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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에도 인생이 담겨 있다 - 『내 파란 세이버』
박흥용의 만화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교 때 본 만화월간지 <만화광장>에서 본 단편들이었다. 그 단편들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오토바이광이라는 이력에서 나온 듯한 「EXIT」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박흥용의 만화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교 때 본 만화월간지 <만화광장>에서 본 단편들이었다. 그 단편들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오토바이광이라는 이력에서 나온 듯한 「EXIT」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뒤처질 수밖에 없는 말더듬이 배달부. 그가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도망치는 방법은 오토바이뿐이다. 속력이 높아질수록 그는 세상에서 멀어진다. 아니,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속도의 세계에 홀로 존재하게 된다. 「EXIT」에서는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욕망을 도피의 공간에서라도 이루려는 절실함이 느껴졌다. 도피가 헛된 것이라고 몰아붙이지 않고, 도피 자체가 얼마나 절박한 현실과의 부대낌인지를 보여주는 만화였다. 박흥용의 만화는 현실을 말하면서도, 결코 현실에 짓눌리지 않았다. 현실을 제대로 지켜보고, 거기에서 일어서는 법을 늘 이야기했다. 반성과 성찰 그리고 희망이 늘 존재했다. 아무리 슬프고 힘들지라도. 박흥용의 만화에 초현실주의적인 장면, 판타지가 수시로 튀어나오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언제나 현실에 굳게 발을 딛고 있기에 화려한 꿈을 꿀 수 있는 것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과 함께 박흥용의 대표작이라 할 『내 파란 세이버』는 자전거에 인생을 건 소년의 이야기다. 시작은 1969년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산비탈의 미끄럼질을 중학생보다 잘했던 소년 최대한. 반드시 쌕쌕이를 모는 파일럿이 되겠다는 목표는 일단 현실적인 자전거로 바뀐다. 멀고 먼 학교까지 통학하려고 자전거를 택한 것이다. 대한의 천부적인 체력과 재능은 자전거부 감독인 이영수 선생의 눈에 뜨이게 된다. 이영수는 대한을 끌어들이려고 내기 시합을 하지만, 안타깝게도 거지 아저씨가 대한의 자전거에 부딪혀 목숨을 잃는다. 충격을 받은 대한은 잠시 넋이 나가버리지만, 결국은 자신의 운명인 자전거로 돌아온다.
『내 파란 세이버』는 성장만화라고 할 수 있다. 최대한은 자전거를 통하여 인생을 배운다.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바로 그가 죽인 거지 아저씨 덕분이다. 폭우로 다리가 떠내려간 것을 모르고 달리던 대한의 앞을 막아선 거지 아저씨. 그가 아니었다면 아마 대한은 급류에 휩쓸려 죽었을 것이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버린 아저씨를 생각하며 대한은 자신 속으로 침잠한다. 『내 파란 세이버』의 핵심에 있는 단어는 ‘생명’이다. 대한은 말 그대로 ‘생명의 채무자’다. 대한은 거지 아저씨의 생명을 담보로 나머지 인생을 살고 있다. 그것을 갚으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수많은 방황을 거쳐서 대한은 알게 된다. 생명을 대신하는 것은 생명밖에 없다는 것을. 빚을 졌기에 무거워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인생 즉 생명을 소중히 하며 앞으로 나갈 때 채무도 사라지는 것이다. 생명을 갚는 길은 자신의 생명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뿐이다.
박흥용의 만화는 인생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면서도 고루한 교훈에만 갇혀 있지 않다. 박흥용이 던져주는 교훈은 아주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관계와 세부의 묘사 덕분에 생명을 얻는다. 최대한은 두 명의 여자를 사랑한다. 이영수 선생의 딸이며 대학생이 되어서는 학생운동에 뛰어드는 이주미. 방황하던 대한이를 다시 자전거에 뛰어들게 도와주고 서울로 가서 가수가 되는 도미현. 그들과의 관계는 다른 사람들이 얽히면서 더욱 복잡해진다. 나중에 국가대표가 되었다가 이주미의 도피자금을 마련하려고 내기 경주를 하다 하반신 불구가 되는 양영식, 흑인 아버지를 둔 탓에 천부적인 체력과 함께 검은 피부를 지니고 태어난 박영자, 최대한의 중국집에서 주방장으로 일하며 수많은 잠언을 던져주는 화교 슨허민, 최대한의 라이벌이자 친구기도 한 차봉태, 박판주 등등. 『내 파란 세이버』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은 최대한의 주변에서 거미줄처럼 얽혀들어 광활한 우주를 만들어낸다. 그들의 개인적인 역정만으로도 매우 흥미롭고, 그들이 서로 만나 이루는 황홀한 순간도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다.
『내 파란 세이버』는 자전거 경주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인생을 빼고, 단지 자전거에 대한 정보만으로도 『내 파란 세이버』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 한국의 만화가 방대한 정보를 통해 만들어지는 서사보다는 개인의 감정과 일상사에 치우친 현실에서, 『내 파란 세이버』의 성취는 높이 평가받아야 할 이유가 있다. 박흥용은 치밀한 자료조사와 연구를 통해 자전거 경주에 대해 사실적인 장면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자전거 경주란 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인생의 잠언을 이끌어낸다. 『내 파란 세이버』야말로 대가가 만들어낼 수 있는 걸작으로 부족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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