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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의 역사가' 홉스봄을 만나다 - 현존하는 최고의 역사가를 만나던 날

1987년 5월 12일 화요일 오후 5시 영국의 세계적인 사회경제사학자 에릭 홉스봄(1917~ )이 안암동에 있는 우리 회사를 방문했다. 참으로 귀한 손님이었다. 이런 석학을 모실 수 있다니 출판사·출판인으로서 대단한 즐거움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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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금된 책들의 이름을 메모하던 홉스봄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 열린 '홉스봄 교수 초청 학술강연회'에서 강의하는 홉스봄.

1987년 5월 12일 화요일 오후 5시 영국의 세계적인 사회경제사학자 에릭 홉스봄(1917~ )이 안암동에 있는 우리 회사를 방문했다. 참으로 귀한 손님이었다. 이런 석학을 모실 수 있다니 출판사·출판인으로서 대단한 즐거움이 아닐 수 없었다.

정현백·박지향 교수가 안내했다. 나는 홉스봄에게 한국 사회에서 당시 힘차게 전개되고 있는 사회운동과 출판운동에 대해서 설명했다. 책과 권위주의적 권력이 갈등하고 있는 양상에 대해서도 말했다. 홉스봄은 어떤 책들이 판금되었는가를 저자 이름, 책 이름을 일일이 메모하는 것이었다. 사회적 진실을 추구하는 노학자의 정정한 모습이었다.

“한국사회는 지금 격동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인간평등을 주창하는 젊은이들의 운동과 정신은 일련의 젊은 출판인들이 펼치는 출판운동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금 한국의 젊은 세대들은 사회과학적 문제의식으로 ‘독서’하고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젊은이들이 읽고 있는 책을 두려워하면서 그런 책들을 판매금지시키고 있지만, 독자들의 문제의식은 엄청나게 진전되고 있습니다. 정부의 ‘금서정책’은 이제 통하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의 문제의식과 행동은 정부의 금서조치를 무력화시키고 있습니다.”

대석학은 나의 설명을 경청했다. 한국의 사회운동과 출판상황은 선생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사회사적 자료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해 4월 28일 서울지검 공안2부는 ‘좌경서적’을 출판했다는 이유로 젊은 출판인 5명을 구속했다. 녹두출판사 김영호(27) 대표와 사계절출판사 김영종(32) 대표, 동녘출판사 이건복(33) 대표, 세계사 윤후덕(30) 대표, 거름 편집인 강경철(26) 씨가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괄호 속 나이는 1987년 당시 기준)

나의 방에서 나는 선생과 한 시간 정도 한국의 사회상황·출판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수많은 책들이 판금되거나 강제 수거되며, 때로는 구속되는 상황에서도 젊은 출판인들은 계속 책을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이런 대화를 홉스봄 선생과 나누던 그 80년대는 나에게 분명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의적의 사회사』『혁명의 시대』『자본의 시대』『제국의 시대』 출판

홉스봄은 서울대 이인호 교수가 재직하던 서울대 서양사학과에서 초청하고 국제문화협회의 협찬을 받아 방한했다. 한길사와 서울대 서양사학과가 공동주최하는 ‘홉스봄 교수 초청 학술강연회’가 5월 9일 오후 동숭동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 열렸다.

그날 ‘최초의 산업국가의 흥망 : 영국 1780~1980’을 주제로 한 강연회에서 홉스봄은 당대의 석학답게 신념에 찬 목소리로 열강했다. 영국의 상황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조건도 비교해가면서 강연한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이지만, 그의 이론과 사상은 열려 있었다.

한길사는 일찍이 홉스봄의 『의적의 사회사』(Bandits, 1969)를 1978년 11월에 펴냈다. 공업화되기 이전의 농업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비적 내지 의적현상을 분석하는 책이다. 역사 연구의 주류에서는 이제까지 별로 연구되지 않은 사회적 반항, 또는 민중의 원망(願望)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선구적인 저술이다. 로빈 후드에서 양산박(梁山泊)의 산적들, 멕시코 초원의 혁명아 판초 비야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뒤편에서, 그러나 역사의 원동력으로서, 민중과 더불어 한 시대를 주름잡던 사나이들의 이야기다.

