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에 한길사는 박태순 선생의 『국토와 민중』을 펴냈다. 저자가 월간 <마당> 창간호부터 15회 연재한 것을 정리한 것이었다. 오늘의 사상신서 제56권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책을 냈지만 박태순 선생의 『국토와 민중』을 참으로 소중하게 생각한다.
해방 이후 우리 사회가 펴낸 책 가운데 『국토와 민중』을 중요한 성과로 꼽고 싶다. 명저의 반열에 서는 역저라고 생각한다. 1970년대 초반에 『작가기행』을 써내어 이 국토에 굳건히 서는 기행문학의 가능성을 제시한 저자는 『국토와 민중』으로 국토문학·국토인문학의 새 장르를 구축한 빛나는 성과를 이뤄낸 것이다.
나는 그 책을 펴낸 이른 봄날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북한산록에는 벚꽃이 만개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 늦게 나는 저자 박태순 선생과 북한산을 오르고 있었다. <일간스포츠>의 박인숙 기자가 동행했다. 우리는 봄의 산록에서 새 책의 출간을 자축하면서 의기투합했다.
“책만을 낼 것이 아니라 우리 함께 손잡고 국토를 걷자. 이 아름다운 산하와 국토를 걸으면서 우리의 역사와 우리의 삶을 온몸으로 호흡하는 국토인식운동을 펼치자!”
그렇다! 이 국토는 오늘에게 살아 움직이는 가장 싱싱한 역사교과서일 것이다. 아니, 역사교과서로서뿐 아니라 종합교과서일 것이다. 나는 애초부터 역사 강좌 참여자들과 더불어 역사의 현장을 답사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머리로 인식하는 역사가 아니라 민족사의 현장에서 가슴으로 호흡하고 온몸으로 체험하는 역사인식운동을 시도해보자는 것이었다. 삶과 역사는 전체성·총체성으로 상호연계된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한길역사기행! 한길역사강좌와 더불어 진행된 한길역사기행은 엄혹한 80년대에 우리가 펼친 참으로 신명나는 또 하나의 역사운동·문화운동이었다. 한길역사기행은 우리 국토에서 펼쳐진 아름다운 한편의 축제였다. 출판인·출판사가 저자·필자·독자들과 더불어,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고 역동적인 역사라는 존재 속으로 들어가서, 오늘 우리 삶의 현실과 의미를 토론하고 체험하는, 열려 있는 인문학 축제였다.
동학농민전쟁의 전적지를 찾아서
| ▲ 동학농민혁명을 촉발시킨 만석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탑 앞에 서 있는 한 농민 ⓒ 한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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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8월 24일, 25일, ‘동학농민전쟁의 전적지를 찾아서’를 주제로 하는 제1회 한길역사기행이 시작되었다. 역사 강좌 참여자들 및 일반 독자 40여 명이 낮 1시 30분에 한 대의 버스로 서울을 떠났다. 동학농민군이 반봉건·반외세의 깃발을 높이 들어올렸던 그 호남평야 역사의 땅에는 동학혁명을 연구하는 향토사학자 최현식 선생과 대하소설 『녹두장군』을 쓰고 있던 전남대 송기숙 교수가 안내와 강의를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역사 강좌에 참여하던 박현채·박태순 선생 등도 토론자로 동행했다.
작열하는 8월의 더위 속에 사람들은 동학혁명군의 발자취를 따라 걸었다. 일행은 고창·고부·황토재·만석보·익산·금산사와 전봉준 장군의 생가를 돌면서 90년 전의 민족의 위대한 역사풍경을 극체험하는 것이었다. <한국경제신문> 문화부에서 일하던 차미례 기자를 비롯해 <중앙일보> 문화부 이근성 기자 등 여럿이 동행 취재했다.
첫날 답사를 끝내고 우리는 금산사 앞의 한 여관에서 여장을 풀고 밤을 새면서 강의·토론을 펼쳤다. 이튿날 다시 동학군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참으로 신명나는 이틀간의 역사기행이었다. 송기숙 교수는 전봉준 장군의 생가에서 감격한 어조로 나에게 말했다.
