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얼마 전 ‘졸리고 딱딱한 클래식은 가라’고 소리 높여 외치는 영국 출신 현악단이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많은 공연 중에서도 클래식 공연은 확실히 접하기 쉽지 않다. 유명 연주가의 공연이 아니면 관심도도 낮은 데다, 클래식 애호가가 아니고서야 그 방대하고도 난해한 수많은 음표의 조합을 작곡가와 작품번호까지 구분해 머릿속에 담아두는 일은 화학기호를 외우는 일만큼이나 아득한 일이다. 그렇다고 클래식 음악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어디에선가 많이 들어본, 허밍으로는 앞질러갈 수도 있는 곡이지만, 다만 누구의 어떤 작품인지 떠오르지 않을 뿐이다. 게다가 뭔가 나만 잘 모르는 듯한 난처함과 박수도 함부로 치면 안 되는 클래식 공연의 다소 무거운 분위기는 클래식을 더욱 먼 나라 음악으로 만드는 것 같다.
그런데 얼마 전 ‘졸리고 딱딱한 클래식은 가라’고 소리 높여 외치는 영국 출신 현악단이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바로 코미디 현악 트리오 ‘플럭(Pluck)’이 그들이다. 코미디와 클래식? 이 얼마나 어우러질 수 없는 단어란 말인가? 게다가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를 각각 연주하는 이들은 모두 정통 클래식을 전공했다. 이단아들의 엽기행각으로 롯데월드 예술극장에 마련된 무대는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는데, 어디 클래식이 과연 코믹할 수 있는지 그들의 2번째 공연이 열리는 서울열린극장 창동 무대로 달려가 봤다.
플럭의 상상을 뒤엎는 엽기행각
기상천외 엽기 현악 트리오 '플럭'
등장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일렬로 늘어선 화분 뒤에 몸을 숨기고 연주를 시작한 이들은 한 명씩 고개를 빠끔히 들고 객석을 바라본다. 앉은 채로 의자를 밀며 무대 앞으로 나온 이들은 뭐 좀 이상하긴 하지만 연미복에 드레스, 들을 만한 연주실력. 특별히 유별나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멤버 가운데 한 명은 한쪽 발이 의자에 끼어 제대로 앉지도 못하는가 하면, 자세히 보니 연미복에 운동화 차림이다. 계속 부루퉁한 표정을 짓는 여자 첼리스트는 활로 멤버들의 머리를 때리는가 하면, 버럭버럭 화를 내기도 한다.
이제 이들의 본격적인 엽기행각이 시작된다. 이들은 비발디와 모차르트의 곡을 연주하며 단체 율동을 선사하고, 괴상한 표정과 과도한 몸짓으로 음악에 젖어든다. 소주를 병째 마시고 감상에 젖는가 하면, 탄산음료를 통째 마시고는 연주에 트림으로 박자를 맞춘다. 병아리가 죽은 상황을 만들어서는 병아리를 앞에 두고 ‘레퀴엠’을 연주하더니, 급기야 그 병아리가 날개를 달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장면을 연출하고, 갑자기 객석으로 뛰어내려 와 한 관객을 둘러싸고는 ‘I will always love you’를 목이 터져라 불러댄다.
묘기도 다양하다. 모차르트의 ‘터키행진곡’을 연주하는데, 바이올린이 박자를 무시하고 너무 느리게 연주된다. 다른 멤버들이 “너무 느려”라고 투덜대지만 바이올리니스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활을 움직이다. 투덜이 첼리스트가 버럭 화를 내자 바이올린의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어느덧 코믹한 분위기에 익숙해진 객석에서는 박자에 맞춰 박수를 친다. 그런데 박자가 점점 빨라진다. 어찌나 빠른지 박수로 따라잡지를 못할 정도다. 연주자 자신도 어쩔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속주가 계속된다. 이제 관객은 박수를 멈추고 엄청난 속주에 환호로 대신한다. 막바지 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속주가 진행되는 사이, 바이올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장면이 연출되고, 객석에서는 박장대소가 터졌다. 그뿐인가? 두 사람이 3대의 바이올린을 연주하는가 하면, 히치콕 감독의 영화를 패러디해 직접 연기에도 도전했다.
플럭, 클래식 공연에 대한 고정관념 깨
표정부터 남다른 플럭 멤버들
‘플럭’의 공연은 개그콘서트를 방불케 기발하고 재밌지만, 이들은 모두 정통 클래식을 전공했다. 따라서 춤을 추고 갖은 퍼포먼스를 보여주면서도 연주에는 흐트러짐이 없다. 또한 그렇기에 이들의 공연이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을 비롯한 세계 공연시장에서 큰 관심을 받아왔을 것이다.
사실 ‘코미디’라는 것이 고정관념을 깨는 행위가 아니던가? 따라서 ‘코믹 클래식 공연’은 제도권에 대한 신선한 도전으로까지 여겨진다. 우아하고 격식 있는 클래식도 이렇게 망가질 수 있다는, 결국은 다른 공연과 다를 게 없다는 통쾌한 자각. 그렇다, 클래식도 당대에는 지극히 대중적인 공연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우리의 관객은 어떤가? 남다른 클래식 공연임을 알고 왔는데도 처음에는 제대로 웃지도 못한다. 무대 위에서 참으로 다양한 표정의 다채로운 퍼포먼스를 선보이는데도 적절한 반응이 없다. 기존 클래식 공연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일 수도 있고, ‘미스터 빈’류의 영국식 코미디에 익숙하지 못해서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국내 ‘공연문화’라는 것이 전반적으로 다양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지금이야 클래식에서 대중가요, 뮤지컬, 연극, 무용, 그리고 개그까지 참으로 다채로운 공연이 무대에 오르고 있지만,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공연을 본다는 것이 그렇게 보편적인 일은 아니지 않았던가. ‘문화’라는 것이 교육으로 익히거나 지식으로 쌓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몸에 배고 누적된 습관임을 고려할 때, 클래식 공연에서는 악장이 다 끝나야 박수를 치고, 재즈 공연에서는 악기의 솔로연주가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치는 일련의 모습은 아직 우리에게는 몸에 밴 반사적인 동작이라기보다는 ‘선 생각 - 후 동작’의 과정인 것 같다.
창동에 이런 공연장이!!
이국적인 공연장, 서울열린극장 창동
말로는 들었지만 ‘서울열린극장 창동’에 가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일단 네모반듯한 사각 건물이 아니라 노랑, 파랑 천막이 하늘로 뾰족이 솟은 오픈 공연장이다. 주위 아파트 단지와 대조를 이루는데 놀이동산에 온 것 같기도 하고, 서커스장에 온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동안 접해보지 못했던 분위기에 기분이 색다르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화장실도 크고, 놀이방도 있고, 객석은 계단식이다. 이곳은 공연이 없을 때도 시민들에게 개방된다고 한다. 또한 프로그램도 대부분 가족을 위한 공연이 많다.
그래, 이제 공연도 넘쳐나고 이렇게 멋진 공연장도 여기저기 들어서고… ‘플럭’의 코믹한 표정에 어른보다 앞서 웃었던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됐을 즈음에는 국내에서도 정말로 다양한 공연, 그리고 몸에 밴 자연스러운 관람 문화도 자리 잡히겠지. 멋진 일이다. ^^
Pluck(플럭) - The Specialist
2007년 5월 29일 ~ 6월 10일
서울열린극장 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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