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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불의에 대한 의식이다"

'민주적 사회주의자' 조지 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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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면 오웰을 흔하디흔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그의 하나쯤으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오웰은 투철한 민주적 사회주의자다.

기억력이 시원찮다. 1984년 새해 벽두, 당시로선 매우 드문 위성‘이원’생중계로 접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두고 하는 말이다. 1월 2일 오전에 KBS에서 중계방송을 한 것 같은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최근 ‘새 시대 큰 인물’ 시리즈의 하나로 나온 『한국이 낳은 천재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규희 글?문진화 그림, 랜덤하우스코리아)의 이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84년 1월 1일 제야의 종이 울리고 이제 막 새해가 시작되었을 때였습니다. 미국, 프랑스는 물론 전 세계 사람들은 모두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았습니다. (…) 눈이 하얗게 내린 새벽 두 시, 한국인들도 잔뜩 궁금한 얼굴로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 백남준의 시작 신호가 나가자마자 뉴욕의 스튜디오와 파리의 스튜디오에서는 동시에 여러 예술가들의 모습이 위성을 통해 화면에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쨌든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소문난 잔치였다. 볼 게 없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고등학교 1학년의 눈에 비친 ‘비디오 아트’는 판독 불가였다. 여기에 원활하지 못한 위성중계와 국내 스튜디오 사회자와 해설자의 답답한 진행이 더해져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얼마 보다 말았다.

Back to the 1984

그래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의 『1984년』(김일엽 옮김, 지혜, 1984)을 읽을 단초가 된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잠깐 1984년을 돌아보자. 이 해에 열린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마찬가지로 반쪽 대회였다. 구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빌미로 미국과 그 세력 아래 있는 나라들이 모스크바 올림픽 참가를 거부하자, 이번에는 구소련과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LA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로또 복권 1등 당첨번호가 2회 연속 나오지 않은 직후에 개최된 거나 진배없는 88서울올림픽의 대박은 예정된 것이었다. 아무튼 1984년 어느 주말의 나른한 오후, KBS가 틀어준 TV 영화로 보이는 소품의 여주인공에게 내 마음을 빼앗겼다. 하지만 나는 구소련 국적의 체조선수로 설정된 이 여배우의 이름도, 상대역 남자배우의 경기종목도, 영화의 제목도 모른다. 영화는 미?소 두 나라 남녀운동선수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다.

1984년의 학교생활은 끔찍했던 1학년 때보다는 한결 나았다. 1학년 때 급우를 의자로 내리쳐서 정학처분을 받아 도서관에서 안면을 익힌 녀석과 한 반이 되었다. 그것도 앞뒤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런데 겪어보니 그 녀석은 심성이 착했다. 학교생활이 나아진 것은 담임선생님을 잘 만난 덕분이다.

이 선생님은, 앞서 존 테일러 개토 편에서 밝혔듯, 다시 뵙고 싶은 분이다. 선생님은 내가 다닌 학교에서 서울에 있는 명문 사립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기셨다. 다시 그 학교를 그만두고 학원 강사가 되셨다고 한다. 이후 선생님의 거취에 대해선 모른다. 그런데 선생님이 사립학교를 그만둔 이유가 어떤 학생을 때렸기 때문이라 들었다. 교사를 쫓아낼 힘이 있는 학부모의 자제를 우리 선생님이 잘 혼내줬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부와 언론과 운동을 안 믿는다

『1984년』은 ‘빅 브라더’와 언어의 착종으로 기억된다. 빅 브라더는 물샐틈없는 감시체제를 상징한다. 가상국가인 오세아니아 진리성(眞理省)의 흰 건물 벽에는 이런 구호가 나붙어 있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에리히 프롬은 오웰이 ‘이중사고(double think)’라는 새로운 말을 창조해냈다고 지적하는데, “이중사고란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신념을 마음속에 품고서, 두 가지를 다 받아들이는 정신작용을 말한다.”

나는 여론조사 결과를 거의 신뢰하지 않는다. 여론조사는 특정한 이해관계의 소산이다. 조사기관의 입맛에 따라 좌우되기도 한다. 스포츠중계 해설자의 해설 또한 편파적인 경우가 많다. 그들은 때로는 은근히, 때로는 노골적으로 특정 팀과 선수를 편들거나 까댄다. 너도 똑같은 놈 아니냐? 그래서 나는 어떤 사안에 대해 좋고 나쁨을 말할 때 ‘나는’을 앞세운다.

