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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의 길을 걷고 싶다" - 고단한 시대, 늘 희망을 말했던 송건호

선생은 늘 다정다감했다. 어려운 사람들에 대해 동정을 아끼지 않았다. 참으로 부드러운 분이었다. 체구가 큰 편이 아니었지만 연단에 서면 지사적인 정신과 논리를 힘차게 펼치는 ‘투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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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사동 고서점에서 만났다

고단한 삶을 마다하지 않고 한 시대의 언론정신과 역사정신을 일으켜세우기 위해 한평생 정진한 송건호 선생.
한길사는 1977년 9월 25일자로 송건호 선생의 『한국민족주의의 탐구』를 ‘오늘의 사상신서’ 제1권으로 펴내면서 출판을 시작했다. 한길사는 1990년대 초반까지 172권의 ‘오늘의 사상신서’를 펴내게 되는데, 송건호 선생의 『한국민족주의의 탐구』는 ‘오늘의 사상신서’ 또는 한길사의 지향과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운명적인’ 한 권의 책이었다.

1976년 12월 24일 출판사로 등록한 한길사는 그 후 우리의 민족문제와 민주주의운동, 민족사를 중요한 주제로 삼고 그것을 책으로 기획해냈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 월터 리프먼의 칼럼 <오늘과 내일>이 있지만 한길사는 ‘오늘’과 ‘오늘의 사상’을 중시하는 출판사가 되었다.

나는 70~80년대에 송건호 선생을 자주 만나서 말씀을 들었다. 우리는 인사동의 고서점에서 만나자 약속했고 그 서점에서 두서너 시간씩 책을 뒤지다가 종로 뒷골목 식당으로 가서 갈비탕을 시켜 먹었다.

이곳저곳에서 선생에게 강연을 요청해왔고, 나는 선생의 강연이 끝날 때쯤 강연장으로 갔다. 강연이 끝나면 선생을 모시고 근처 설렁탕집으로 가서 저녁을 같이 먹고 다시 다방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상에 대해 토론도 했다.

참으로 다정다감했던 송건호 선생

선생은 늘 다정다감했다. 어려운 사람들에 대해 동정을 아끼지 않았다. 참으로 부드러운 분이었다. 체구가 큰 편이 아니었지만 연단에 서면 지사적인 정신과 논리를 힘차게 펼치는 ‘투사’였다.

1979년 추석 전날로 기억된다. 선생의 댁은 은평구 역촌동이었다. 나는 시내에 나갔다가 집으로 가면서 으레 댁으로 가서 뵙곤 했다. 선생은 그날 대문을 나서는 나의 손에 5만 원을 쥐어 주었다.

그땐 한길사가 펴내는 책이 잇따라 판금되면서 또 다른 책을 내는 것은 물론이고 생활을 꾸려나가는 것도 힘든 시절이었다. 시내에 조그만 사무실을 꾸려가기가 힘들어서 불광동 산동네에 있는 우리 집 거실을 사무실 또는 작업장으로 쓰던 때였다. 그날 선생은 아이들에게 조그마한 것이라도 사다주라는 말씀으로 나의 등을 밀었다.

그때는 선생 자신의 생활도 참으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1975년 3월 동아일보사 언론인들 130여 명이 회사로부터 해고당하는 이른바 ‘동아일보사태’가 벌어졌고, 선생은 이 젊은 언론인들의 자유언론운동에 뜻을 같이하고 편집국장직을 사퇴했다.

당시 선생은 48세였다. 모두 학교를 다니는 6남매를 둔 가장이었다. 선생은 언젠가 나에게 말했다. 대책 없는 ‘실직’은 현기증을 일으키는 ‘공포’였다고. 자유와 정의와 진실의 편에 서는 큰 언론인 송건호 선생의 그런 다정하고 인간적인 이미지가 나의 머리와 가슴에 늘 각인되어 있다.

나는 신문사에서 송건호 선생을 선배로 모시고 함께 일한 적은 없다. 그러나 동아일보사를 그만둔 이후 선생과 함께한 20여 년은 나와 한길사에 늘 훈훈하고 든든한 시절이었다. 늘 성원해주는 정신의 고향 같은 존재였다. 이런 선배를 필자·저자로 모실 수 있어서 나는 행복했다.

