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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 한옥의 멋이 살아있는 문학관 - 한무숙문학관을 다녀와서

한무숙문학관은 1993년 74세로 별세한 故 한무숙 작가의 문학과 삶을 기리고자 남편 백농 김진흥 선생님이 만든 문학관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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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혜화역에서 내리면 시끌시끌 복잡한 젊음의 거리가 한눈에 들어오지만 살짝 한 발짝 벗어나 혜화초등학교 쪽으로 올라가다가 유림문구에서 골목길로 들어서면 아파트와 빌라 사이로 고즈넉한 한옥이 눈에 먼저 들어온답니다.

늘 가는 대학로에 뭔가 색다르고 멋진 장소는 없을까 하다가 찾은 곳이 있습니다. 이번에 새 단장을 마치고 재개장한 ‘한무숙문학관’이 바로 그곳입니다. 문학관이라고 하면 왠지 그 단어부터 딱딱한 인상을 주는 것 같아 같이 간 딸아이도 오늘 가는 곳이 문학관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재미없어”라고 말하더군요.

한무숙문학관
한무숙문학관 앞에서

그러나 골목길에 빠끔히 인사를 하며 정겹게 맞이하는 한옥을 보자 저보다 더 좋아하네요. 벨을 누르니 “누구세요?”라고 물어오는 목소리가 무척 친절해서 그만 “저요”라고 대답하고는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마치 친구 집에 오랜만에 찾아간 것처럼 저도 편안했나 봐요.

삐걱거리는 한옥 문을 열고 나온 분은 한무숙문학관에서 학예사로 일하는 최지숙 님이셨어요.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데 둘째가 환호성을 지릅니다. “야, 붕어다!” 한옥 마당에는 작고 예쁜 연못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빨간 금붕어가 한가롭게 헤엄치고 있었어요. 그 옆에는 예쁜 꽃과 나무가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툇마루에 앉아서

“더울 텐데 찾아오느라 고생 많았지요?” 한무숙문학관의 관장이신 김호기 님이 툇마루를 가리키셨습니다. 잠시 툇마루에 앉아 숨을 고르고 나서 문학관을 둘러보았습니다.

한무숙문학관은 1993년 74세로 별세한 故 한무숙 작가의 문학과 삶을 기리고자 남편 백농 김진흥 선생님이 만든 문학관이랍니다. 모두 3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졌는데 일단 제2전시실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그곳은 작가가 생전에 손님을 맞이하던 응접실을 재현해 놓은 곳이라고 합니다.

한눈에 봐도 고풍스러운 응접실 의자에 앉아 있으니 이곳을 거쳐 간 손님들은 과연 누구일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때 김 관장님이 비닐봉지를 들고 오셨습니다. “아이들 더울까 봐 내가 요 앞에 뛰어가서 아이스크림을 사왔지, 여기는 한옥이라 에어컨이 없어, 선풍기가 있기는 한데…” 하시며 맛난 아이스크림을 건네주시는 관장님 덕에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아이스크림보다 더 맛나고 재미난 관장님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답니다.

관장님 내외분, 학예사 선생님과 함께

“이곳에 왔던 사람들은 정말 많지. 여기가 대학로 쪽에 서울대가 있었잖아요. 그래서 서울대 문과대학생들 아지트였지 뭐. 황동규 씨도 단골손님이었고 천상병 시인은 아주 여기서 살다시피 했지.”

어느새 함께 자리한 부인과 나란히 앉으셔서 옛날을 회상하며 열심히 이야기를 해주시는 관장님을 통해 무엇이든지 넉넉히 퍼주고 도움을 아끼지 않으셨던 한무숙 선생님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답니다. “여기가 원래는 집 앞이 앵두밭이었다오. 그쪽에는 참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지. 그런데 우리는 그들과 허물없이 지냈어. 김장 때 이북서 피난 왔다는 아주머니가 해주신 보쌈김치는 정말 지금도 입에 침이 고여. 지금 보쌈김치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지. 또 겨울이 되기 전에 그땐 장작을 때고 살았는데 장작을 패주러 오는 사람들도 있었지. 장작을 힘차게 패는 소리랑 마당을 둘러서 장작이 이만큼 쌓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 이웃과도 허물없이 지내던 나날이었지만 지금은 고층건물이 들어서고 이웃 간에 왕래도 없어지니 사람 사는 맛이 안 난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유명인이라서 혹시 불편하다거나 불만 같은 것은 없으셨느냐는 물음에 “난 오히려 고마웠지. 유명한 부모를 둔 게 나에게는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참 아이들에게 자애로운 분이셨어” 하며 지난날을 회상하셨습니다.

