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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연애질의 기원

모든 책의 첫 문장이 그 책을 대표하진 않지만, 그러나 분명히 어떤 책의 첫 문장은 그 책을 뛰어넘는다. 이상(李想)의 소설 「날개」의 첫 문장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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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책의 첫 문장이 그 책을 대표하진 않지만, 그러나 분명히 어떤 책의 첫 문장은 그 책을 뛰어넘는다. 이상(李想)의 소설 「날개」의 첫 문장이 그러하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한국문학사의 여러 작품을 통틀어 이 정도의 ‘포스’를 지닌 첫 문장을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문학사의 사건이라 할 법한 문장이다. 이상이 그의 짧은 생과 많지 않은 작품을 통해 발산해 온 아우라(aura)를 제대로 담은 문장이며, 1930년대의 경성 거리를 할 일 없이 거닐던 인텔리의 우울한 욕망이 담긴 문장이기 때문이다.

1930년대 인텔리의 초상

1936년 <조광>에 발표된 「날개」는 기생 금홍과의 자전적 체험이 담긴 소설이다. 소설 속의 ‘나’는 무능력하고 소심한 인텔리다. 그 ‘나’가 사는 곳은 33번지에 있는 18가구 유곽 중 하나. 아내가 외출한 방에서 ‘돋보기’로 ‘불장난’을 즐기는 ‘나’는, 가끔 아내가 준 돈을 가지고 내키지 않는 외출을 해야 한다. 어느 날은 아내가 준 돈을 다시 아내에게 주고 ‘동침’을 하고, 또 그러던 어느 날은 봐서는 안 될 아내의 행각을 보고 놀란 마음에 거리에 나갔다가 “뚜우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리는 거리”에서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려워지면서 “날고 싶은 욕구”에 걷잡을 수 없이 휘말려간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로부터 시작하여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로 끝나는 「날개」를 읽어 가다 보면 자연히 1930년대 경성거리를 방황하는 이상의 모습과 겹쳐진다. 그러할 때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란 문장은 소설을 벗어나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서구 모더니스트의 감성으로 살려 했던 수많은 ‘이상들’, 그러니까 인텔리들의 ‘비명’으로 들린다.

구본웅이 그린 이상의 초상화
<우인의 초상>, 1935년 作
<우인의 초상>은 이상의 페르소나(persona)인 곱사등이 화가 ‘구본웅’이 1935년에 그린 그림이다. 그림 속의 사내는 삐딱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고, 파이프를 문 입가엔 냉소 혹은 신경질이 가득하다. 어두운 색조 위에 나 있는 거친 붓 터치는 억눌린 감정의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듯한데, 곧 터져버릴 것 같은 어떤 정조는 아무래도 ‘우울’ 같다. 그림 속의 사내는 이상이다. 그렇지만 이상과 동시대에 살았던 인텔리의 모습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이상과 동시대를 살았던 인텔리의 시선과 우울도 이와 같았기 때문이다.

1930년대 경성 거리를 거닐던 인텔리들은 신식교육을 통해 다양한 서구의 이즘(ism)을 배웠다. 그들은 식민지 조선에서 그 이즘을 실험하고, 모더니스트의 감성으로 살고 싶었다. 그러나 군수물자 조달을 위한 수탈의 땅으로 점차 변해가는 식민지 조선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들의 절망은 그들이 배운 이즘에 대한 그리움이 클수록 컸다. 골방에 들어가서 ‘돋보기 불장난’을 하거나, 도스토예프스키를 안주 삼아 통음을 하며 시대를 저주하고, 다방에 떼 지어 앉아 신세를 한탄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육체노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바야흐로 인텔리 룸펜의 전형적인 모습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1932년 이런 세태를 반영한 글, 이헌구의 「어떤 룸펜, 인텔리의 편상(片想)」에는 절망을 즐기기 시작하는 룸펜에 대한 이런 대목이 있다.

“황혼도 지내고 밤이 되여 거리에 사람들의 그림자가 사라질 때, 희망을 일허버린 울분에 펄럭이는 그 손이 다시 맥이 풀녀서 마지막 한 개의 <마아코>를 끄내어 입에 물어슬 때, 모든 청춘의 아름다운 환상과 공상과 몽상은 자색연기 속에 물려서 아롱아롱 눈앞에 감을거리다가 사라지고 만다.”

인텔리 ?펜은 시대를 핑계로 과잉 낭만과 과잉 절망에 빠져 산다. 그런 그들이 시대의 제약 없이 ‘모던을 과시’하고 ‘이즘을 구현’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이 있었다. 바로 ‘연애질’이었다. 네꾸다이(넥타이)를 메고 데모테 안경과 젬병 모자를 쓴 ‘모던 보이’와 머리를 뒤로 말아서 올린 ‘히사시가미’를 하고 양장에 양산을 받쳐 든 ‘모던 걸’의 남녀상열지사가 유행한 것이다. 그리고 경성 거리를 떠들썩하게 만들수록 그들의 ‘모던’은 더 세련된 것이었다. 이것이 이즘을 오로지 머릿속에 가둬야 했고, 모던을 오로지 옷으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던, 1930년대의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들의 “유쾌한 연애질”의 기원이라 하겠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 알면서도

이상의 절망도 1930년대 인텔리들과 같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폐결핵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기생 금홍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다룬 소설 「봉별기 逢別記」의 첫 문장을 보자.