선생은 늘 나를 ‘김형’이라고 불렀다. 다른 것 무엇보다도 책 만드는 일이 위대하다는 말씀으로 격려해주었다. 80년대에 송건호 선생과 진행한 이런저런 일들은 되돌아보면 나는 목이 멘다. 고단한 시대였지만 선생은 늘 희망을 말씀했고, 나는 그런 선생에게 우리 현대사에 대해서도 묻고 글도 부탁했다. 선생은 자신의 이런저런 경험을 이야기해주었다. 때로는 나의 견해에 대해 자문해주었다. 선생의 글과 책은 이 민족성원들에게 민족주의와 통일에의 희망과 신념을 고무시키는 것이었다.

해직 이후 더욱 왕성해진 집필활동

송건호 언론상 상패. 임옥상 화백의 작품이다.
1975년은 언론인 송건호의 삶의 역정 또는 사상체계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기가 된다. 동아일보사태가 이 땅의 현대사에 그 어떤 계기가 되듯이, 그 시대상황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지식인 송건호는 1975년 이후의 역사전개와 더불어 당대의 현실을 온몸으로 호흡하는 역사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유신권위주의 정치권력이 내리막을 향해 달리는 그 시대상황에서, 일찍부터 ‘언론의 자유와 독립’을 한사코 신뢰하던 민족주의자 송건호는 스스로 문제의식을 심화시키면서 시대상황의 개혁에 앞장선 것이다.

한 지식인은 그가 몸담고 살아가는 그의 상황에 내던져짐으로써 그 상황의 구조를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고, 그 상황의 구조를 극복하는 이론과 사상을 체득하게 될 터이다. 자유언론인 또는 민족주의자 송건호는 현직에 몸담고 있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의 인식을 심화시키고 실천을 강화시키는 대기자 또는 당당한 언론인의 역할을 해냈다. 1970년대와 1980년대라는 역사적 상황에서 그는 잇따라 ‘문제저작’을 펴내는 '저자'가 되었다.

1975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창비신서’ 제8권으로 간행된 『민족지성의 탐구』에 이어 간행된 『한국민족주의의 탐구』는 ‘해직 이후’인 1976년과 1977년에 주로 쓰인 글로 구성되어 있다. 해직 이후 더 본격적인 글을 집필했다. 「이승만과 김구의 민족노선」「신간회의 민족운동」「민족교육이념의 사적(史的)고찰」「사상사적으로 본 민족언론」 등이 그것이다. 물론 ‘생활을 위한 글쓰기’기도 했다.

그 1970년대에 ‘어떻게 살 것인가’는 젊은 우리들의 삶의 화두였다. 1978년에 나는 15인 에세이집 『어떻게 살 것인가』를 기획한다. 동시대인들에게 주는 질문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나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었다. 송건호 선생은 「상식의 길: 한 언론인의 비망록」을 썼다. 한 언론인으로서 그의 지향과 사상을 말해준다.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언론인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그의 답변이라고 할까.

“우리 언론은 민족통일을 지향해야 하고, 그런 점에서 강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민중에게 통일의식을 심어주어야 한다. 민족언론은 남북 민족의 이질성보다도 동질성을 더욱 강조하여야 한다. 민족언론은 민족의 자주·자립을 주장하며, 강한 민족적 긍지와 자존심에 불타 있어야 한다.

민족언론은 사회과학적 이론이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한다. 사회과학이 바탕이 된 언론만이 민족의 현실을 옳게 인식할 수 있고, 옳은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언론인은 사상가가 되어야 한다. 신문기자라고 해서 한낱 재능인으로서, 어느 때는 이런 글을 어느 때는 저런 글을 쓰는 대서소 서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언론인 송건호의 모든 탐구영역은 올바르고 가치지향적인 언론행위로 포괄된다. “신문기자는 민족주의자이며, 민주주의자이며, 사상가로서의 자부심과 책임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에게 언론은 곧 역사이다. 그의 언론관에 일관되어 흐르는 정신과 이론은 ‘언론의 역사성’이다. 그러나 그의 역사성은 “현실과 유리되어 있는 죽은 역사가 아니라 오늘에 살아 있는 역사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기획하면서

『한국민족주의의 탐구』를 낸 이후 나는 송건호 선생을 매일같이 만났다. 유신권력이란 궁극적으로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런 과정에서 나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기획하게 된다.