“김 사장, 역사기행 이거 기막힌 프로그램이오!”
우리의 이 같은 기획이 하나의 문화운동으로 가능했던 것은 그 시대의 상황과 조건이 이미 그런 프로그램을 요구하고 있었기도 했지만, 그것을 밀어준 일단의 의식 있는 기자들이 존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이후에 전개된 한길역사강좌·한길역사기행은 늘 언론이 보도해줌으로써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중앙일보> 이근성 기자의 문제의식과 보도를 통한 성원은 한길역사강좌·한길역사기행을 한 시대의 역사적 사건으로 일으켜 세우는 한 동인이 되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나는 그의 동지적 이해와 성원에 대해 늘 감동하고 있다. 그의 문제의식은 곧 우리의 기획과 프로그램을 운동으로 만드는 힘이 되었다.
그는 1985년 8월 28일에 제1회 한길역사기행을 한 폭의 그림처럼 보도했다. 나는 그 글이 참으로 중요한 기사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그의 기사를 다시 읽으면서 한 여름날 호남 들판에서 펼쳐진 80년대의 신명나는 한 풍경을 다시 그려보고 싶다.
“서울은 아직도 찌고 있었다. 그 다함을 아쉬워하듯 기승을 떠는 노염(老炎)의 눈초리를 피해 서울을 빠져나간 것은 8월 24일 하오 1시 30분. 동학농민전쟁 전적지(戰跡地)로의 기행.
일행은 40여 명. 대형버스 한 대를 꽉 채웠다. 한길역사강좌 제1기 수강생들이 중심을 이뤘다. 주로 교사·대학생·회사원들. 김언호(한길사 대표) 씨가 한마디 했다.
‘만남과 토론의 판을 벌이려 한다. 이것은 또 하나의 공동체 운동이기도 하다. 역사를 가슴으로 배우고자 한다.’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를 거쳐 놀속의 만경강(萬頃江)을 건넜다. 금산사(金山寺)에 도착했다.
‘두 절은 민중불교적 성격을 띠는 미륵불교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미륵불은 한국적 메시아 사상이다. 백제불교의 진면목을 과시하고 있다.’
동행한 박태순 씨(소설가)의 말이다.
‘금산사의 의미는 중요하다. 미륵신앙의 본산이다. 후천개벽사상은 평야지대로 진출했으며 농민들은 나름대로의 신심을 구체화, 동학농민전쟁의 동력이 됐다.’
박현채(경제평론가)씨의 이야기.
밤 9시가 넘어 내장사에 도착했다. 여기서 1박 하기로 했다. 전남대 송기숙 교수와 향토사학자 최현식 씨(61. 정주시 거주)가 합류했다. 송 교수는 현재 동학농민전쟁관계 소설을 연재 중이며 최 씨는 1957년 이래 혼자서 동학농민전쟁을 연구, 『갑오동학혁명사』란 책을 펴내는 등 업적을 쌓고 있다. 모두 ‘동학의 현장’에 빠삭한 분들이다.
밤 10시 30분부터 송 교수의 강의가 시작됐다. 동학의 남접·북접관계, 전봉준의 출생설과 아버지 전창혁(全彰赫)의 문제, 전봉준의 전략전술과 황룡강 전투 등의 주제를 다뤘다.
이어 토론. 왜 이 지역에서 유독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나. 전봉준의 위대한 지도력 때문인가. 아니면 그럴만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갖고 있었는가. 이 지역의 민중신앙적·사회경제적 뿌리는 무엇인가. 영웅주의 사관에 빠지고 있는 게 아닌가. 주도적 역량은 민중에게서 나오지만 역사변혁의 힘을 조직화할 지도자가 필요한 게 아닌가. 실학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전봉준은 동학교도인가, 아닌가 등의 문제가 제기됐다. 대충 논의를 마무리 지으니 밤 12시 30분이 넘었다.
