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정혜윤 PD의 침대와 책
기죽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살기 위해 읽는 책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침대에 차례차례 눕혀야 할 네 남자
나는 겸손한 사람보다 잘난 체하는 사람을 선호하는 편이다. 자기반성이나 자기 단점 밝히기가 결국은 잘난 체하기 위한 거라면 그런 고백을 듣는 게 얼마나 맘 편하고 흥미진진한지 모른다.
(1) 몽테뉴 (‘크세주’라고 물어봤으니까)
발자크는 자신의 지팡이에 “나는 모든 장애물을 파괴한다”라고 써놓았다지만 카프카는 이 말에 이마를 찡그리며 “모든 장애물은 나를 파괴한다”로 돌려 말했다 한다. 귀엽고 오만한 카프카 같으니라고.
“사부님께서는 오류를 범하시는지요?”
“자주 범한다. 그러나 나는 내가 범하는 한 가지 오류보다는 우리가 범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오류를 생각하고 있다. 이것이 오류로부터 나를 구할 것이다.”
이 말은 눈을 번뜩이고 있는 말년의 톨스토이 같아 보이는 『장미의 이름』의 윌리엄 수사의 말이다. 소심하고 눈치 보길 즐겨하며 자신감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그런 자신의 모습이 싫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벽을 향해 돌진하고 싶다는) 내 친구에게 문신으로 새겨주겠다고 말했다가 거절당한 바 있는 이 말은 노신의 “피 맛을 본 짐승처럼 사랑하자”와 함께 침대에 걸어놓고 싶은 말이다.
“나는 사람이다. 인간에게서 발견되는 것치고 나에게 낯선 것은 하나도 없다”라고 말한 이는 천장에 경구가 잔뜩 쓰여 있는 원형의 서재를 가진 몽테뉴였다. (그는 침대 위에서보다는 차라리 말 위에서 죽기를 원했다는 점에서 나와 코드가 맞는다.) 그의 서재 천장에 적혀있던 경구는 “내가 인간이라면, 인간과 관련된 것은 무엇이라도 나와 무관하지 않다”였다. 몽테뉴는 자신의 서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서재는 원형이다. 벽면은 굽어져 있어 나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다섯 단으로 놓여져 있는 책 전부가 한눈에 들어온다. 서재는 시야가 뚫려 있고 전망이 즐거우며 내부에는 직경 16보의 공간이 있다. 다른 곳에서 떨어져 있고 찾아오기도 힘들어 마음에 든다. 운동에 효과가 있고 많은 사람들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가 내 자리이다.”
몽테뉴는 이 원형의 서재가 있는 탑에서 20년간이나 자신을 유폐시키다시피 하면서 천 권의 책을 읽고 『에세』 등을 쓰면서 지냈다. 나는 홋타 요시에가 쓴 세 권짜리 몽테뉴 전기와 박홍규 교수가 쓴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를 갖고 있는데 뭔가 꼬이는 날 급히 읽기에는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가 좋다. 그 책의 부제가 <박홍규, ‘에세’를 읽으며 웃다>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웃음은 해맑은 미소나 사람 좋은 너털웃음이 아니라 요즘 유행하는 ‘썩소’에 해당된다. 박홍규 교수는 몽테뉴의 웃음이 (저 높은 곳을 향하는) 달관의 웃음이 아닌 점이 맘에 든다고 했다. 즉, 낮은 경지의 현실 인식, 더 정직하게 말하면 자기 꼴을 알고 웃는 것이라 맘에 든다는 것이다.
인간도, 세계도 모두 불안전하고 본래 허약한 것이라고 생각한 당대의 지성. ‘너 자신을 알라’라는 질문에 매료되어 소크라테스를 매우 좋아했고,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라는 뜻의 ‘크세주’란 질문을 자신에게 먼저 던지면서 자기 자신부터 확 자유로워져버린 몽테뉴는 글쓰기를 통해 배변 습관, 발기불능, 성적 콤플렉스 등등 온갖 약점을 말해버렸을 뿐 아니라 ‘나는 값비싼 노력을 들여가며 (지혜를) 얻고 싶지는 않다. 내가 잘 살고 잘 죽는 것을 가르쳐주는 학문만을 할 것이다’ ‘꿈꿀 수 있다면 내 집을 나가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혼자서 죽고 싶다’ 등등의, 종교적 광신이 맹위를 떨치던 16세기의 학자가 했다고 생각하긴 엄청 사적이고 자유분방한 말들을 남겨 버렸다. 크세주란 질문은 어떻게 말년 20년의 몽테뉴를 그리 자유롭게 해줬을까?