1979년 10월 15일, 대통령 박정희가 측근인 김재규에 의해 시해되는 10·26사건이 일어나기 11일 전에 ‘역사적인 한 권의 책’이 탄생한 것이다. 8·15 해방이 되었건만 자주독립하지 못하고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전쟁까지 하게 되는 비극의 역사를 겪은 우리 현대사에 대해 나는 다시 묻고 싶었다. “왜 분단이 되었는가?” 흔히 “외세에 의해 분단되었다”라고 하는데, 과연 그랬을까? 분단되지 않고 자주독립할 수 없었을까? 나는 필자들에게 이런 문제를 규명해보자고 했다.

이런 문제의식을 나는 송건호 선생에게 말씀드렸고 선생은 정말 좋은 구상이라면서 직접 한 편을 쓰겠다고 했다. 선생의 「해방의 민족사적 인식」은 이렇게 해서 집필되는데, 나는 1979년 7월 초순에 넘겨받은 선생의 이 글을 읽고 무릎을 쳤다. 감동적인 논문이었고, 이런 수준과 내용의 글이라면 자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송건호 선생의 많은 논설·논문 가운데 「해방의 민럁사적 인식」은 대표적인 글의 하나라고 평가하고 싶다.

“8·15하면 으레 해방을 연상하고, 또 어떤 시인은 이날의 감격을 잊지 않기 위해 ‘우리들의 8·15로 돌아가자’는 노래까지 부르기도 했으나, 근래 와서 8·15란 도대체 우리 민족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는가를 회의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것은 틀림없었으나 해방의 날이라고 하는 바로 8월 15일을 계기로 국토가 분단되어 남에는 미군이, 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여 국토와 민족의 분열이 시작되었고 이 분열로 말미암아 6·25라는 민족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동족상잔을 빚었다.

그 후 30년간 남북 간의 대립은 날로 심화되어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막강한 군사력이 상호 대립하여 언제 또 6·25보다 더 파괴적인 동족상잔이 빚어질지 모르는 불안하고 긴장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이 통에 민주주의는 시련을 겪고 민족의 에너지는 그 대부분이 동족상잔을 위한 새로운 군사력을 위해 소모되고 있는 가운데 지루하고 암담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이 이른바 ‘해방된’ 이 민족의 현실이다.

민족이 이토록 비극적이고 절박한 상황에 빠져 있는데도 일찍이 이 땅의 학계에는 오늘의 분단 상황을 민족사의 높은 차원에서 반성하여 민족의 살길이 무엇인가를 냉철하게 탐구하는 참된 의미의 민족적 고민의 흔적이 적고 고작 현실을 합리화하는, 이른바 정통성 논의 등이 지배적인 것을 볼 때, 민족이 자기 힘으로 쟁취한 해방이 아닌 주어진 해방일 때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한다.

이 글은 8·15가 주어진 타율적 선물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의 운명이 강대국에 의해 얼마나 일방적으로 요리되고 혹사당하고 수모받았으며 이런 틈을 이용해 친일파 사대주의자들이 득세하여 애국자를 짓밟고 일신의 영달을 위해 분단의 영구화를 획책하여 민족의 비극을 가중시켰는가를 규명하려 한 것이다.

지난날이나 오늘날이나 자주적이 못 되는 민족은 반드시 사대주의자들의 득세를 가져와 민족 윤리와 민족 양심을 타락시키고 민족 내분을 격화시키고 빈부 격차를 확대시키며 부패와 독재를 자행하여 민중을 고난의 구렁으로 몰아넣게 마련이다. 민족의 참된 자주성은 광범한 민중이 주체로서 역사에 참여할 때에만 실현되며 바로 이런 여건 하에서만 민주주의는 꽃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미 반세기가 지난 8·15가 도대체 어떻게 민족의 정도(正道)에서 일탈해 갔고 그로 말미암아 민중이 어떤 수난을 받게 되었는가를 냉철하게 구명해야 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구명은 결코 지난 역사의 구명이 아니라 바로 내일을 위한 산 교훈이 될 것이다. 8·15의 재조명은 이런 점에서 바로 오늘을 위한 연구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역사의 길은 수난의 길이다

1987년 새신문 창간발기위원장으로 취임한 뒤 <한겨레신문>의 대표이사를 맡았다.
1985년 7월부터 안암동의 우리 출판사 세미나실에서 시작된 한길역사강좌 제1기 강좌에서도 송건호 선생은 ‘민족분단과 민족통일’을 주제로 강의했다. 1985년 8월 독자와 저자와 출판사가 함께하는 ‘해인사 연찬회’에 참가한 선생은 ‘민족지도노선의 비판적 인식’을 강의했다. 그리고 1986년에는 한길사에서 『민족통일을 위하여』를 냈다.

