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 <아홉살 인생> <여선생 VS 여제자>의 결말에 대한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있사오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열세살, 수아>에 대한 스포일러도 있습니다만, 여타 매체와 보도자료, 인터뷰 등에서 언급한 이상의 내용은 아니니 그 점은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을 겁니다.
최근 영화 관련 매체에서 이세영의 얼굴을 보는 건 드문 일이 아닙니다. 신작 <열세살, 수아>의 홍보를 위해 온라인, 오프라인 매체를 가리지 않고 인터뷰에 응하고 있지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주연배우가 대부분의 인터뷰 일정을 소화하는 게 그다지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만, 이세영이 소화하는 홍보 활동은 같은 작품에서 공연한 추상미나 김윤아보다도 압도적으로 많은 편입니다. 같은 또래인 이재응이 <효자동 이발사>나 <사랑해, 말순씨>의 개봉에 앞서서 소화했던 홍보 일정에 비해도 그렇죠. 물론 이재응이 <효자동 이발사>에선 주연급 조연이었고 <사랑해, 말순씨>에선 문소리와 투톱 주연이었던 거에 비해, 엄연히 <열세살, 수아>의 원톱 주연인 이세영에게 관심이 더 쏠리는 것도 당연하지만요. 2004년 초부터 2005년 초에 이르는 한 해 동안만 <아홉살 인생> <여선생 VS 여제자> 까지 내리 세 편에서 줄곧 주연을 도맡으면서 유망주 1순위로 지목되던 이세영에게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겁니다.
<열세살, 수아>을 보고 나서 영화에 대해 다룬 기사를 쭉 읽어 보니, 기자들이 공통으로 언급하는 점이 있더군요.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수아는 전작에서 이세영이 맡았던 ‘깍쟁이’ 배역과는 180도 다르다고 말입니다. 확실히 이번 영화에서 이세영은 기를 쓰고 자신의 미모를 감추려 듭니다. 머리에 왁스를 발라 떡 진 머리를 만들고, 전작들에선 쓰지 않던 두꺼운 안경을 꺼내 쓰고, 식사량 조절을 관두고 적당히 살을 붙여서 만들어낸 ‘평범한’ 여자아이의 초상은 제법 잘 먹힙니다. 그래서 얼핏 보면 변신이란 말에 쉽게 수긍하게 되지요. 하지만 정작 인터뷰에 임하는 이세영은 자신의 전작들이 ‘깍쟁이’라는 단어로 요약되는 게 은근히 서운한 모양입니다. 최근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이세영은 자신의 전작들이 깍쟁이가 아니라 마음의 상처 내지는 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비밀을 감춘 캐릭터라고 항변하더군요. “영화를 안 보신 분들이 그렇게들 말씀하시던데…’라고 말입니다. (<씨네21> 605호)
따지고 보면 그래요. <아홉살 인생>의 우림이나, <여선생 VS 여제자>의 미남이도 사실 꼼꼼히 뜯어보면 다들 마음의 상처를 감추려고 거대한 벽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숨어 사는 외톨이거든요. 단순히 ‘깍쟁이’란 단어로 요약해 버리는 건 캐릭터에게도, 그 캐릭터를 연기해낸 이세영에게도 결례입니다. 사실 우림이나 미남이가 수아랑 근본적으로 다른 캐릭터도 아닌 걸요. 저는 <열세살, 수아>의 수아를 연기하면서 이세영이 시도한 연기 변신에 대해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이세영이 여태껏 연기해 온 인물들이 사실은 같은 원형을 지닌 쌍둥이 자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지금부터 이세영이 주연을 맡은 <아홉살 인생> <여선생 VS 여제자> <열세살, 수아>를 중심으로 놓고, <대장금>과 <고독이 몸부림칠 때>를 거쳐서 이 명민한 아가씨가 반복해서 연기하는 인물들에 대해서 살펴볼 작정입니다. 이 속 깊고 눈 맑은 여배우가 연기해 온 캐릭터들이 ‘깍쟁이’라는 단어로 요약되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속이 상해서 말이에요. 사전에 따르면 ‘깍쟁이’란 단어는 ‘남에게는 인색하고 자기 이익에는 밝은 사람’이나 ‘얄밉도록 약삭빠른 사람’을 낮추어 이르는 말이라고 하거든요.