8월 25일 아침 일찍 황토재로 향했다. 언덕 위에 전적비가 우뚝 솟아 있다. 그 옆 동학농민전쟁을 민족전선(民族戰線)으로 예찬한 고 김상기 박사의 비문이 아침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최현식 씨:황토재에서 내려다보면 당시 전투상황이 선명히 드러난다. 전봉준은 그가 살던 동네라 지리에 훤했다. 저 건너 사시봉에서 관군을 황토재로 유도, 공격을 기다렸다가 되받아쳐 전멸시키는 전법을 썼다.
만석보 옛터로 갔다. 중앙 정계의 든든한 백을 믿고 위세를 떨치던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苛斂誅求)의 표본이다. 이어 전봉준의 구가(舊家)를 찾았다. 버스길의 길목에 크게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전봉준 선생 구가 입구’, 장군이 선생으로 바뀌어 있었다.
송기숙 씨:선생이라니. 전봉준 장군이나 녹두장군이란 호칭은 들어봤어도 선생이란 금시초문이다. 장군을 선생으로 바꾼 것은 새로운 역사적 평가가 아니라 퇴보고 왜곡이다. 백산(白山)에 올랐다. 발 아래 동진강(東津江)이 흐른다. 겨우 57미터 높이지만 정상에 오르면 사방 8개군(당시)이 한눈에 들어온다. 일망무제(一望無際)의 들판. 백산은 그 중앙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황토재 전투를 앞두고 동학군은 이곳에 집결, 전열을 가다듬었다.
송기숙 씨:여시메(旅山峯)는 농민군이 본격적인 선전포고를 한 곳이다. 황토재의 승전보를 접한 농민들은 속속 몰려들고 사기는 충천했다. 전봉준은 농민전쟁의 대의를 한층 선명하게 밝힌 포고문을 발표했다.
마지막으로 선운사(禪雲寺)에 도착. 농민전쟁 2년 전인 1892년 추석 무렵 선운사의 마애미륵(摩崖彌勒) 배꼽에서 조선왕조가 망한다는 비결(秘訣)을 꺼낸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당시 민중을 동원, 관에 대응하는 동학지도층의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
박태순 씨:내 땅을 밟는 것은 하나의 의무다. 동학농민전쟁이라는 한국근대운동의 양상과 고민을 오늘의 시각에서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자.”
호남평야 동학농민군의 함성
| ▲ 전봉준 장군의 생가에서 한길역사기행 일행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 ⓒ 한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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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기행에 동행한 박태순 씨는 이틀간에 우리 일행이 간 곳과 토론한 것을 하나하나 기록하여 ‘호남평야 동학농민혁명군의 함성’이라는 긴 다큐멘터리를 『한길역사기행』 제1집에(1986. 12) 남겼다.
“왜 우리는 현실로부터 몸을 빼내어 역사의 현장으로 나서고 있는가. 고부의 들판, 황토재의 옛 싸움터에서 우리가 진실로 바라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막힌 시대의 갱도라도 뚫어나가는 마음일까. 갑오농민군의 전적지는 역사의 기록 속에 새겨져 있지만,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국토에 그 현장을 살아 남겨놓고 있다. 우리는 다시, 또다시 갑오농민군의 그 싸움터로 찾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어두움을 몰아내기 위한 빛의 줄기를 찾아나서는 일이다. 그 길의 저쪽에 갑오농민들의 행진이 보여 오고 있는 것이다. 고부들판의 농민들 큰 뜻으로 일어섰다는 소식에 접해 그 농민들과 대열을 함께 하기 위해 길 떠나던 사람처럼 우리는 그곳으로 찾아가야 할 것이다.”
당초에 나는 역사강좌에 역사기행을 통합해서 운영하려 했다. 강좌 수강생들과 함께 기행을 참여하게 해서 그 주제에 대한 이해와 의식을 역사와 국토의 현장에서 더욱 심화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학기행을 치르면서 강좌와 기행을 따로 진행하기로 했다. 강사들과 참가자들의 견해도 고려되었다.