여론조사의 결과가 언론에서, 특히 신문지면에서 왜곡되는 걸 보면 정말이지 ‘왕짜증’이다. 아래는 ‘당신은 성공하셨습니까?’라는 주제를 다룬 모 방송사 프로그램에 관한 2007년 6월 4일자 어느 신문 기사의 일부다.

“제작진은 (여론조사기관)에 의뢰해 한국인의 성공 모델에 대한 인식을 조사했다. 그 결과 한국인은 자기 자신에게 사회 통념적 성공의 기준에서는 56.8점, 개인적 성공의 기준에서는 58.5점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삶의 만족도 조사’에서 평균적으로 나타나는 수준인 65점보다 낮은 수치다. 또 우리 국민 3명 가운데 2명은 ‘과거처럼 성공하기 어려워졌다’고 답했다.”

성공의 기준과 삶의 만족도를 숫자로 나타낸다는 것부터 극히 의심스럽긴 하다. 그런데 이 신문은 그런 기사 내용을 갖고서 이런 제목을 뽑았다. 「한국인 56% “난 사회적으로 성공”」 점수가 비율로 둔갑한 것이다. 기사 내용에서 보듯이 사회적 통념이나 개인적 성공의 기준에 따른 삶의 만족도는 그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56%가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꽤 높은 비율이다.

성공한 인물이나 존경하는 인물로는 번번이 거대재벌 총수와 재임기간이 가장 길었던 대통령이 손꼽힌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돈을 많이 모으고 권력을 오래 누린 것을 높게 평가하는 듯하다. 예전보다 신문?출판 면의 영향력이 감소했어도 출판사들은 여전히 자사가 펴낸 책이 신문에 나는 것을 중요시한다. 사회운동단체들마저 내실을 다지기보다는 홍보를 우선시하는 것 같아 아쉽다.

‘풍자 우화’ 소설의 진수

『동물농장』(도정일 옮김, 민음사, 1998)은 ‘풍자 우화’ 소설이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냉전 체제의 와해 덕분에 ‘반공 소설’의 굴레가 벗겨져 다행스럽다. ‘작품 해설’에 나타난 대로 소설의 등장 동물과 실존인물의 연결고리는 뚜렷하다. 동물농장의 우두머리인 ‘나폴레옹’은 스탈린이고, 나폴레옹과 적대관계인 ‘스노볼’은 트로츠키다.

“토론 때는 스노볼과 나폴레옹이 가장 활발했다. 그러나 다들 곧 알게 된 일이지만 그 두 수퇘지가 서로 합의에 도달하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한쪽이 무슨 안을 내놓으면 한쪽에서는 어김없이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또 “스노볼이 뛰어난 연설로 자주 다수 지지를 받곤 했지만 막간 교섭으로 지지를 얻어내는 데는 나폴레옹이 한 수 위였다.” 동물농장 방어를 둘러싼 두 수퇘지의 의견 대립은 스탈린과 트로츠키가 각기 주장한 ‘일국사회주의론’과 ‘영구혁명론’을 반영한다.

“나폴레옹의 주장은 우선 무엇보다도 동물들이 총기를 구입해서 사용법을 익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노볼의 의견은 달랐다. 그는 더 많은 비둘기들을 밖으로 파견해서 다른 농장들에서도 반란이 일어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폴레옹은 동물들이 자체 방어에 실패할 경우 농장은 인간들 손에 정복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고 스노볼은 반란이 도처에서 일어난다면 구태여 방어에 나서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했다.”

혁명의 교시를 설파한 늙은 수퇘지 ‘메이저’에게는 마르크스뿐만 아니라 레닌의 측면이 있다. “과수원의 메이저 무덤에서 이제는 살점이 다 씻겨나가고 없는 메이저의 두개골을 파다가 깃대 밑동에 존즈의 총과 나란히 안치했다. 깃발 게양이 끝나면 동물들은 헛간으로 가기 전에 한 줄로 서서 메이저의 두개골 앞을 지나가며 존경을 표시해야 한다는 명령이 있었다.”