첫 타석, 장금의 라이벌 금영. <대장금>
2003년 <대장금>에서 이세영은 장금의 최대 라이벌인 금영의 어린 시절을 딱 부러지게 연기해내며 세간의 주목을 받습니다. 사실 금영은 끝없이 장금을 위기로 몰아넣어야 하는 운명의 장난에 시달리니, 어찌 보면 악역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하지만 사실 이세영이 연기했던 어린 시절의 금영은 아주 모범적인 아유미 캐릭터에요. ‘큐티하니’의 아유미 말고, 만화 『유리가면』의 천재 소녀 아유미 말입니다. 명성에 빛나는 가문, 피나는 노력으로 쌓아올린 당대 최고의 실력, 정정당당한 승부를 즐기는 매너, 그리고 도도한 자부심까지. 말이야 바른말이지, 현실세계에서 보통 라이벌은 그렇게 공정하지도, 멋지지도 않거든요. 학교에서, 직장에서 늘 뒤통수를 조심하면서 살아야 하는 우리가 꿈꿀 수 있는 최고의 라이벌이 있다면 아마 금영 혹은 아유미일 겁니다.
금영은 달빛에 비춰가며 잣에 솔잎을 끼우려고 노력하는 장금에게 눈 대신 손끝의 감각을 믿으라고 비법을 일러주는가 하면, 다른 생각시들이 자신을 따돌린다고 하소연하는 장금에게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하라’고 감싸줍니다. 금영은 자신이 설탕이라 착각했던 단맛의 정체가 홍시라는 사실을 알아낸 덕에 ‘절대미각’이라는 명예를 박탈해간 장금을 미워하는 대신, 장금을 뛰어넘고자 장금의 비법을 본받아 밥의 잔 맛을 없애는 데 숯을 사용하고, 자신이 장금의 비법을 본받았단 사실을 숨기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고백합니다. 적어도 민정호 종사관(지진희)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기 전까지는, 금영은 장금의 최고 라이벌이자 든든한 동지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품과 자부심을 한몸에 갖춘 수라간 최고 엘리트 금영의 어린 시절을 이세영은 설득력 있게 그려냈습니다. 그러나 금영을 지나치게 어른스럽고 사리분별이 딱 부러지는 아이로 연기해낸 덕분에 이세영은 ‘깍쟁이’란 별명을 얻게 됩니다.
두 번째 타석, 서울에서 전학 온 하얀 얼굴의 서울깍쟁이. <아홉살 인생>
<대장금>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은 이세영은 2004년 <아홉살 인생>에서 첫 주연을 맡습니다. 아동문학가 위기철 선생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에서 이세영은 또 ‘깍쟁이’로 보이기 딱 좋은 역할을 맡습니다. 70년대 경상도 시골 마을에 전학 온 서울 소녀 장우림 역이 바로 그춰이죠. 골목대장 여민이(김석)의 마음을 송두리째 훔쳐간 우림은, 우리가 흔히 생각해낼 수 있는 ‘재수 없는 서울 출신 여자아이’의 클리셰를 온몸에 칭칭 휘감고 등장해요. 하얀 피부에 하얀 원피스. 미국에 계신 아버지가 보내주는 미제 연필과 미제 가방, 미제 양말. 시골 아이들의 흙 묻은 검은 맨발을 보고 경악하는 우림이 역할은 영화를 끝까지 보지 않는 이상은 영락없는 깍쟁이가 맞습니다. 여민이를 좋아하면서도 그 마음은 쏙 감춘 채 늘 자기 좋은 대로만 행동하고 여민이에게 땍땍거리기만 하는 우림이를 깍쟁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누굴 또 깍쟁이라고 부르겠습니까.
