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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때문에 마음의 평화가 깨진 날 나를 위해 쓰는 칼럼

나를 위해 쓰는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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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마음의 평화를 잃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똑같이 바쁜 하루였던 것 같다. 그런데 공원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마음이 서서히 아프기 시작했다.

오늘 나는 마음의 평화를 잃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똑같이 바쁜 하루였던 것 같다. 그런데 공원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마음이 서서히 아프기 시작했다. 벤치에 앉아서 내게 무슨 일이 있었나 곰곰이 따져 보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게 아니었다. 무슨 일인가 있었다. 청취자 한 명과 전화로 싸웠다. 사소한 다툼이었지만 나는 할큄을 당했던 것 같다. 짜증일 수도 있다. 나는 불특정 다수를 위해 일하는 직업을 가졌다. 그 불특정 다수는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라디오를 듣는 이유, 그들이 라디오에서 듣고 싶어 하는 것. 다 내겐 알 수 없는 영역이다. 이런 고백이 얼마나 위험한지 안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면서 나를 위해 일한다고 말하는 게. 나는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모르는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일한다. 나는 이기적인 이유로 방송을 하고 있다. 매일 매일이 끊임없이 새로운 날이기를 원하기 때문에 열심히 일한다. 매일 매일 새로 태어난 기분이길 원하기 때문에 일하는 것이다. 여러분도 나와 함께 새로워지세요, 라고 말하자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나와 같아지세요! 라는 것이야말로 진정 무서운 오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저 나를, 신생아의 몸뚱어리를 가진 나를 우주에 띄워 보내는 심정으로 일한다. 나는 나의 일에 책임지고 싶어 하지만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저 심장이 파닥파닥 뛰는 한 인간인 그 자세만 잃지 않으려 한다. 아주 오래전 일이다. 나는 입사하기 전에 나의 운명을 몰랐었다. 우연히 라디오 피디가 되었고 그래서 처음부터 나 스스로 나에게 큰 기대를 걸지 못했다. 항상 어리둥절했다. 동기들 중에서도 가장 늦게 배우는 자였고 그래서 지금도 미숙하다. 그런 미숙함 때문에 지겨움을 모르긴 하지만 매일 매일이 너무 긴장된다. 심장의 현이 툭 끊어질 것 같다. 오늘이 그런 날인지 모르겠다. 난 지금 나를 위로하고 싶은 건지 탓하고 싶은 건지 힘을 내고 싶은 건지 힘을 잃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지난주에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인생의 대부분을 교회의 종치기로 살았던 그의 종소리를 갖고 있지 못해서 아쉬웠다. 내 동기 피디는 안동으로 그를 만나러 가 그의 방에 초대받은 일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초라한 방에 책만 가득했다 한다. 그중에서도 한길사에서 나온 『고야』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런 이야길 들으면 참 부럽다. 어떤 사람이라도 더 알 기회를 가졌다는 건 축복이라 생각한다. 언젠가 소리를 모으는 데 매료된 적이 있었다. 카세트테이프로 녹음하던 시절의 일이다. 범민족 대회 소리, 새로운 2000년 밀레니엄 베이비의 울음소리, 새로 개통되는 지하철 소리, 김남주 시인의 목소리, 김소진의 목소리, 문익환 목사의 웃음소리. 부활절 메시지. 바위에 부딪히던 제주도의 태풍 소리, 광화문의 시위 소리. 수도 없이 많은 은밀한 테이프가 내겐 있었다. 그중 가장 아꼈던 것은 방송국에 왔던 수많은 출연자의 목소리에서 아무도 몰래 한숨소리와 웃음소리, 울음소리만을 편집해 모아 놓았던 테이프였다. 일이 어려운 날엔 작은 스튜디오의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그렇게 모아놓은 한숨소리와 울음소리만 듣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누구의 한숨소리인지 웃음소리인지는 구별되지 않고, 수많은 인간의 감정이 한 사람의 심장 파동처럼 연결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내가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 전파를 쏘고 있지만, 내겐 그들은 모르는 사람인 동시에 다 아는 사람이란 느낌이 필요했다. 영화 <화양연화>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11번. 누군가 생일을 맞은 진씨를 위해 라디오에 축하 음악을 신청해 그때 흘러나왔던 음악. 그 음악만 반복해서 듣다 보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생일 축하 메시지가 얼마나 슬픈지 알 수 있다. 허공으로 사라지는 ‘축하해요’ 소리들. 언젠가 음악 프로그램 피디가 되면 사람들의 축하 메시지만 모아서 편집해 놓고 싶기도 하다.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타갈로그어, 캄보디아어, 타이어. 내가 헤아릴 수 없는 언어로 된 축하의 말들. 그건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만든 방송이 될 것이다. 축하해 주세요, 축하해 주세요! 어떻게 들리든 축하해 주세요.