『에세』를 찾아보면 단서는 너무나 많지만 핵심 중 하나는 이렇게 요약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무엇이 자신에게 무엇이 고유한 것인가를 아는 것이 사람의 제1의 임무이며, 자신을 아는 자는 남의 일을 자기 일로 혼동하지 않는다. 그는 무엇보다 먼저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가꾸며, 쓸데없는 일이나 무용한 생각이나 제안받기를 거절한다. 신은 말한다, 인간이여 너를 제외한 모든 것은 먼저 자신을 연구한다. 그리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자신의 일과 욕망에 한계를 정한다.
몽테뉴가 『에세』에 남긴 말들은 이렇다.
2권 6장, 실천에 대하여 - 타인을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를 가르치기 위해서.
3권 2장, 후회에 대하여 - 나는 변변찮으며 그다지 빛나지 않는 한 인간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무슨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다. 각각의 인간은 인간의 조건을 완전한 형태로 가지고 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며 나왔고 나아간다. 존재를 그리지 않는다. 추이를 그린다. 어떤 연대로부터 다른 연대로의 추이가 아니라 하루로부터 하루로, 분으로부터 분으로 나아가는 추이이다.
(나는 ‘조삼모사’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아침에 셋, 저녁에 넷이란 말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인간의 새로운 깨달음을 찬양하는 말인 줄로만 알았었다. 나는 아직도 내 해석이 더 맘에 든다. 어차피 인간은 파도나 구름이나 하늘처럼 분 단위, 시간 단위로 변하는 존재니까. 하늘이나 구름이나 파도 역시 수없이 변하면서 후회나 부끄러움 없이 자기 존재를 드러내니까. 나 역시 자연의 일부란 게 얼마나 든든하고 다행스러운가? 밀레의 만종 속으로 뛰어들어가 같이 기도하고 싶은 심정이다.)
3권 17장, 교만에 대하여 - 나는 속되고 천한 결점은 가지고 있어도 그런 것을 떳떳이 자백하지 않거나 그것을 변명해본 죄는 없다. 나는 어떤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위에 있다고 본다. 내 걸음으로 그들을 따르기에는 무력함을 명백히 인정한다 해도 나는 그들을 눈으로 뒤따르며 그들을 그렇게 높이 올려놓은 원동력을 판단해 보는 일을 멈추지 않고 어느 정도 그런 힘의 씨앗이 내게도 있음을 인정한다.
(나는 겸손한 사람보다 잘난 체하는 사람을 선호하는 편이다. 자기반성이나 자기 단점 밝히기가 결국은 잘난 체하기 위한 거라면 그런 고백을 듣는 게 얼마나 맘 편하고 흥미진진한지 모른다. 내게 단점과 장점의 관계는 결혼식 전의 화동과 신부의 관계와도 같다. 단점은 장점을 예고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야말로 내게는 인간의 얼굴을 한 변증법이다. 몽테뉴도 교만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전에 단점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몽테뉴는 사물에 대해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내가 이렇게 자유롭게 의견을 토로하는 이유는 사물의 척도를 밝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시 내 관찰력의 한도를 밝히기 위해서다” 또 “내가 짝수보다 홀수를, 금요일보다 목요일을 좋아한다고 해도, 여행할 때는 토끼가 나의 길을 가로질러 건너가는 것보다 길가를 따라가는 것을 즐겨본다 해도, 구두를 벗을 때는 오른발보다도 왼발을 먼저 내놓는다고 해도, 이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주위의 모든 몽상은 적어도 귀 기울일 만한 가치는 있다. 따라서 판단이 대립되는 상태는 나의 기분을 해치지 않고 변하게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의 정신을 일깨워 단련시킨다.”
(판단이 대립되는 상태를 해결하는 능력이 결국 자유로운가 아닌가를 대략 규정지을 수 있다.)
나는 몽테뉴가 『에세』에서 한 말 중 이 말을 좋아한다. “나는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을 때 반드시 적용해야 될 금과옥조) 그래서 니체가 몽테뉴에 대해 한 말은 딱 맞다. “그에게는 인간의 마음을 밝게 해주는 명랑함이 있다.”
근엄하고 퉁명스러워도 우리를 명랑하게 해주는 몽테뉴!
(2) 움베르토 에코(자신에 대해 정의 내리기의 기술에 대해 알려줬으니까)
『세상의 바보들에풰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에는 이런 제목을 단 장이 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 그중 대표를 몇 개 소개해보겠다.