하지만 중반에 들어 우림이가 부잣집 딸도 아니고, 아버지가 미국에 가 계신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영화는 우림이가 토해내는 거짓말 뒤편에 숨겨진 비밀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우림이의 아버지는 미국 출장길에 일찌감치 죽었고, 우림이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끊임없이 잘난 척하고 거짓말을 해왔던 거라고 말이죠.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 마땅치 않은 새아버지에 대한 반감은 아홉 살 우림이가 감당하기 쉬운 상처는 아니었지요. 우림이는 끝없이 자신은 남들과는 다른 존재이기에 상처입어서는 안 되며, 미국에는 끝없이 미제 연필과 미제 가방을 보내주는 아버지가 건재하다고 거짓의 성을 쌓아서 상처를 가립니다. 시골 아이들에게 따돌림 당하는 건 물론, 서울에 있을 때조차도 ‘종잡을 수 없는 년’이라는 조롱에 시달렸지만 덕분에 마주보고 싶지 않은 진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요. 비밀은 우림이를 다른 아이들보다 더 조숙한 아이로 키웠습니다. 우림은 전학 가는 길에 아홉 살 어린애의 생각이라고 하기엔 무척이나 어른스러운 선물을 여민에게 남기고 가지요. 우림은 그렇게, 자신의 비밀을 묵묵히 지켜준 여민에게 아홉 살의 한 해를 영원히 잊지 못할 시간으로 각인합니다. 이세영은 이렇게 얼핏 보면 깍쟁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깍쟁이가 아닌 ‘편모슬하의 외톨이 소녀’ 연기를 선보이며 첫 주연작을 무난히 소화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영화는 그 유명세에 비해서 정작 직접 관람한 관객이 많은 편은 아니었고, 직접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세영을 ‘깍쟁이’로 인지하게 됩니다. <대장금>에 이어서 2연타석 깍쟁이인 셈이었죠.
세 번째 타석, 남자 선생님에게 꼬리 치는 되바라진 초딩. <여선생 VS 여제자>
같은 해에 개봉한 <여선생 VS 여제자>에서 이세영이 맡은 역할은 설상가상으로 새로 부임한 꽃미남 미술선생 권상춘(이지훈)을 사이에 놓고 노처녀 담임선생 여미옥(염정아)과 밀고 당기는 파워게임을 벌이는 5학년 초딩 고미남입니다. 안에 천 년 묵은 불여시가 들어앉은 것처럼 도통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미술선생에게 드라이브 가자고 제안하는가 하면, 단둘이 있을 때 대담하게 키스해봤느냐고 물어보는 미남이는 누가 보더라도 노골적인 롤리타 캐릭터에요. ‘깍쟁이’ 받고 ‘롤리타’ 콜, 이미지는 두 배로 강하게 각인될 수밖에요. 새파랗게 어린 여자애가 남자를 두고 담임선생님과 기 싸움을 벌인다는데, 이걸 보고 깍쟁이라고 안 하면 뭘 보고 깍쟁이라고 부르겠느냐고요. 게다가 이 작품은 <아홉살 인생>에 비하면 정말이지 대대적인 물량공세로 홍보전에 임했습니다. 염정아와 함께 허리 손 자세로 관객을 향해 표독스러운 눈빛을 쏘아대는 이세영의 포스터가 전국 극장가에 걸렸지요. 오해를 살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다 갖춰진 셈이었습니다. 물론 영화만 제대로 본다면 오해야 자동으로 풀릴 수 있었겠지만요. 그러나 장규성 감독의 전작 <선생 김봉두>가 전국 관객 200만 관객을 동원한 것에 비해서 <여선생 VS 여제자>는 110만 관객으로 기대보다 저조한 성적므 거뒀습니다. 영화를 안 본 나머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이세영은 3연타석 깍쟁이 역할을 맡은 배우가 되어버린 거죠.