나와 남은 연결돼 있다는 느낌은 나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에겐 너무나 절실하다. 어떻게든 연결하라!

폴 오스터의 『신탁의 밤』엔 포르투갈제 파란색 노트가 나온다. 주인공은 페이퍼 팰리스란 문구점에서 그 노트를 사고 그 노트에 ‘신탁의 밤’이란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가 만든 소설 속 주인공 닉은 뉴욕의 유능한 편집자였지만 길을 걷다가 머리에 공사장의 건축물이 떨어지는 바람에 죽을 뻔한 사고를 당하자 택시를 잡아타고 아무렇게나 떠나버린다. 가장 빨리 뜨는 비행기를 타고 그가 도착한 도시는 캔자스시티다. 수중에 돈이 별로 없던 그는 그 도시에 도착하던 날, 택시 기사에게 받은 명함을 들고 그를 찾아가 새로운 직업을 얻는다. 그건 택시 기사가 역사 보관소로 명명한 지하 벙커에서 자료를 분류하는 일이었다. 그 방은 가로 15미터 세로 10미터에 창문은 하나도 없고 3미터짜리 책꽂이가 여러 줄로 늘어선 방이다. 책꽂이의 선반은 수십만 권의 전화번호부로 빼곡히 차 있다. 도시에 따라 알파벳순으로, 그리고 발행된 연대순으로. 마이애미, 보스턴, 뉴욕. 큰 도시에서 작은 도시까지. 미국에서 동유럽까지. 그는 1946년부터 36년 동안 전화번호부를 모아온 것이다. 그가 살아온 세월과 정확히 일치하는 기간을 엄청나고, 겉으로 보기엔 아무 의미도 없는 일에 바친 것이다.

닉은 묻는다. “이 전화번호부는 병뚜껑이나 담뱃값, 호텔 재떨이, 도자기 코끼리 같은 것들을 수집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가 있죠. 어떤 의미가 있죠?”

택시기사는 대답한다. “이 방은 세상을 담고 있소.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이름들. 한곳에 그 두 가지를 한데 모아놓은 것으로써 나는 나 자신에게 인류가 끝장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거요. 1945년 4월 우리 부대는 독일에 있었고 우리는 다하우 수용소를 해방시켰소. 숨이 붙어 있는 3천 명의 해골들. 나는 수용소에서 요리사였고 취사반 일을 맡아 보았지요. 굶주릴 대로 굶주린 사람들. 그래서 결국은 그들은 배가 터질 때까지 먹고 죽은 거지요. 어느 날 한 여인이 아기를 품에 안고 나에게로 다가옵디다. 그 여자는 어떤 음식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아기에게 먹일 우유를 좀 달라고 합디다. 하지만 그 여자가 나한테 아기를 건네주었을 때 그 아기가 죽었다는 걸, 죽은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는 걸 알게 되었소. 그 여자는 계속 우유를 먹여달라고 애원했고 나는 죽은 아기의 입술에다 우유를 조금 부어 주었소. 그 여자는 어찌나 기뻐하던지, 너무 기뻐서 콧노래를 부르기까지 합디다. 그런데 그녀는 한 4~5미터쯤 비틀거리며 걸어가더니 진흙탕 속으로 넘어져 죽고 말았소. 그게 내가 이 일을 시작하게 된 이유요.” 닉은 결국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그 방에 갇히게 된다. 때마침 택시 기사는 심장 발작으로 죽고 그가 낯선 도시의 지하 벙커에 갇힌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난 결론이 궁금하지 않았다. 어떤 도시, 어떤 거리에 살았던 적이 있는 사람들의 흔적을 모으는 이 장면에 나는 진정으로 빠져들었다. 전화번호부 속 사람들의 의미란 무엇인가?