“속기사를 앉혀놓고 하루 두 시간씩 백 년을 구술해도 생전에 내 흥미를 끌었던 일을 다 쓰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자서전을 시리즈로 만든다면, 내가 혹시라도 장수한다면 자서전의 권수가 하도 많아져서 도시 하나를 꽉 채우고도 남아 주 정부가 개입해야 하는 상황이 될 것이고 살아 있는 동안 어떤 억만장자라도 할부 말고 전집을 살 수 있는 만큼 여유 있지는 못할 것이다!”
자서전을 쓰면서 이렇게 뻔뻔하면서도, 정신도 별 이상 없이 맑고 온전하고, 존경과 사랑까지 받는 작가는 마크 트웨인뿐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다. 그가 자서전을 쓰면서 하던 말이 있다.
“내 자서전은 거울과 같아서 나는 항상 자서전을 통해서 내 모습을 본다. 또한 지나가는 사람을 거울을 통해서 본다. 그들이 내 관점에서 나를 선전하고 나를 우쭐하게 하고 나를 치켜세우는 말이나 행동을 할 때마다 자서전에 싣는다.”
나는 정말이지 이 말을 핑크 립스틱으로 거울에 써놓고 싶다. 사소하게라도 억지로라도 나를 칭찬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립스틱으로 거울에 쓰면서 방긋 웃으면서 하루를 마감하고 싶다.
칭찬에 마음을 활짝 열어놓는 이 전략의 결과 덕분인지 마크 트웨인의 자서전을 보면 그는 비탄에 잠기는 법 없이 시종일관 즐거운 마음으로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인생의 순간적인 일을 60만 단어 이상으로 확장하는 게 자서전 쓰기의 목표라고 말했던 마크 트웨인이 얼마나 끝까지 뻔뻔해서 멋진 사람이었는가는 이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
“25년 동안 나는 지속적으로 성실하게 인류에 대해 헌신했다. 다시 말해서 나 자신의 연구에 헌신했다. 내 개인 안에 온 인류가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많든 적든 인류의 모든 구성요소 중에서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없다.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통해 보더라도 내가 가지지 않은 자질을 가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다른 사람과 나 사이의 작은 차이점으로 다양성이 생기고 단조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그것뿐이다.”
자신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그 차이점에 주목함으로써 다른 이들보다 더 정확하고 포괄적으로 인류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고 단언하는 그가 인류의 특성으로 언급한 것은 너무 뜻밖이어서 눈을 비비고 다시 보게 된다.
“나는 왜 사람들이 나쁜 당구대보다 좋은 당구대를 좋아하는지, 굽은 당구채보다 곧은 당구채를 좋아하는지, 이가 나간 공보다 둥근 공을 좋아하는지, 기울어진 테이블보다 평평한 테이블을 좋아하는지, 무디고 반응이 없는 벽보다 민감한 벽을 좋아하는지 궁금하다. 내가 이런 문제를 궁금해하는 이유는 좋지 않은 당구 도구가 최고의 도구만큼이나 당구와 관련된 필수적인 사항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시원찮은 도구에서 얻는 재미가 더 크다. 좋지 않은 도구가 좋은 도구보다 선수나 구경꾼에게 30% 이상 큰 즐거움을 전달한다.”
인류의 특성이란 게 그러니까 둥근 당구공과 모난 당구공 중 어느 것을 선호하느냐는 식의 문제로 가버린다면 아! 모난 당구공 같은 내 인생이라도 얼마나 흥미진진한가?
마술적 저널리즘을 꿈꾸는 라디오 피디. 세월호 유족의 목소리를 담은 팟캐스트 [416의 목소리] 시즌 1, 재난참사 가족들과 함께 만든 팟캐스트 [세상 끝의 사랑: 유족이 묻고 유족이 답하다] 등을 제작했다. 다큐멘터리 [자살률의 비밀]로 한국피디대상을 받았고, 다큐멘터리 [불안], 세월호 참사 2주기 특집 다큐멘터리 [새벽 4시의 궁전], [남겨진 이들의 선물], [조선인 전범 75년 동안의 고독] 등의 작품들이 한국방송대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삶을 바꾸는 책 읽기』, 『사생활의 천재들』, 쌍용차 노동자의 삶을 담은 르포르타주 『그의 슬픔과 기쁨』, 『인생의 일요일들』, 『뜻밖의 좋은 일』, 『아무튼, 메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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