사실 <아홉살 인생>과 마찬가지로 고미남에게도 나름의 속사정이 있고, 그 속사정은 조금은 억지다 싶은 반전을 통해서 고백됩니다. 사실 반전이라 봐야 대단한 반전도 아닙니다. 이 삼각관계는 다 푼수 여미옥의 착각이 만들어낸 허상이거든요. 사실 고미남은 여러 차례 자신의 고민을 담임 여미옥에게 상담하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미옥은 미남이의 말을 무시하고 자리를 떠버리지요. 미옥은 오로지 자신의 문제와 꽃미남 미술선생에게 온 신경을 기울이느라 미남이에게는 신경을 쓸 틈이 없었던 겁니다. 그리고 미남이 역시 어느 순간 애정을 갈구할 대상을 미술선생 권상춘으로 돌린 것뿐이고요. 미남이가 지닌 상처도 <아홉살 인생>의 우림이와 비슷합니다. 아버지는 미남이가 어릴 때 돌아가셨고, 혼자서 포장마차를 운영하며 살림을 꾸리는 어머니(최란)는 집에 일찍 들어오지 않아 혼자 남은 미남이는 늘 외로웠으며, 허름한 집안 사정 때문에 아이들에게 상처 입을까 봐 외톨이로 지냈던 거지요. 결국은 미남이 역시 오래된 상처가 덧날 것이 두려워서 다른 사람의 애정을 갈구하면서도 마음에 거대한 벽을 쌓고 외톨이가 되는 것을 자처한 캐릭터입니다. 영화가 끝나기 20분을 남겨놓고 미남이가 울며불며 이 사실을 고백하면서 영화는 반전의 급커브를 꺾습니다.
여미옥이 학교를 휴직하고 나서, 미남은 뒤늦게 참회한 여미옥의 조언대로 먼저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허심탄회하게 가난을 인정하고 라면을 끓여서 나눠 먹습니다. 숨기고 싶었던 자신의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하기 시작한 거죠. 공과 사도 구분 못 하는 푼수덩어리 여미옥이 ‘나는 선생 자격이 없어’라고 자조하며 도망치듯 서울로 떠날 때 ‘돌아와서 정정당당하게 겨뤄보지 않겠느냐’고 장난기 어린 문자메시지를 보내 학교로 돌아오게 하는 것도 미남이지요. 이렇게 영화 내내 선생보다 더 어른스러운 속내를 품은 애어른 미남이를 연기한 이세영은, 연기 면에서도 극의 전개를 주도적으로 풀어가는 역할을 해냅니다. 염정아가 주책바가지 노처녀 여미옥을 연기하면서 생애 처음으로 코미디 연기에 도전해서 관객의 웃음 중추를 공략하는 동안, 정석 연기로 극이 현실과 만나는 접점을 꾸준히 유지해주는 건 이세영이거든요. 이세영의 연기가 없었다면 염정아 역시 마음 놓고 코미디를 선보이는 건 어려웠을 겁니다.