스노볼의 발언에서도 레닌을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 있다. “전기가 있으면 마구간마다 전깃불, 온수와 냉수, 전열기 등을 공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외에도 탈곡기, 쟁기, 써레, 땅 고르는 롤러, 수확기, 건초 묶는 기계 등을 돌릴 수 있다고 말했다.” 레닌은 ‘공산주의는 전력(電力)’이라 강조했다.

짐수레 끄는 말 ‘복서’는 프롤레타리아와 연결된다. 우직하게 일만 하는. 그런 점에서 복서는 정해진 채탄량의 14배에 이르는 석탄 102톤을 캐낸 구소련의 광부 A. G. 스타하노프이고, 사회주의 중국의 국민적 영웅인 레이펑(雷鋒,『뇌봉』, 진광생 지음, 최성만?박태순 얿김, 실천문학사, 1993)이다.

다른 것이 지시하거나 상징하는 대상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생산하지 않으면서 소비하는 유일한 동물”인 인간은 ‘자본가’다. 돼지는 ‘혁명의 전위대’이자 ‘노멘클라투라’이고, 돼지들이 다른 동물을 깨우치는 것은 ‘의식화 활동’이랄 수 있다. <잉글랜드의 짐승들>이라는 노래는 인터내셔널 가(歌)다. 일곱 가지 계율의 내용이 변질하는 것은 ‘배반된 혁명’을 말한다.

어리석은 양(羊)들은 집권자와 선전원의 입맛에 맞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독재자의 지지기반이다. ‘나폴레옹빠’라고 하겠다. 무엇보다 오웰은 『동물농장』에서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허구성을 앞서서 보여준다. “농장의 삶은 고되었다.” 식량 분배에 지나치게 엄격한 평등을 적용하는 것은 동물주의에 어긋난다는 것이 선전원의 설명이었다. “농장은 그 자체로는 전보다 부유해졌으면서도 거기 사는 동물들은 하나도 더 잘살지 못하는 (물론 돼지와 개들은 빼고) 그런 농장이 된 것 같았다.” 개들은 돼지들을 섬기는 ‘비밀경찰’ 체카(Cheka)다.

민주적 사회주의자

이러면 오웰을 흔하디흔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그의 하나쯤으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오웰은 투철한 민주적 사회주의자다. 「나는 왜 쓰는가」(도정일 번역)라는 글을 통해 오웰은 “1936년 이후 내가 진지하게 쓴 작품들은 그 한 줄 한 줄이 모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반대’하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위해’ 씌어졌다”고 말한다.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 의식, 곧 불의(不義)에 대한 의식이다. 책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을 때 나는 나 자신에게 ‘자, 지금부터 나는 예술작품을 만들어낸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책을 쓰는 이유는 내가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말이 있기 때문이고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고 싶은 어떤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왜 쓰는가」에서 오웰은 그의 작품을 거론한다. 『동물농장』은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을 하나로 융합해 보고자 한, 그래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충분히 의식하면서 쓴 첫 소설이었다.” 『제국은 없다(Burmese Days)』(박경서 옮김, 서지원, 2002)는 그가 쓰고 싶었던 자연주의적 성향이 다소 배어있는 작품이다. “불행한 결말로 끝나고 미세한 묘사와 인상적인 직유로 가득 찬, 그리고 말이 소리 그 자체를 위해 사용되기도 하는 화려한 문장들 투성이의 그런 자연주의 소설”말이다.

“스페인 내전에 관한 나의 책 『카탈로니아 찬가』는 물론 솔직히 정치적인 소설이다. 그러나 그 소설 역시 어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리고 형식을 존중하면서 씌어진 것이다. 나는 그 작품에서 나 자신의 문학적 본능을 위반하지 않으면서 진실의 전부를 이야기해 보려고 무척 노력했다. 그러나 우선 그 작품에는 신문 기사 등을 인용한 긴 장이 하나 있는데 그 장은 프랑코와 공모했다는 비난을 받은 트로츠키파를 변호하기 위해 씌어진 것이었다. 일이 년 시간이 지나면 보통의 독자들로선 흥미를 느끼지 못할 이런 장이 거기 끼어 있다는 것은 소설을 망칠 것이 분명했다. 내가 존경하는 비평가 한 사람은 그 장을 놓고 내게 훈계하기를 ‘왜 그런 장을 거기 넣었는가? 좋은 소설이 될 수도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저널리즘이 되고 말지 않았는가.’ 그 말은 옳았지만, 그러나 나로선 그렇게 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나는 당시 영국에서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한 가지 사실―무고한 사람들이 엉뚱하게 비난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 내가 분노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예 그 책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