매주 수요일에 강좌에 참여하고, 다시 두 달에 한 번 정도 1박 2일의 기행에 참여하는 것은 물리적 시간으로 용이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강좌와 기행을 따로따로 기획하여 진행함으로써 참여의 기회와 폭을 확장할 수도 있었다. 물론 강좌와 기행에 계속해서 다 참여하는 그룹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뜻과 열정을 공유하면서 엄혹한 시절을 사는 동인(同人)들이 되어가는 것이었다.
역사의 현장에서 밤을 같이 나누면서 강의하고 토론하는, 역사의 현장에서 역사정신을 공유하고 생각을 주고받는 역사기행은 강좌의 그것보다 더 열려 있고 호쾌하며 동적인 역사체험이었다. 당초에 한 계절에 한 번쯤의 기행을 구상했지만 독자들의 요구로 한 달에 한 번씩 기획하게 되었다. 80년대 중·후반에 걸쳐 우리 산하, 우리 국토의 전역에서 펼쳐진 한길역사기행을 통해 사람들은 참으로 신비한 역사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우리 산하와 국토의 아름다움이 웅혼하고, 우리 역사와 삶의 찬연함과 생동함을 몸과 정신으로 체득하는 것이었다.
‘유구한 역사와 빛나는 문화적 전통’을 실감하게 되었고, 분단된 남녘의 국토만도 너무나 광활하다는 걸 인식하게 되었다. 1980년대 중후반 나의 지향과 화두는 역사와 국토였다. 살아 있는 역사와 국토, 오늘의 역사와 국토였다.
안동의 병산서원과 도산서원에서
| ▲ 병산서원에서 일박하고 답사에 나서는 한길역사기행 일행 ⓒ 한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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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호남평야에서 동학농민군의 함성을 체험한 우리의 두 번째 한길역사기행은 10월 19일, 20일 ‘안동의 하회마을과 도산서원·병산서원’을 주제로 하여 진행되었다.
지금은 많은 길이 뚫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산하와 국토가 작아졌다. 그 무렵에 서울에서 안동을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말이 연휴가 되면 일찍 떠날 수 있어서 역사기행 일행은 더 많은 현장을 답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보통은 토요일 오후 1시 30분쯤에 서울을 떠났다.
그날 우리 일행이 머물기로 되어 있는 병산서원에 도착했을 때는 밤 11시였다. 지금은 버스가 병산서원 앞까지 들어갈 수 있지만 그땐 하회에서 버스에 내려 밤길을 2킬로미터 정도 걸어가야 했다. 나는 3주일 전에 우리가 기행할 일대와 숙소를 사전답사까지 했다. 특별한 사전 정보와 연계가 없는 한 우리는 사전답사를 했다. 특히 우리가 가는 역사현장이란 일반인들이 가는 곳이 아니었다. 또 큰 버스가 들어가기란 대단히 어려운 길이었다.
작은 일화도 있다. 임진왜란을 주도해서 치뤄낸 명신 유성룡을 모신 병산서원이다. 또 안동이란 조선유학의 근거라고도 할 수 있고, 보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보수적인 전통을 갖고 있었다. 하회 강변에 우뚝 서 있는 병산서원은 참 아름답기도 하지만, 서원의 관계자들은 말하길 여자들은 서원 안에서는 잠을 ?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간곡한 부탁으로 여성들도 서원 안의 방들을 나눠 잠을 자게 되었지만, 우리가 그날 저녁 식사를 끝내고 유현상 안동문화원장의 안동에 대한 소개강의를 끝내고 다시 충북대 유초하 교수의 ‘조선유학의 성격’에 대한 본격적인 긴 강의를 끝내고 나니 새벽 3시 30분이 되었다. 참여자들은 흐트러짐 없이 유 교수의 열강을 끝까지 들었다. 깊은 산 새벽, 서원 대청에서 조선조 성리학의 사상사를 열강하는 강사와 그것에 함몰되어 열심히 메모하며 듣는 동시대들의 그 풍경이 신비롭지 않을 수 없었다.