왜 그들은 이 영화를 거론하지 않나. <고독이 몸부림칠 때>
어쨌거나, 얼핏 보면 깍쟁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깍쟁이가 아닌 ‘편모슬하의 외톨이 소녀’ 영화를 두 편 찍고 나서 이세영이 구축한 지배적 이미지는 아이러니하게도 ‘깍쟁이’였습니다. 주연을 맡은 영화 두 편에서의 역할이 모두 깍쟁이로 오인하기 딱 좋은 역할이니, 어쩌면 그런 별명도 당연하기도 할 겁니다만, 각각의 캐릭터가 지닌 사연에 충실하게 임했을 뿐인 이세영의 처지에선 깍쟁이 전문 배우로 인식되어 가는 게 즐거운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누군가 자신을 ‘깍쟁이 전문 배우’라고 부르는 건 그 사람이 자신의 영화를 주의 깊게 보지 않았다는 증거일 테니까요. 솔직히, 이세영을 두고 깍쟁이 역할을 주로 맡아왔다고 무신경하게 말하는 사람들 중에 <고독이 몸부림칠 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이 영화에서 이세영이 맡은 경상도 바다 마을 소녀 영희 역할은 아예 깍쟁이라 오해할 만한 요소 자체가 없어요. 그냥 속 깊은 여자애일 뿐이에요. 혼자 사는 할아버지 필국(송재호)을 새장가 보내주려고 기를 쓰며 염색해주고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고, 이혼하고 시골로 내려온 서울 할매 인주(선우용녀)의 상처를 알아보고 소통을 시도하는 조숙한 아이 영희를 연기해낸 것에 대해 거론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요. 게다가 더 놀라운 건, 경상도 출신이 아닌 배우들 중 가장 능숙하게 사투리를 소화해내는 게 다름 아닌 이세영입니다. (평양 출생이시지만, 부산 KBS에서 성우로 경력을 시작하신 송재호 선생은 논외로 하겠습니다.) 이세영은 먼저 촬영한 이 작품에서 익힌 경상도 사투리로 나중에 <아홉살 인생>에 함께 출연한 아역배우들의 사투리 대사를 지도하기까지 했다니,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지 알만 하죠.
하지만, 영화 전문지 기자가 아닌 이상에야 이 작품을 거론하는 기자는 드뭅니다. 2004년 영화가 개봉되던 당시라면 몰라도, 3년이 지난 지금 <고독이 몸부림칠 때>를 거론하는 매체는 거의 없더군요. 물론 주연도 아니었고 영화 자체가 흥행하지 못한 탓에 대중에게 제대로 인지되지 못한 탓도 있지만, 어떻게 지금까지 찍은 영화가 우정출연을 합하더라도 다섯 편밖에 안 되는 배우에 대해서 기사를 쓰면서 이 작품에서 보여준 호연을 쏙 빼놓고 지나갈 수 있는지 말입니다. 제가 생각해낼 수 있는 유일한 답은 ‘영화를 안 봤으니까’입니다. 뭐, 어쩌겠어요. 흥행에 실패한 영화인걸요. 그리고 2005년, 〈TV문학관 ? 소나기〉에서 전 국민적인 서울깍쟁이 소녀의 대명사, 윤초시네 손녀딸을 연기하면서 일반 대중에게 이세영은 그냥 ‘깍쟁이’로 기억됩니다. 4연타석 깍쟁이. 브라보. 그리고 한동안 이세영은 대중의 눈에서 멀어집니다. 드라마 몇 편에 출연하고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 우정출연한 게 전부입니다. 예전처럼 작품의 전면에 나서진 않았지요. 2007년이 올 때까지.
편모슬하의 외로운 소녀 3부작. <열세살, 수아>
2007년, 드디어 ‘깍쟁이 전문 배우의 대변신’이라고 인구에 회자되는 영화, <열세살, 수아>가 개봉합니다. 이세영의 네 번째 주연작인(〈TV문학관 ? 소나기〉를 합산했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이세영에겐 아버지가 없습니다. 혼자서 살림을 꾸려가는 어머니 밑에서 살아가는 주인공 수아는, 자신의 엄마(추상미)가 사실은 진짜 엄마가 아니고, 인기가수 윤설영(김윤아)이 자신의 진짜 엄마라는 상상으로 하루하루를 견딥니다. 게다가 이번엔 그걸 뒷받침해 줄 근거도 있어요. 아버지가 살아생전에 ‘네 엄마는 윤설영이다’라고 이야기해주기도 했고, 아버지가 쓴 일기장에서도 윤설영의 이름이 등장하는 걸 보면 믿어도 좋을 거 같습니다. 아니, 이 구질구질한 일상에서 수아를 구원해 줄 유일한 탈출구는 ‘진짜 엄마’ 윤설영입니다. 원조교제를 하는 친구에게 이끌려 노래방에 갔다가 도둑으로 몰려서 매질을 당하다가 엄마와 크게 싸운 수아는, 제 마음의 소리를 들어주는 ‘진짜 엄마’ 윤설영의 데뷔 10주년 기념 콘서트 ‘프리지아’가 열리는 서울 콘서트장으로 향합니다.
