 분량은 그리 길지 않은 데다 쉬운 문체여서 잘 읽힌다. 논의의 재료로 제시된 딱딱해 보이는 각종 통계숫자와 역사적 사실에선 흥미로운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꽤 오랫동안 20세기의 핵심 산업은 자동차 생산이었다. 자동차 산업에는 승용차와 트럭의 생산뿐만 아니라 차량 정비, 도로 건설, 연료 공급 같은 자동차 보조 산업을 포함한다. “1938년에 생산된 철강의 절반, 고무의 4/5, 판유리의 2/3, 그리고 니켈과 납의 1/3이 자동차 생산에 투입되었다.”
1982년 1,410억 달러에 이르던 미국의 국외 순자산은 10년 후 1조 달러의 순부채로 전환되었다. 그런데 “미국의 만성적인 무역?재정 적자를 보전(補塡)해 준 것은 일본, 서독, 남한, 타이완 시민들의 저축이었다.” 20세기 말 미국, 일본, 러시아 이 세 나라의 공업 생산이 세계의 절반을 차지했다. 우리나라는 세계 공업 산출량의 1%에도 못 미쳤다.
야만과 진보의 공존“이 책의 주요 주제는 진보와 야만 사이의 투쟁이다.” 5부 ‘회고와 전망’을 독차지한 「2000년」이 표제인 22장은 플로베르의 미완성 장편소설
『부바르와 페퀴셰』의 타이틀 롤이 논의를 이끈다. 부바르가 낙관론을 상징한다면, 페퀴셰는 비관론을 대변한다. 20세기를 보는 클라이브 폰팅의 시선은 페퀴셰 쪽으로 기운다.
“20세기에 일어난 기근들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보수적으로 추산하더라도 최소한 1억 명은 기근으로 죽었을 것이다. 기근에 처했던 사람들의 수는 사망자 수보다 10배는 더 많을 것이다. 일생 동안 배고픔과 반(半)아사 상태에서 산 사람들의 수는 수십억 명에 달한다. 이 끔찍한 통계는 20세기 내내 세계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진보가 얼마나 제한적이었으며, 삶이 얼마나 야만적이고 불안정하며 고되고, 또 종종 극히 짧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책의 결론이기도 한, 클라이브 폰팅의 단기 전망 역시 그리 밝지 못하다. “20세기 동안 세계가 진화해온 길과 세기말 경제력과 정치력의 분포를 고려해볼 때, 세계는 다음 수십 년 동안에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한 줌의 소수에게는 진보로, 압도적 다수에게는 야만으로 다가올 공산이 크다.”
녹색의 눈으로 본 세계사『진보와 야만』의 4장은 「환경」이 주제다. 우리에게는 깨끗한 물과 식수를 오염하지 않는 하수시스템이 필요하다. 하지만 20세기 내내, 세계 인구의 압도적 다수가 이 두 가지 기본적인 환경적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 ‘더스트볼(먼지구덩이)’은 미국판 황사현상이고, 중국의 봄갈이 먼지는 하와이까지 날아간다.
“열대림은 엄청나게 생산적인 생태계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영양소는 토양이 아니라 나무와 풀에 보존되어 있다.” 따라서 나무와 풀이 없어지면 기저 토양이 얇은 까닭에 작물과 풀이 자랄 수 있는 기반이 취약해진다. 자동차 보유 대수의 증가는 도시의 주요 오염원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어떤 정부도 차량 보유를 제한하려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따라서 통제 조치는 원인보다는 증상을 겨냥한 기술적 해결책에 집중되었다.”
『진보와 야만』의 4장 「환경」은
『녹색세계사』(이진아 옮김, 그물코, 2003)의 압축판이랄 수 있다. 클라이브 폰팅이
『녹색세계사』를 집필한 동기는 이렇다.
“현재의 환경 상태와 앞으로의 전망에 대한 책은 많아도,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거나 환경이 어떻게 인간의 역사를 규정해 왔는지를 파고든 책은 거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사실들에 대해 기술하면서도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질문을 던진 책은 아예 없었다. 그래서 나는 ‘녹색(환경)’의 시각에서 세계 역사를 주욱 훑어 주는 책이 꼭 필요하다고 깨닫게 되었다.”
『녹색세계사』 또한 분량이 만만치 않지만,
『진보와 야만』보다 더 잘 읽힌다. 쉽고 재미있는 데다 본질을 꿰뚫고 있어서 그러리라. 지구에 빙하기가 찾아오는 것은 지구의 공전 궤도와 관련된 다양한 천문학적 주기 때문이다. 지구 규모의 기후 변화는 9~10만 년과 2만 1000년마다 일어나는 공전 주기의 변화와 4만 년을 한 주기로 하는 지구 자전축의 기울기 변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지구는 닫힌 체계이다. 비록 태양이 생명체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해 준다고는 하지만 그 밖의 모든 자원은 유한하다. 지구가 닫힌 체계라 함은 아무것도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뜻도 된다.” 요즘 사람들이 농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많은 노동이 필요해서라는 지적과 ‘지혜 있는 인간(호모 사피엔스)’은 터무니없는 자화자찬이라는 일갈은 내 맘에 쏙 든다.
『진보와 야만』의 표지 날개 지은이 소개글 끝 문장은 클라이브 폰팅의 이력에 약간의 혼란을 불러온다. “대처 행정부 당시 영국 국방부 차관보로 근무했으며, 1985년에는 당시 영국이 맺은 비밀 조약을 폭로해 기소되기도 했다.” 도서출판 심지에서 펴낸
『녹색세계사』(이진아 옮김, 1995)의 책날개 저자소개란에선 이를 좀 더 분명히 밝힌다.
“1984년까지 15년 동안 국방성의 고위관리로 일했다. 그는 포클랜드전쟁의 진실을 국방성이 숨기려 하자 아르헨티나 선박인 제너럴 벨그라노 호의 침몰에 관한 문서를 노동당 의원에게 (건네) 폭로했다. 이 때문에 그는 기소되었으나 배심원들은 무죄라고 판결하였다. 그는 재판이 끝나자마자 이 재판을 다룬 『알 권리(The Right to Know)』라는 책을 썼고 큰 호평을 받았다. 역사와 영국 정부에 관한 저술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으며 환경문제 전문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