일행은 병산서원의 아름다운 풍광과 치열한 강의와 토론에 취해서 밤을 새우다시피하고 이튿날 답사에 나서서 하회마을의 골목과 고택들은 물론이고 안동 시내에 있는 독립운동가 이상룡 선생의 생가인 침천각, 퇴계의 사상과 정신이 서려 있는 도산서원을 찾았다. <중앙일보> 이근성 기자가 이번에도 동행해서 아름다운 기사를 10월 22일자 가을문화마당에 실었다.
“국토의 가을은 아름답다. 19일 오후 1시, 서울을 떠나 충주를 지나 이화령(梨花嶺)을 넘어 점촌을 거쳐 안동에 이를 때까지 줄곧 그 생각을 했다. 도서출판 한길사가 마련한 역사기행. 이번엔 안동문화권을 택했다. 안동지방은 한국사상사, 특히 퇴계 이황을 우뚝한 기둥으로 성리학의 거대한 맥을 형성한 땅. 예로부터 조선의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일컬었다. 추로란 공·맹이 태어난 곳. 회사원·교수·소기업가·주부·대학생 등 40여 명의 기행자들이 그 맥을 찾아나섰다.
병산서원(屛山書院) 입교당(立敎堂)의 넓은 마루. 먼저 안동문화원장 유한상(柳漢裳) 씨가 구수하게 ‘안동인 기질론’을 펴보였다. 콩과 보리를 제대로 구별 못하는 어수룩한 사람들을 ‘숙맥’이라고 한다. 안동은 숙맥의 고장이다. 이(利)에 밝지 못하다. 또 안동은 생산성이 낮은 척박한 고장이다. 가난한 땅에서 숙맥스럽게 일하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었다. 자식에게 제일 먼저 굶고도 굶지 않은 체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만큼 명예를 중요시했다. 없는 사람이 명예조차 없으면 어떻게 살아가나. 그러나 권력자에겐 명예를 주지 않았다. 가난하면서도 존경할 만해야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선생이다. ‘선생’이란 아무에게나 붙이는 이름이 아니다. 정말 명예스러운 사람에게만 붙여주는 존칭이었다.
다음은 유초하(柳初夏) 교수가 ‘조선유학의 전개’를 강의했다. 우리는 최근 1백년간 근대를 살아왔다. 의식이나 생활방식·학문방법까지 서양적인 것이 지배하고 있다. 이제 유학·성리학 하면 생소한 것이 되어버렸다. 무가치하고 어려운 것으로만 치부해버린다. 그러나 1백년 전만해도 그것은 이웃끼리 친근하게 나눌 수 있는 얘기의 내용이었다.
고려후기에 도입된 성리학은 16세기, 즉 조선 중기까지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 초 성리학은 길재(吉再)의 문하생들에 의해 전파됐다. 투철한 의리정신과 집요한 실천의지로 무장했다. 중소지주 출신의 지식인(士)계층의 이념적 무기가 됐다. 혈통이나 공훈에 줄을 댄 귀족세력이 감당할 수 없는 우월한 논리로 맞섰다. 성공과 실패를 번갈아 겪었지만 네 차례의 사화(士禍)가 끝날 무렵 결국 조선 중앙 정계를 장악했다.
