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포머>를 보면서 전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마이클 베이는 도대체 이 이야기에 얼마나 진지한 걸까? 이 영화가 자동차나 비행기로 변신이 가능한 외계 로봇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그랬던 건 아닙니다. 아무리 황당한 작품이라고 해도 감독은 충분히 진지할 수 있지요.
이 영화의 제작자 스티븐 스필버그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E.T.〉는 황당한 이야기지만 스필버그는 단 한 번도 그 이야기를 농담으로 다룬 적 없죠. 그는 기독교인이 성경과 예수를 믿는 것처럼 외계에서 온 목이 긴 식물학자와 그 아이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믿었고 정공법으로 이야기를 치고 나갔습니다. 그 영화에도 농담은 많았지만 이야기 주제를 배신하지는 않았지요.
마이클 베이는 어떨까요?
<트랜스포머>는 확실히
〈E.T.〉보다 덜 진지한 영화입니다. 목이 긴 외계인 식물학자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지만, 일제 변신 로봇 장난감을 팔려고 만든 주말 아침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시리즈만큼 경박하지는 않아요. 물론 이 역시 진지하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시치미 뚝 떼고 하드 SF적인 접근법을 취해 이런 외계 로봇의 기원과 메커니즘을 추적할 수 있지요. 하지만 마이클 베이가 그런 식의 접근법을 취하지 않은 건 분명합니다. 이 영화의 트랜스포머 로봇은 외계 종족처럼 굴지 않아요. 그들은 금속 기계로 변장한 미국인 남성입니다. 이들은 이름도 외계어가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이 영화는 농담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시치미 뚝 떼고 바른 생활 사나이와 같은 말만 골라서 하는 옵티머스 프라임은 농담거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그가 석양을 바라보며 우뚝 서서 거창한 연설을 할 때는요. 그럼 마이클 베이와 각본가는 이 영화를 일종의 포스트모던한 (아, 지겨워라) 농담으로 만들었겠네요?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도 지나치게 손쉬운 일입니다. 물론 이 영화에는 원작 팬을 향한 온갖 자질구레한 윙크가 숨어 있습니다. 풀장에 추락한 트랜스포머 로봇이 마이 리틀 포니 인형을 안은 어린 소녀를 만나는 것부터가 농담이지요. 둘 다 주말 아침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시리즈였으니까요. 원작 애니메이션 시리즈에서 옵티머스 프라임의 목소리를 연기한 피터 컬런이 다시 같은 역으로 돌아오기도 했고요. 처음으로 본 트랜스포머 로봇을 보고 일제라고 웅얼거리는 주인공 샘의 대사도 농담이고 그 밖에도 많습니다.
하지만 암만 봐도 영화는 이 농담에 대해서도 진지한 것 같습니다. 그건 마이클 베이의 한계일지도 모르죠. 그는 좋은 재담꾼이 아니니까요. 그는 진지한 드라마와 가벼운 코미디를 잘 섞지 못하고 툭하면 불필요하게 진지해집니다. 그 때문에 그의 영화는 진지할수록 웃기죠.
그러나
<트랜스포머>의 농담과 진지함은 조금 다른 의미를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마이클 베이가 이 주제를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걸 밝혀야겠어요. 베이는 65년생으로 오리지널 시리즈를 소년의 관점에서 보기엔 좀 나이가 많습니다. 영화 프로젝트가 넘어왔을 때 ‘바보 같은 장난감 영화’라고 생각하고 거절하려 했다는 소문도 들려오고요. 하지만 지금 보면
<트랜스포머>는 베이와 딱 맞습니다. 그가 그걸 아무리 가벼운 농담으로 깎아내리려 해도 그의 정신수준과 일치하기 때문이지요. 그 때문에 그가 아무리 각본가의 농담을 농담으로 풀려고 해도 뭔가 찰칵 하고 맞아떨어지면서 진지해지는 것입니다. 여전히 농담이지만 스파게티 속의 단단한 심처럼 어울리지 않는 진지함이 남아 있지요. 이건 좋은 일입니다. 아무리 바보 같은 이야기라고 해도 농담으로만 풀 수는 없지요. 베이는 바로 적절한 수준의 진지함을 영화에 제공해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