선생은 ‘지도자론’을 많이 썼다. 일반인과는 달리 지도자라면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행동과 정신을 가다듬어야 한다고 했다. 1984년 3월에 우리 출판사가 간행한 『한국현대인물사론』은 그의 지도자론을 잘 살펴볼 수 있는 저술일 것이다. 지도자란 “민족의 역사적 상황과 관련시켜, 그가 역사의 길을 걸었는가, 아니면 현실의 길을 걸었는가”로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관점이다.

“한 민족이 평화와 번영과 정의를 누리려면 민주주의를 확립해야 하고 자유를 위해 싸울 줄 아는 용기와 양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경우, 한 인물에 대한 평가의 기준 내지 근거는 ‘민주주의’뿐 아니라 ‘민족’이 되어야 한다. 이 민족의 통일, 이 사회의 민주주의, 그리고 민족의 자주와 자유를 기준으로 하여 문제 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길이다. 역사의 길은 형극의 길이자 수난의 길이다. 사회의 온갖 세속적 가치로부터 소외되는 길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역사의 길을 택하지 않고-그것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현실의 길을 걷는다. 현실의 길은 안락의 길이자 세속적 영화의 길이다. 그러기에 수난의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얼마나 많은 유위한 인재들이 역사의 길을 버리고 현실의 길을 택했던가.”


송건호 선생은 이 책의 머리말에서 자못 감상적이 된다. 스스로 처한 상황에 대한 감정을 내비친다. 고단한 삶이 느껴진다.

“산다는 것은 어렵다. 어려운 역사적 상황에서, 역사적 삶은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어떻게 사는 것이 참 삶일까 하는 문제는 생각할수록 어려워진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었다. 세상에는 옳은 길, 그른 길이 분명히 있다. 그것은 현실적인 판단이다. 그러나 영원의 시간, 영겁의 속에서 되돌아보면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가치 판단하는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영원 속에서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는 뜻인가. 그래서 되는 대로 살자는 것인가. 영원 속에서는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것이 한낱 부질없는 일일까.”

일제 땐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해방 후엔 이승만 투쟁에 항거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 편을 쓸 때 눈물이 쏟아져 원고지를 적셨다고 어느 날 송건호 선생은 나에게 토로하기도 했다. 역사의 길을 걸은 한 위인의 삶은 그렇게 고단했기 때문이다.

김진균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계간 <오늘의 책>(1984년 여름호) 서평에서 “한 개인의 삶이 민족의 수난 앞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감동 깊게 알려주고 있다”라고 지적하면서 “이 땅의 어머니들이 자라나는 아기들에게 ‘홍길동전’처럼 들려주는 이야기 책”이 됨직하다고 했다. 『한국현대인물사론』으로 선생은 성균관대의 심산사상연구회가 제정한 제1회 심산상(1986년 6월)을 수상하게 된다.

1976년 유신권력은 한양대에 압력을 넣어 선생의 출강을 중단하게 하는 참으로 졸렬한 짓을 한다. 그리고 1980년 이른바 전두환의 신군부는 ‘5·17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시켜 선생을 체포하고 고문한다. 정치와는 어떤 관련도 맺지 않는 ‘자유·독립언론인’을 말이다.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고 경영으로부터 독립된 언론을 생애의 가치와 지향으로 삼던 언론인 송건호 선생은 그 고문에 견디지 못해 수사관이 시키는 대로 거짓 진술을 하고 말았다고 뒷날 회고했다. 신군부에 의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선생은 8년간 투병생활을 해야 했고, 결국은 2001년 12월 21일에 서거하게 되었다.