그러나 사정이 달라졌다. 어제의 ‘야’가 오늘의 ‘여’가 되고 ‘공격’의 입장에서 ‘방어’의 자세로 바뀌었다. 자체 내의 끊임없는 권력투쟁과 자기분열현상이 나타났다. 당쟁의 시작이다. 몰락양반이 양산됐다. 현실비판적인 이들과 계층 상승을 노리는 중인계층의 지도적 이념으로 나타난 것이 실학이다. 이로써 성리학의 역사적 기능은 조선 중기로 끝났다. 성리학이 오늘날 우리 삶에 어떤 빛을 던질지 얘기하기는 조심스럽다. 그러나 형이상학이 파기된 지금, 가치를 포용하는 학문, 만물의 근원에 접근하려고 집요하게 노력했던 학문에 대한 의미를 재음미해볼 수 있지는 않을까. 총체적 진리에 대한 인간의 구원한 바람이기도 하니까.
귀로의 생각은 이랬다. 이 가을 궁핍해져가는 철학적 생산력을 자주 하기 위해서는 한번쯤 밟아볼 만한 땅이 아닐까라고.”
역사기행을 끝내고 서울로 오는 귀로의 버스는 또 하나의 토론의 장이 되었다. 강사 겸 안내로 참여하는 학자나 지식인들과 함께 마이크를 돌려가며 자신의 느낌과 견해를 주고받는 것이다. 나는 으레 맨 앞자리에 앉아 역사기행을 현장지휘하는 ‘안내’였는데, 특히 귀로의 버스에서 마이크를 들고 자기의 소감을 말하는 참가자들의 수준은 한결같이 대단하다는 감동을 받았다. 역사에 취하고 감동했기 때문이었을까, 선남선녀들은 아름다웠다.
지방에서도 제법 많은 사람이 참여하기도 했는데, 지방 참여자들은 버스 속에서의 이 같은 토론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었다. 그날 안동에서 궼울까지 오는 데는 6시간이 걸렸는데, 솔직하게 자신의 견해를 토론하는 버스 속의 풍경 또한 참가자들이 함께 누리는 감동이고 행복이었다.
역사기행이 이렇게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자 고정으로 참여하겠다는 독자들이 늘어나기도 했다. 제3회 한길역사기행은 ‘남한강 유역 민족사의 전개와 민중의 삶’을 주제로 잡았다. 한반도의 고대국가들이 쟁패를 벌인 남한강 유역 이곳저곳을 살펴보는 한편 단재 신채호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는 코스였다. 신경림 시인이 ‘남한강 유역의 민중의 삶과 민요’를 강의했고 고려대 역사지리학과 최영준 교수가 ‘길의 문화, 길의 역사’를, 충주공업전문대 김현길 교수가 ‘중원문화권의 역사와 정신’을 강의했다. 향토사학자 김예식 씨가 안내를 도왔다.
특히 최영준 교수의 길의 역사에 대한 강의는 참여자들 모두에게 길의 역사, 길의 문명에 대한 새로운 눈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길의 역사를 연구한 ‘영남대로’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최영준 교수의 강의는 아주 구체적이고도 새로운 시각이어서 모두 무척 좋아했다.
“우리는 길에서 우리 역사의 파노라마를 볼 수 있다. 이 파노라마에서는 어느 한 시대의 경관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길이 생긴 이후에 일어났던 모든 사실이 나타난다. 길은 규모가 크고 시설이 사치스러운 것보다는 늘 쓰임새가 더 중요하다. 길은 서둘러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때에 충분한 시간과 공을 들여 만드는 것이 좋다. 우리는 서둘러 착수하고 성급히 마무리짓는 습성을 버리고 한번 만들어 자손 대대에 물려줄 수 있는 길을 만드는 전통을 수립할 때가 되었다.”