이번 작품에서 이세영은 더 이상 예쁘장하고 딱 부러지는 애어른이 아닙니다. 구부정한 어깨와 두꺼운 안경 뒤에 숨겨진 어눌한 눈빛, 몸에 안 맞는 교복을 입고 혼자서 걸을 때마다 혼잣말처럼 몇 걸음인지 헤아리는 전형적인 외톨이지요. 어른들은 다들 수아를 그냥 평범한 동네 아이로 취급하고, 친구들 사이에서 수아는 너무 잘나서 왕따가 아니라 그냥 존재감이 없어서 왕따입니다. 중학교 등교 첫날부터 친구가 좋아하던 남자애를 가로챘다는 누명을 쓰고 동네 언니들에게 집단 구타당하는 이 아이는 진득하게 사귈 수 있는 변변한 친구조차 없습니다. 엄마의 새 남자친구는 영 마음? 안 들고, 제 마음의 소리를 듣기는커녕 밥 먹으란 말 외엔 하는 말도 없는 것 같은 엄마도 마음에 안 듭니다. 하지만 어디 한 군데 호소할 곳도 없는 아이. 수아는 졸업앨범을 들춰봐도 이 아이가 어떤 아이였던가 애써 생각해내야 간신히 기억이 날, 외롭기로 치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그런 아이입니다.
얼핏 보면, 수아는 선망의 대상이었던 우림이나, 많은 나이차에도 위협적인 연적이었던 미남이와는 전혀 다른 역할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걸 당당하게 이야기하지도 못하고, 특별히 더 영특하거나 비범한 것도 아닌 음지식물 같은 아이 수아의 첫인상은 분명히 낯설지요. 하지만 우림이가 거짓말로, 미남이가 도도함으로 거대한 벽을 쌓아 올린 것처럼, 수아 역시 윤설영에 대한 상상으로 벽을 쌓아 올려 현실을 마주보기를 피합니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감당할 수 없고, 가난한 집안 살림이 못내 부끄럽고, 진짜 속내를 말할 수 있는 친구 따윈 없는 아이들은 그렇게 하나씩 현실에서 도망가는 법을 배웁니다. 조숙한 얼굴로 거짓을 말하거나, 도도하게 또래 아이들을 기피하거나, 아니면 남과는 공유할 수 없는 상상의 장벽을 세우거나 하면서 말입니다. 방법이 달랐을 뿐, 우림이도 미남이도 수아도 결국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찾아 숨어 들어간 아이들일 뿐이죠.
듀나의 지적처럼 수아의 상상이 너무 지나치게 논리정연하게 해설되는 후반의 반전을 지나, 수아는 마침내 자신을 보호해주던 환상과 작별하고 현실과 악수하는 모션을 취합니다. 그렇게 수아의 열세 살은 어른이 되는 첫 걸음,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것으로 끝맺음합니다. 물론 수아가 아무리 노력해도 엄마의 새 남자친구는 수아의 성에 못 미칠 것이고, 수아가 마음을 나눌 친구가 획기적으로 늘어나지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수아가 크게 상처받지 않고 자신의 상상과 작별할 수 있었기에, 현실과 조화롭게 악수할 수 있었기에 관객은 안도하고 극장을 나올 수 있습니다. 아홉 살 우림이가, 열한 살 미남이가 그랬던 것처럼 열세 살 수아도 그렇게 현실을 마주보며 자라겠지요. 편모슬하에서도 용감하게, 현실에서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말입니다. 그리고 저처럼 편모슬하에서 외톨이로 유년기를 보낸 사람에게 이세영의 필모그래피는, 특히나 <열세살, 수아>는 적지 않은 위안이 됩니다. 그 시절의 아픔을 뛰어넘고 현실과 화해하는 과정을 되새기게 해 주는 이 영화는 어쩌면 우리 모두 한때는 수아인 시절이 있지 않았느냐고 살갑게 물어옵니다.