“출판인은 좋은 책 만드는데 매진해야 한다”

1980년 서울의 봄은 신군부에 의해 잔인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그때 한길사는 서대문에 있는 기독교장로회 선교교육원의 창고 한 부분을 빌려 사무실로 쓰고 있었는데, 3월 초순의 어느 날 송건호 선생과 유인호 교수가 ‘지식인 134인 선언문’을 들고 사무실을 방문했다. 이걸 잘 정서해서 등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동아일보사에서 같이 일하다 함께 나온 이기중씨를 오라 해서 등사원본을 쓰게 했다. 나는 당시 서남동(전 연세대 교수) 목사가 원장으로 있던 선교교육원에 같이 가서 등사하는 일을 도왔다. 그런데 5·17이 일어나자 송건호·유인호 선생은 물론이고 이 지식인 선언에 참가한 지식인들은 잡혀가거나 학교에서 추방당했다.

한길사의 많은 저자·필자가 여기에 가담해서 역시 그렇게 되었다. 나도 군수사관에 의해 어딘가로 같이 가서 3시간 조사받았다. 편집장으로 있던 김학민 씨는 보안사로 잡혀갔다. ‘정서’해준 이기중 씨도 어딘가에 불려가서 온종일 조사를 받았다. 나중에 신군부는 ‘5·17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이른바 ‘전모’라는 것을 대대적으로 발표했는데, 내가 등사를 도와주었다는 이야기 등이 거기 나와 있었다. 다만 ‘한길사’가 ‘한길출판사’로, ‘김언호’가 ‘김인호’로 되어 있었다.

1987년 5월 16일 토요일 오후 송 선생은 동숭동 흥사단 강당에서 ‘미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나는 강연을 끝낸 선생을 만나 저녁을 같이 했다. 이 자리에서 선생은 말했다. “출판인은 좋은 책 만드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그것이 출판인의 본업이다.” 직선개헌 서명운동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렇게 강조했다. 송 선생은 나에게 개헌서명 같은 데 참여할 것 없다고 했다.

1999년 송건호 선생은 기자협회보가 전국의 신문·방송·통신사 편집·보도국장과 언론학 교수를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20세기 한국의 최고언론인’으로 위암 장지연 선생과 함께 선정된 바 있다. 1987년에 ‘국민의 힘’으로 <한겨레신문>이 창간되는 빛나는 역사를 우리 함께 손잡고 만들어내지만, 민족언론인 송건호 선생이 여기에 결정적인 존재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지식인의 진정한 정신과 행동

2002년 11월 송건호 선생 서거 1주년을 맞아 (주)도서출판 한길사에서 펴낸 송건호 전집.

2002년 12월 선생의 서거 1주년을 맞아 한길사는 『송건호 전집』(전20권)을 펴내는 영예를 갖게 된다. 선생과 함께한 20여 년, 선생으로부터의 배움과 은혜에 대한 출판인으로서의 작은 보답이라고나 할까. 이 작업엔 강만길·김언호·김태진·리영희·방정배·백낙청·성유보·이문영·이상희·이해동·정연주·한승헌 씨가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나는 편집위원으로 참여하면서 간행사를 초하는 작업을 했다.

“반민주적이고 반민족적인 엄혹한 상황에서, 그 상황을 극복하면서 개진해낸 선생의 치열한 정신과 사상과 논리는 오늘 새롭게 진전되고 있는 국가사회적 상황과 통일지향적 민족공동체운동의 역사적 전개와 더불어 한층 새롭게 우리들 가슴에 다가온다. 우리는 선생이 남긴 수다한 저술을 통해, 민족언론인·민주언론인·독립언론인 송건호의 참모습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선생이 남긴 저술을 통해 언론인으로서뿐 아니라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송건호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선생은 현실과 결코 타협하지 않는 지식인의 진정한 정신과 행동을 스스로 보여주었다. 한 시대에 지식인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특히 분단된 조국의 현실 속에서 진정한 민족지성이란 무엇인가를, 선생이 남긴 저술들을 통해 우리는 가슴 벅차게 체험하게 된다.”


나는 산과 들에 꽃이 피는 봄날엔 1980년 그 ‘서울의 봄’이 나의 머리에 선연히 떠오른다. 나라가 온통 민주주의를 위해 행진하던 그 봄날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화창한 5월이다. 역사의 길을 걷고 싶다던 송건호 선생의 신념에 찬 말씀이 다시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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