강진의 유배지문화와 다산사상
| ▲ 다산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하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학문을 닦은 다산초당 ⓒ 한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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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시 한겨울의 국토를 걷기로 했다. 제4회 한길역사기행은 ‘해남·강진의 유배지문화’를 주제로 잡았다. 12월 14일, 15일 다산 정약용이 유배되어 있던 강진의 다산초당과 초의 선사의 백련사, 윤선도의 녹우당, 해남의 대흥사, 국토의 최남단 땅끝마을을 휘날리는 첫눈을 맞으며 가는 것이었다. 한국사 전공자들이나 지식인들 몇몇이 찾아가곤 했지만, 이른바 일반시민들이 이렇게 집단으로 해남·강진을 답사하는 경우는 아마도 우리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서울에서 버스 한 대가 떠나고 광주에서 지방 참가자들이 또 한 대로 참가하는 열성을 보였다. 소설가 송기숙 교수와 다산연구가 박석무 씨, 소설가 박태순 씨, 해인사의 법성·여연 스님이 강사와 가이드로 동행했다. 대흥사 앞 숙소에서 강의와 토론을 끝낸 것이 새벽 1시였다.
박석무 씨의 다산에 대한 열강이 우리들로 하여금 잠을 잘 수 없게 했다. 수난의 세월 속에서 위대한 사상과 정신이 창출된다는 사실을 다산 선생이 증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참가자들의 열기는 한겨울의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80년대에 우리는 이렇게 역사와 토론의 의미를 발견하고 온몸으로 호흡하는 것이었다. 80년대라는 혁명적인 시대적 상황에서 한국사 최고의 사상가 다산의 정신이 서려 있는 강진·해남의 땅을 밟는 것은 우리들에게 하나의 당위였다. 18년이라는 세월과 강진·해남의 그 지역이 다산학을 창출해내는 역사적 동력이었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이론과 정신과 사상의 근거를 사람들은 다산학에서 찾아내려 했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우리의 역사기행은 다양한 주제를 내걸었지만 다산의 강진·해남은 사람들이 늘 찾아가고픈 역사와 사상의 공간이었다. 물론 동학농민전쟁의 무대도 역시 그러했다. 박석무씨는 이렇게 강의를 마감했다.
“다산초당에서 저서가 이루어지면, 그 저서들은 필사되어 글을 아는 전국의 지식인들에게 전파되어갔다. 그러는 과정에서 다산의 논리가 여타의 지식인들에게 스며들었고, 그렇잖아도 당대의 권력계급에 불만을 갖고 저항의 생각을 갖고 있던 호남의 지식들에게는 큰 자극을 주었을 것이다. 한말 호남에서 가장 큰 학파를 이룬 노사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이 『목민심서』를 탐독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사실만으로도 다산 이후의 호남의 정신사에 다산이 끼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고 여길 수 있다. 저항적이고 비판적이던 지식인들에게 다산의 저서가 읽혀졌다고 할 때, 그 자극이 어느 정도에 이르렀을까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조선 중기 이래로 반역향이라는 낙인 아래 오랜 압제와 탄압의 사슬에 얽매어 있던 호남 3걸 및 남인 측 5현의 후예들이, 밑바닥 민중으로 반항적 계층을 이루고 있을 때에, 그러한 자극과 영향은 번져나가 호남에서 발단한 커다란 민중운동인 동학혁명에도 적잖은 역할을 했으리라는 추단은, 결코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말할 수 없으리라.”
정선 아라리의 아름답고도 구슬픈 가사와 가락
| ▲ 정선아라리 기능보유자 김병하 씨가 정선아라리를 부르는 모습 ⓒ 한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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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3월 1일, 2일에 우리는 참으로도 아름답고도 구슬픈 가락을 뿜어내는 정선 아라리의 고장을 찾아가는 길을 나섰다. 나는 정선 아라리의 기능보유자 김병하 씨를 전날 서울로 오게 해서 우리 집에서 같이 자고 함께 동행했다.
고은 시인, 신경림 시인, 인하대 인류학과 김광언 교수 등이 강의와 안내를 맡았다. 서울대 경제학과 변형윤 교수와 서울대 서양사학과 이인호 교수도 참가했다. 연휴라서 아침 일찍 여유롭게 서울을 떠나 강원도의 전통가옥을 살펴보고 오대산의 월정사와 상원사, 평창과 정선을 잇는 비행기재를 넘어 정선으로 들어가는 코스였다.