“스물세 살이오-3월이오-각혈이다”

스물세 살의 삼월, 그러니까 청춘이고 봄이다. 그런데 각혈이라니. 이 기막힌 대비는 요절로 끝난 이상의 생을 압축하고 있다. 당시에 폐병이란 사망선고와 다름이 없어, 그의 20대 그러니까 청춘은 잎이 피기도 전에 저버리는 목련처럼 청춘은 피면서 시들어버린 것이다. 그가 세상에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문학, 그러니 그의 문학은 ‘청춘의 각혈’이고, 그가 그를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라 부르며, 또 그렇게 기억되기를 바라면 쓴 비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상의 작품은, 특히 시는 일상성을 벗어난 과잉 우울의 병적 감수성이 다분하여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쓴 작품의 어떤 문장은 읽기 시작하면 날카로운 비명처럼 뇌리에 깊숙이 박히게 된다. 「날개」의 첫 문장이나, 마지막 문장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오감도>의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오(길은 막다른 적당하오)”, <최후>의 “능금한알이추락하였다.지구는부서질정도만큼상했다.최후,이미여하한정신도발아하지아니한다” 등등. 그로테스크하고 그러니 독특하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 단계를 두지 않고 곧장 비약해버리니 현기증이 나지만, 그러나 매료되어 버리는 그 문장들. 그 비명들. 그러나 대중들은 이상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했던 시 <오감도>는 계획했던 30호를 채우지 못하고 15회 만에 중단된다.

폐결핵과 대중의 무관심으로 할 일 없는 이상이 몰두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을까. 그에게도 연애질이 아니었을까. 이상과 금홍의 연애질은 경성 거리에서 꽤 유명했던 것 같다. ‘김갑수’가 다소간 경망스런 웃음으로 이상을 표현하고, 중성적인 얼굴의 ‘이지은’이 풍만한 젖가슴을 내보이며 금홍을 연기했던 영화 <금홍아 금홍아>에서도, 1930년대 문화예술인의 연애질을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섞은 팩션(faction)의 형식으로 재미있게 보여주는 『그 이상은 없다』(오명근 저, 상상공방)에서도 이상의 연애질을 요란 벅적하게 그린다.

그도 그럴 것이, 이상이 금홍을 만난 것이 23살. 황해도 배천 온천으로 요양차 내려갔다가 금홍을 꼬드겨 종로통 낙원동에 마담으로 앉히고는 다방 <제비>를 차려 화류계에 화려하게 입성한 때문이다. 다방 이름 그대로 모던 ‘제비’로 살고 싶었겠지만, 그러나 제비처럼 날지 못하고, 이후 카페 <학>과 <69>의 실패를 겪는다.

이상의 연애질은 유명했지만, 유쾌한 것은 아니었던 듯싶다. 이상의 여인은 금홍 외에 곱사등이 화가 ‘구본웅’의 계모의 이복동생인 ‘변동림’이 있다. 이상은 소설 「종별기」에서 ‘아마도’ 그 여인에 대해서 “나는 속고 또 속고 또 또 속고 또 또 또 속았다”라고 쓰고 있다. 「봉별기」에는 “나는 제목 없이 금홍이에게 몹시 얻어맞았다. 나는 아파서 울고 나가서 사흘을 들어오지 못했다. 너무도 금홍이가 무서웠다”라고 쓰고 있다. 「봉별기」「날개」에는 이상의 묵인 속에 금홍이 외간남자와 정을 통했다는 추측도 가능한 묘사가 나온다.

그렇다고는 하나, 이 말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를 어떤 역설적 상황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어쨌든 연애질은 재미있는 일이며, 그것이 쓴 물까지 토하게 하는 배신으로 끝이 난다 해도, 그것을 대체할 더 좋은 것이 그의 생과 시대에 있었을까. 사업도, 목숨도, 문장도 철저히 버림받았는데.

영화 <금홍아 금홍아>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이상이 금홍을 지극히 사랑하였다는 영화적 상상을 보탠다. 그러면서 이상이 금홍을 만나던 해, 1933년 7월에 발표한 <이런 시>의 한 소절을 마지막 장면에서 인용한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는 그대여 내 한평생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 알면서도 나 혼자서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그럼 내내 어여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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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 현대성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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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상은 없다 : 팩션으로 읽는 1930년대 문화예술인의 초상
오명근 저 | 동양문고 | 2006년 07월
1편부터 5편까지는 1930년대 인사들의 청춘시절에 대한 이야기다. 모던 경성 시대의 낭만성과 카프의 해체, 그리고 변절에 이은 친일의 과정을 그렸다. 6편에서는 이제 중년으로 접어든 이들이 해방을 맞아 좌우로 대립하는 이념의 격동기를 다루었으며, 마지막 7편에서는 한국전쟁을 통해 겪게 되는 그들의 운명과 최후의 순간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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