그리고 여러분께 드리는 부탁
이 작품은 개봉 규모가 그렇게 큰 편은 아닙니다. 제작, 배급사가 실험적인 배급구조를 꾀하는 걸로 유명한 스폰지라서 그런지, 프리머스 극장 체인과 스폰지하우스를 통해서 소규모로 배급되고 있지요. 제가 이 칼럼을 쓰는 지금, 주중에 이 영화를 상영하는 상영관은 수도권엔 평택 프리머스 한 군데뿐입니다. (그리고 예상하시는 것처럼 전 평택까지 다녀오고야 말았습니다.) 작은 영화가 설 자리가 마땅치 않은 우울한 풍경이긴 합니다만, 적어도 다른 영화처럼 무리하게 와이드 릴리즈를 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많은 관객을 만나려고 노력한다는 걸 아는 이상 더는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습니다. 영화의 성격에 맞춰서 각기 다른 방식의 배급구조를 고민해야 하는 현 시점의 한국 영화계엔 이런 실험도 분명히 필요하지요. 어쩌면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롱런할 수도 있고, 의미 있는 관객 수를 이끌어내면서 잘만 하면 흑자까지 바라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건 아주 격하게 낙관적인 예상이지요. 아마 여러분이 사는 도시에서 개봉하지 못할 확률이 높을 겁니다.
얼마 전 스폰지의 운영자 파오 님이 돌린 회원 단체쪽지를 보니, 이세영이 무대 인사를 돌다가 과중한 스케줄과 적은 관객 수에 마음이 상했는지 눈물을 쏟았다고 하더군요. 이미 <아홉살 인생> <고독이 몸부림칠 때>로 흥행 실패엔 익숙할 법도 한 이세영이겠지만, 익숙한 것과 상처받지 않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겁니다. 영화를 사랑하시는, 시간이 넉넉한 분이라면 저처럼 옆 도시까지 나들이를 가서 보고 올 수도 있으시겠습니다만 그잰 정말 드문 케이스겠지요. 여러분이 이 작품을 꼭 극장에서 접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DVD 출시를 기다리실 수도 있고, 저처럼 주문형 VOD TV를 갖춘 분은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안방에서 이 영화를 만나실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영화는 모름지기 극장에서’ 봐야 한다고 믿는 분이라면, 소비자의 한 사람으로서 가까운 극장에 <열세살, 수아>를 순회상영의 형식으로라도 개봉해주길 요청하는 메일을 보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예, 압니다. 저번에도 <천년학>을 봐주십사 하고 졸라댔지만, 여러분의 선의와는 관계없이 자본의 논리대로 종영되었단 걸 잘 알죠. 게다가 이런 식으로 글을 마무리하면 모양새가 썩 근사하진 않을 거란 것도 압니다. 그래도 전 생각해 봅니다. 언젠가는 이세영이 ‘깍쟁이’가 아니라 ‘애어른’이라는 합당한 수식어를 달 수 있을 거라고, 언젠가는 자본의 논리에서 자유롭게 관객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영화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말이죠. 이세영이 거푸 현실과 어렵사리 화해하는 유년을 연기하며 우리에게 위안을 줬다면, 한 번쯤은 우리가 그에게 위안이 되어줘도 멋지지 않겠습니까? 그가 ‘깍쟁이’였던 건 아니라고, 언제나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과 맞서 싸우느라 고단했던 조숙한 아이였을 뿐이라고. 그리고 우린 그의 영화를 극장에서 볼 거라고 말입니다. 언제나 칭찬만 하면서 끝나는, 심지어 이번엔 삼천포로 달려가며 끝나는 땡땡의 요주의 인물, 이번 요주의 인물은 속 깊은 눈매의 아가씨 이세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