오웰이 처음으로 펴낸 책은 자전적 성격이 강한 소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신창용 옮김, 삼우반, 2003)이다. 이 작품은 1928년부터 1932년까지 겪어본 5년간의 밑바닥 삶이 바탕이 되었다. 무명작가이기에 필명을 써달라는 출판사의 요구를 받아들여 그는 ‘조지 오웰’을 필명으로 삼는다. 그의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er Blair)다.

그가 나중에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다 “나는 30년이나 걸려서야 에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게 되었다”라고 쓴 걸 보면, 오웰은 그의 본명에 대해 불만이 없지 않았던 모양이다. 산문선집 『코끼리를 쏘다』(박경서 옮김, 실천문학사, 2003)에 수록된 「서점의 추억」에서 오웰은 헌책방에서 일하면서 느낀 가장 강한 인상으로 “진정으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적다는 사실”을 든다.

“우리 가게에는 재미있는 책들이 많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책을 찾던 고객 중 10퍼센트 정도도 좋은 책과 나쁜 책을 쉽게 구별하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 서점에는 문학애호가들보다는 잡지의 창간호 따위를 구하려는 속물들이 더 많이 들락거렸고, 또 싼 책값조차 깎으려고 드는 동양 학생들도 자주 드나들었고, 조카들에게 생일 선물용으로 책을 사주려고 하는 멍청한 여자들도 꽤 많았다.”

오웰 산문선집을 우리말로 옮긴 박경서 교수는 ‘e시대의 절대문학 006’ 『조지 오웰-읽기의 즐거움』(살림출판사, 2005)에서 오웰의 “사회주의 사상의 본질은 스스로를 ‘반제국주의자’이자 ‘반파시스트’이며 ‘평등의 신봉자’라는 입장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본다. “그는 제국주의와 계급체계를 반대하고 영국 중산 계급의 다양한 사회주의자들을 공격하면서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사회주의 건설을 강조한다.”

평전 『자유_자연_반권력의 정신 조지 오웰』(이학사, 2003)에서 박홍규 교수는 오웰이 “분명 좌익이었으나,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좌익이었다”고 평한다. 오웰은 권위적인 좌익에게도 우익에 겨눈 잣대를 똑같이 들이대 비판했다. 박홍규 교수는 소련식 사회주의와 영미식 자본주의를 동시에 반대한 오웰의 사회주의를 ‘decency’라는 단어로 집약한다.

“흔히 ‘인간다운 품위’ 정도로 번역되는 이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쉽지 않으나, 나는 ‘본질적인 품위, 무엇보다도 솔직한 관대함’으로 이해한다. 이는 어떤 도그마나 이데올로기에 의한 정치적 교조주의나 계획적 사회 개혁 또는 종교적 절대주의 등에 반대되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론총서 11’ 『오웰과 1984년』(김병익 편역, 문학과지성사, 1984)에는 당대를 대표하는 영문학자 레이몬드 윌리엄스의 조지 오웰 작가론이 실려 있다. 결론의 한 대목이다.

“우리는 그의 솔직함, 그의 정력, 그의 자발적인 참여 없이는 우리가 수행할 수 있는 시점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점들은 우리가 어떤 다른 결론에 이르더라도 계속 그에게 존경을 보내야 할 자질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것들이 독립적이고 적극적일 때에만 진정한 가치를 갖는 자질들이다. 그의 작품과, 그의 생애와의 관계를 맺는 것은 그것을 읽어내는 것이지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거기에 실체로서, 목에 상처를 갖고 슬프고도 강한 얼굴로, 견고하면서도 노골적으로 씌어진 평범한 언어로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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