한길사는 다시 ‘오늘의 사상신서’ 제71권으로 『자본의 시대』(The Age of Capital, 1975)를 1983년 12월에 펴냈다. 이어 『혁명의 시대』(The Age of Revcolution, 1962)를 ‘오늘의 사상신서’ 제74권으로 1984년 8월에 펴냈다. 그리고 『제국의 시대』(The Age of Empire, 1987)를 ‘한길그레이트북스’ 제14권으로 1998년 10월에 펴냈다.

이 세 권의 책은 홉스봄의 대표적인 저술로 이른바 ‘자본주의 역사 3부작’이다. 1789년 프랑스혁명부터 1914년까지의 ‘통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책들은 유럽을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지만 세계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

홉스봄이 그려내는 역사풍경화는 하나의 문학

한길그레이트북스로 다시 펴낸 『혁명의 시대』『자본의 시대』『제국의 시대』

홉스봄의 이 3부작을 읽으면, 역사란 이렇게 흥미진진하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당대를 살아간 민중들의 생활상까지를 생생하게 재현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역사란 제도사(制度史)나 경제사만이 아닌 인간이 엮어내는 경이로운 드라마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독자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필력을 홉스봄은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읽어서 재미있고 즐거운 책’이라는 격찬을 받은 저술이다.

홉스봄이 그려내는 역사라는 풍경화는 ‘역사서술이란 당초부터 탁월한 문학’이라는 명제를 일깨워준다. 나는 홉스봄의 책을 읽으면서 아름다운 대하소설 속에 들어서 있는 듯한 감흥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넓게 열려 있는 시야와 자유분방한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역사란 참으로 위대한 교훈이자 오락이라는 명제도 아울러 확인하게 된다.

한길사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진행하고 있는 대형기획 ‘한길그레이트북스’의 제12·13·14권으로 『혁명의 시대』『자본의 시대』『제국의 시대』를 배치했다. 이 ‘자본주의 역사 3부작’은 이미 현대의 고전이 되고 있지만, 홉스봄 선생의 고전이란 또 다른 문학이라는 생각을 나는 하게 된다.

1987년 5월 12일, 나는 홉스봄과 우리가 펴낸 『혁명의 시대』『자본의 시대』를 들고 현관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나는 세미나실을 보여드리면서 그때 우리가 펼치고 있는 한길역사강좌·한길역사기행·한길사회과학강좌 등을 설명했다.

나는 홉스봄에게 “역사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 국가사회와 민족공동체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제대로 인식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다시 홉스봄에게 말했다.

“오늘 우리 국가사회의 성원들은 ‘역사’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가와 국토가 분단되고 동족끼리 전쟁을 하는 참으로 비극적인 현대사의 아픈 체험이 역사에 대한 관심을 더욱 고조시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특히 한국의 젊은이들은 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지대합니다. 이 분단시대사를 극복하려는 몸부림이라고 생각됩니다.”

나의 설명을 들은 홉스봄은 “역사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미래에 희망을 건다는 것입니다”라는 말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역사를 통해서 삶의 희망과 미래의 지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역사를 연구해보면, 역사는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현대 역사학의 거장 홉스봄은 1980년대에 우리 국가사회의 성원들이 총체적으로 체험하던 민주화운동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안암동의 그 작은 세미나실을 이리저리 살펴보았고, 책장에 꽂혀 있는 한길사의 책들을 펼쳐보는 것이었다.