그러고는 한무숙 님이 김 관장 내외가 프랑스로 발령을 받아 나갔을 때 어린 손자들을 보러 왔던 일화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우리 큰녀석이 그때가 70년대니까 프랑스에 초등학교 1학년으로 입학을 했는데 많이 낯설었나 봐. 말도 안 통하고 글자도 모르겠고 하니까 첫 받아쓰기 시험에서 시험지에 그냥 ‘대한민국 만세’라고 한 바닥을 메우고 왔더래. 그 이야기를 들으신 어머니가 손자를 위해 동화를 하나 지어주셨지.” 그게 바로 향정 선생님이 쓴 동화 「대한민국 만세」라고 합니다. 먼 타지에서 외로웠을 손자를 생각하며 동화를 써 주신 할머니의 따뜻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대목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 최지숙 학예사님의 안내로 제1전시실을 둘러보았습니다. 어릴 때 저도 드라마로 본 기억이 나는 『생인손』이라는 작품부터 『만남』『역사는 흐른다』 등의 책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전시실에는 작가의 친필 원고도 있었는데, 고운 모습의 향정 선생님의 필체는 의외로 남성의 것처럼 힘이 넘쳐 보였습니다. 지금이야 컴퓨터 작업으로 쭉 썼다가 금방 지우고 손쉽게 원고를 쓰지만, 옛날에는 이렇게 원고지를 하나하나 메워가며 틀린 곳은 줄을 긋기도 하고 빠진 글자를 채워 넣기도 하며 손으로 일일이 썼다는 것이 딸아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열심히 들여다보더군요.

제1전시실에서
전시실에서 향정 선생님의 작품을 보는 아이.
뒤에 보이는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향정 선생님의 친필 원고
동아일보 김말봉의 연재 소설 『밀림』에 그린 향정 선생님의 삽화

외국 여행이 그리 쉽지 않던 시절, 외국 여행을 자주 하셨던 향정 선생님이 여행 중에 메모를 해놓은 수첩도 보았습니다. 가로쓰기를 하는 수첩에 세로쓰기로 글을 채워 놓은 것이 둘째는 재미있다고 하네요. 그 외에도 옛날 여권과 필기도구, 여러 가지 잡화와 향정 선생님이 직접 그린 그림이 있었습니다. 참, 향정 선생님은 문학가로서 뿐만 아니라 화가로서도 재능이 있어서 초등학교 2학년 때인 1926년에 베를린 만국 아동그림전시회에 입상을 할 정도였다고 하네요. 그리고 19세 때인 1937년 동아일보에 연재 중이던 김말봉 님의 소설에 삽화를 그리기도 하셨다니 정말 다재다능한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향정 선생님의 여러 유품

다시 자리를 옮겨 예전 사진이 걸려 있는 곳으로 가보았습니다. 故 육영수 여사와 찍은 사진, 이방자 여사와 찍은 사진도 보고 선생님의 자제분들 사진도 구경하고 나니 한쪽 벽에 ‘한무숙 문학상 수상작품집’이라는 글씨가 보였습니다. 한무숙문학관 외에도 '한무숙 문학상'을 제정하여 1995년부터 매년 시상을 하고 있다고 하셨어요. 박완서, 김원일, 이경자, 이순원, 최일남, 박범신, 구효서 등 쟁쟁한 작가들의 작품이 모여 있는 서가를 지나 달팽이처럼 둥글둥글한 계단을 올라가니 드디어 작가의 서재가 나왔습니다. “와, 나도 이런 방 하나 있으면 좋겠다!” 저도 모르게 탄성이 나오더군요.

서재에는 한무숙 문학상 작품집이 꽂혀 있다.

양쪽에 자신이 즐겨 읽는 책이 한가득 꽂힌 책꽂이가 있고 햇볕이 환하게 들어오는 넓은 창이 있고 그 앞에 앉은뱅이 탁자가 있는 작은 서재는 그야말로 향정 선생님의 자취가 그대로 묻어 있는, 비밀스럽다면 비밀스러운 공간이었습니다. 책상 위에는 평소 즐겨 쓰는 필기구와 메모지, 연필깎이, 문벼루와 먹, 붓이 꽂힌 필통이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향정 선생님의 서재에서
한옥에서의 정겨운 한때
한무숙문학관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정원에서

집에 갈 시간이 되어 다시 마당을 보며 툇마루에 앉아 있으니 왠지 마당의 연못이나 지붕 처마, 창문 하나하나가 다르게 보였습니다. 다음에 꼭 다시 찾아오라는 김 관장 내외의 정다운 인사를 뒤로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딸아이는 슬쩍 제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하네요.

“엄마, 내가 엄마한테도 저렇게 멋진 서재 하나 꼭 만들어 줄게.”

어느새 제 마음을 딸아이에게 들켜버렸나 봐요. 가을이 찾아올 때 다시 한 번 아이들과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푸근한 마음으로 돌아왔답니다. ^^

[TIP]
* 한무숙문학관(//www.hahnmoosook.com/)
  - 이용안내: 화요일~일요일 10::00~17:30 (단, 전화나 이메일로 미리 예약해야 함)
  - 전화: 02-762-3093 / 이메일: hms@hahnmoos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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