언젠가 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친척의 집에 갔다가 LA에 사는 한인들의 전화만 모아놓은 전화번호부를 보게 되었다. 킴스 론더리. 숙자네 뷰티 클럽. 닥터 킴스 클리닉. 이모네 캐터링. 진성 북스토어. 한국과 미국이 반씩 물과 기름처럼 섞인 그 이름들은 얼마나 많은 것을 설명하는가? 어떤 정체성인가? 그들이 살아있었다는 한 줄의 흔적들은 덧없는 것인가? 무한한 의미를 지닌 것인가? 확실한 건 그들이 그런 모습으로 살아있었다는 것이다. 전화번호부상에서 그들은 그렇게 연결된다.

한 통의 전화로 촉발된 오늘의 우울은 어쩌면 내가 남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 길이 보이지 않아서 생긴 일인지도 모른다.

나를 달래줄 만한 우화가 하나 생각난다. 나 스스로 나에게 읽어주고 싶은 글귀가 있어서 책장으로 달려간다. 파블로 네루다의 『추억』이다. 사춘기에 접어든 나이일 때, 파블로 네루다는 아주 깊은 칠레의 숲 속, 모든 곳으로부터 동떨어진 곳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불빛을 발견한다. 그 집은 프랑스 아비뇽 출신이지만 이미 칠레의 비, 바람, 먼지에 익숙해질 만큼 나이 들어버린 세 여인이 사는 집이었다. 우울한 눈빛의 그들은 네루다를 집 안으로 안내해 수천 마리의 벌레 소리와 개구리 울음소릴 들으며 대화를 시작한다. 뭘 배우고 있니? -보들레르요.

“‘보들레르!’ 하고 그들이 외쳤다. ‘어쩌면 세상이 생긴 후 외딴 이곳에서 누군가 그 이름을 발음한 건 처음이야. 이 산속에는 프랑스어를 아는 사람이 없거든.’” 그러고 나서 그들은 네루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데 수많은 초가 꽂힌 두 개의 은촛대가 하얀 식탁보로 덮인 원형 식탁을 밝히는, 빅토리아 여왕에게나 어울릴 법한 식탁이었다. 그들은 네루다를 위해 최상의 요리를 하고 지하실에서 최고급 포도주를 꺼내와 대접하였다. 그들은 자기네들끼리 웃다가 아주 이상한 카드 뭉치를 꺼냈다. 네루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이 깊은 산속까지 들어왔던 스물일곱 명이 이 집에 들렀다. 몇몇은 호기심으로, 몇몇은 나처럼 우연히. 놀랍게도 이 세 사람은 이 집을 방문한 사람들의 개인 신상 기록을 간직하고 있었다. 신상 기록에는 방문한 날짜와 그때 준비한 요리가 적혀 있었다. 그녀들은 그 친구들이 다시 올 것에 대비해서 단 한 가지라도 같은 요리를 내놓지 않기 위해 매번의 식단을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신비롭고 품위가 있다. 30년 동안 자기들의 얼굴 말고 딱 27명만을, 그것도 단 한 번씩 보았던 세 자매는 세상과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나랑 달랐다. 하지만 30년 동안 딱 27명을 만나게 된다면, 나도 다시 만날 그들에게 똑같은 요릴 대접하고 싶진 않을 거란 건 확실하다. 그 사실이 오늘 나를 위로한다. 뭐라도 하나 확실한 게 필요한 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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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혜윤 (C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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