아쟁의 연주가 좋다던 홉스봄

1987년 한길사를 방문한 홉스봄.
나는 홉스봄을 인사동으로 모시고 가서 저녁식사를 대접했다. 한국적인 것을 보여드리기 위해 국악을 연주해주는 ‘산촌’으로 갔다. 스님이 경영하는 음식점 산촌에서는 고기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저녁 8시 30분부터 1시간 동안 진행된 국악과 춤을 선생은 흥미롭게 보고 들었다.

홉스봄은 특히 국악기 아쟁의 소리가 좋았다는 코멘껆를 했다. 재즈 전문가로서 재즈에 관한 책과 글을 쓰고 있던 그에게 한국 음악에 대한 관찰은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을 것이다.

1986년 1월 6일자 <뉴욕 리뷰 오브 북스>에 발표한 글에서 홉스봄은 “1950년대 미국 대중음악에서는 존속살인이 일어났다. 록이 재즈를 살해한 것이다”라고 썼다. 이 같은 표현을 두고 <옵서버>지는 “재즈에 대해 쓸 때 그는 자신이 애정을 품고 있는 것을 옹호하고자 사나운 채찍을 휘두른다”라고 했다. 그러나 “홉스봄은 역사까지 이런 식으로 서술하지 않았다는데 안도감이 든다”라고 했다.

이 전문가의 시대에 홉스봄 선생만큼 다방면에 걸쳐 지식을 갖춘 사람은 드물 것이다. 19세기의 노동운동, 아방가르드 운동예술과 사회주의와의 관계, 농민운동, 베트남전, 듀크 엘링턴과 빌리 홀리데이 같은 재즈 예술가에 이르기까지, 그의 관심과 천착은 놀랍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보통 사람들이, 사실은 역사를 만들고 일으켜 세우는 역사의 주역이라고 말하는 홉스봄, 통상 평범한 사람들(Common People)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Uncommon People)이다. 이름 없는 이들이 참으로 위대한 사람들이다. 홉스봄은 바로 ‘참으로 위대한 보통의 사람들’을 늘 주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라는 제목으로 영림카디널에서 2003년에 번역되어 나온 『Uncommon People』(1998)도 바로 이런 내용을 다루고 있다.

소련에서 판금당한 그의 저서

홉스봄은 ‘자본주의 역사 3부작’에 이어 1994년 『극단의 시대』(Age of Extremes)를 저술한다. 이는 20세기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극단의 시대』는 까치글방에 의해 1997년에 번역출간 되었다. 또 『역사론』(On History)을 1997년에 저술했다. 이 책은 2002년 민음사에서 번역출판 되었다. 2002년에는 자서전 『Interesting Times』를 저술한다. 이 책 역시 『미완의 시대』라는 이름으로 2007년에 민음사에서 번역출판 했다.

홉스봄은 참으로 독특한 삶을 살아온 현존하는 최고의 역사가다. 트라팔가 광장에서 버트런드 러셀과 함께 핵무기확산 반대 시위운동을 벌였고, 아바나에서 체 게바라를 위해 통역을 해주었으며, 런던에서는 재즈에 심취했다.

유대인이지만 이스라엘의 정책을 비판해서 이스라엘에서는 ‘왕따’당했다.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였지만 소련에서 그의 저서는 판금 당했다. 영국의 비타협 노동운동을 비판하기도 했다. 사회정의를 위해 90살이 넘어서도 글쓰기를 중단하지 않는 열정의 역사가다.

그는 그 정신과 사상이 살아 있는 20세기의 현자다. 역사의 힘, 역사의 지혜를 실증해보인 실천하는 현자!

홉스봄이 한국을 방문하던 1987년 5월 그 무렵 나의 ‘일기’에는 이른바 ‘판금도서목록’이 기록되어 있다. 1982년부터의 것이다. 1970년대 중반 이후 1980년대에 창출된 책 또는 책의 정신과 사상의 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자료다. 70년대와 80년대는 ‘사회과학의 시대’였음을 보여준다. 이런 사회과학적 인식을 시대를 거쳐서 한국사회는 오늘 이만큼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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