정선 아라리의 서럽기 짝이 없는 음조는 듣는 이들의 가슴을 흔들어놓는다. 김병하 씨의 정선 아라리는 우리들에게 신비감을 전해주었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가 질려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몰려든다
명사십리가 아니라면은 해당화는 왜 피며
모(暮) 춘삼월이 아니라면은 두견새는 왜 우나
아우리지 뱃사공가 배 좀 건너주게
씨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
잠시잠간 임 그리워서 나는 못 살겠네
태백산맥의 그 준령을 넘으면서 우리들은 경악했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놓이고 터널이 뚫려 정선의 사람들도 쉽게 나들이를 하게 되었지만, 1980년 중후반에 우리가 찾아가는 정선은 참으로 험준한 성마령 고개를 넘고 넘는 첩첩산중이었다. 고은 시인은 말했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이 땅의 아들이다. 삼천리 산과 물의 대지는 내 아버지고 세 바다는 내 어머니다. 여기서 태어나서 여기서 싸우고 여기서 이룩하고 여기서 묻히는 것을 어느 것 하나 막을 수 없다. 이것이 나의 불가피성이다. 국토는 이것이야말로 민족을 다른 것으로 해체할 수 없는 삶의 항구적인 규범이다.”
정선 아라리가 기원되었다는 아우라지에서 사람들은 다시 노래를 듣고 걸었다. 저 지난 시절 정선의 사람과 물건은 아우라지에서 배를 타고 영월에 이르고 다시 송파나루의 노들나루, 그리고 마포나루와 행주나루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었다. 이 땅의 인심과 풍속, 정서와 사상은 그 강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정선 아라리 기념비 앞에서 한길역사기행 일행들은 다시 김병하 씨와 그의 딸 김길자 양, 그리고 최능출 씨의 소리를 들었다. 아무리 들어도 더 듣고 싶었다. 험준한 산악으로 외지와 차단된 척박한 땅 정선 고을의 사람들은 지극히 서정적이고 질펀한 해학을 노래로 만들어 냈지만 때로는 저항적인 정신으로 진전되는 것이었다.
삼십륙년간 피지 못하던 무궁화 꽃은
을유년 팔월 십오일에 만발했네
사발 그릇이 깨어지면은 두세 쪽이 나는데
삼팔선이 깨어지면은 한덩어리로 뭉친다
역사와 삶은 노래를 만든다. 정선의 국토와 민중의 삶은 500수 이상 되는 노래를 만들어내게 했다는 것이다. 이른 봄날, 정선 아라리를 찾아가는 역사가행을 통해 우리들은 이 국토가 창출해내는 노래와 정서를 가슴으로 체험하는 것이었다.
다도해의 사회사, 진도아리랑
1986년 4월의 제5회 역사기행은 ‘다도해의 사회사’를 주제로 하고 또 다른 아리랑의 고장 진도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다도해에 찬란하게 솟아 있는 진도, 그 역사와 문화와 노래를 듣고 보러 찾아갔다. 서울대 인류학과 전경수 교수가 슬라이드로 그림을 비춰 보이면서 진도와 다도해를 인류학의 관점에서 강의해주었다. 고려시대 항몽투쟁의 섬의 사회경제와 그것으로 형성되는 문화는 첩첩산중에 있는 정선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강의가 끝나고는 마을사람들이 노래하는 진도아리랑을 들었다. 진도사람들은 모두가 노래꾼이고 춤꾼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이면 곧바로 춤판과 노래판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생활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예술이 아닌가. 진도의 특산품인 검붉은 홍주는 섬마을의 밤을 더욱 신명나게 만들었다.
이튿날에는 고려시대 항몽투쟁의 정신이 서려 있는 삼별초의 용장산성과 남도산성을 답사했다. 포장이 되어 있지 않는 신작로의 자갈길을 달리던 버스의 타이어가 펑크나기도 했다. 그날은 마침 진도 장날이었다. 일행은 그 시골 장날을 기웃거리면서 저 옛날 고향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