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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한 『민족경제론』, 독자 감동시킨 까닭 - 박현채 ①

한 시대의 사회운동이란 각성된 여러 사람들의 이론과 행동에 의해 집단적으로 진행되는 그런 풍경일 터이고, 저자이자 강사였던 박현채 선생은 이 각성된 이론과 행동을 헌신적으로 도모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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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한국 경제구조론』(일월서각), 『한국자본주의와 민족운동』(한길사), 『민족경제론』(한길사)으로 제2회 단재상을 수상한 박현채 교수가 수상연설을 하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1970년대 중·후반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한 시기를 여러 관점에서 규정할 수 있겠지만, 출판현장에서 한 권의 책을 기획하고 만들어 세상의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한 출판인으로서 나는 이 시기를 '책의 시대'로 규정하고 싶다.

이 시대를 치열하게 산 한국인들은 책을 쓰거나 만들거나 읽었고, ‘한 권의 책’을 통해 새로운 세계와 역사를 꿈꾸었다. 격동하는 시대와 더불어 책은 역사운동의 한가운데에서 당당한 한 주체로서 우리들의 삶의 지향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80년대를 책의 시대 또는 출판운동의 시대라고 규정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이 시대의 모든 민족운동·사회운동은 책과 연계되었고 민족과 사회를 발견하는 의식과 이론,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이루어지는 발상과 실천은 책 쓰기, 책 만들기, 책 읽기와 상호 연대되었다. 책 쓰기와 책 만들기와 책 읽기라는 세 문화운동의 수평적 연대는 이 시대 사회운동의 사상과 이론과 행동을 창출하는 중요한 역량으로 자리매김 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경제학자 박현채 선생은 바로 그 시대 출판문화운동의 한가운데에서, 치열하게 책 쓰기를 계속한 ‘저자’이자, ‘강사’였다. 한 시대의 사회운동이란 각성된 여러 사람들의 이론과 행동에 의해 집단적으로 진행되는 그런 풍경일 터이고, 저자이자 강사였던 박현채 선생은 이 각성된 이론과 행동을 헌신적으로 도모해냈다.

출간되자마자 비상한 관심 불러온 『민족경제론』

한길사에서 1978년에 펴낸
박현채 선생의 『민족경제론』
박 선생이 남긴 다양한 논문과 저술과 강의는 참으로 방대했고, 같은 시대를 산 사람들에게 늘 치열한 정신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경제평론가’라는 ‘직함’으로 그가 써내는 글과 저술은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문장이었지만,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경제와 사회, 역사와 현실을 보는 문제의식과 안목을 키워주었다. 결코 잘 읽힐 수 없는 에세이와 논문과 저술이었지만, 한 시대의 독자들을 감동시키는 인기 저자가 되었던 것은 아마도 “혼신의 힘으로 쓰고 혼신의 힘으로 역사의 편에 서는”(『민족경제론』 머리말) 그의 저술의 자세와 정신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박현채 선생을 만난 것은 1973년이었다. 신문에서 잡지로 옮겨 일하게 되면서 「쌀의 반세기」「다국적 기업의 논리와 행태」「차관과 국민경제」와 같은 선생의 글을 청탁하여 싣게 되었는데, 우리는 유신 치하라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름대로 문제의식을 잡지저널리즘으로 관철하려 했다. 잡지기 때문에 겉으로 크게 노출되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의 의지를 어느 정도는 더 잘 관철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때 자유언론운동을 펼치고 있었는데, 우리의 문제의식 또는 자유언론정신이 박 선생의 호흡과 맞았다. 그러나 우리는 1975년 3월에 동아일보사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신문사 복귀가 현실적으로 어렵게 되자 1976년 출판사를 등록해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출판은 또 다른 차원의 언론일 수 있었다. 이제 기자로서가 아니라 출판인·편집자로서 나는 박현채 선생을 만나게 된 것이다.

사실 박현채 선생의 『민족경제론』에는 ‘민족경제론’이라는 용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박현채 평론선’이란 이 책을 마무리하면서 제목을 어떻게 붙일까 고민하다가 나는 선생에게 ‘민족경제론’으로 하자 했고, 선생이 이에 동의했을 뿐이다.

글의 내용으로 보아 ‘민족경제론’이 타당하지 않느냐고 말씀드렸고, 박 선생도 그래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 후 한길사는 박 선생의 이런저런 책을 내거나 글을 실을 때 제목을 내가 먼저 이렇게 저렇게 붙이자고 안을 냈고, 선생은 늘 동의하는 편이었다.

치열한 논리와 정신을 가진 저술이었지만 박 선생은 출판사와 편집자의 견해에 담대한 편이었다. 우리 출판사로서는 참으로 소중한 저자 한 분이었지만, 선생은 책 만들기에 늘 편안하고 관용했다.

1978년 4월 ‘오늘의 사상신서’ 제5권으로 출간된 『민족경제론』은 출간되자마자 젊은 독자들의 비상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독자들의 힘찬 반응은 한편으로는 걱정이었다. 이미 『우상과 이성』으로 리영희 선생이 구속되어 있는 데다 송건호 선생의 『한국민족주의의 탐구』, 고은 선생의 『역사와 더불어 비애와 더불어』, 안병무 박사의 『시대와 증언』 등으로 한길사의 ‘오늘의 사상신서’는 당국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당국으로부터 ‘경고’가 출판사에 전해지기도 했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민족경제론』이 문제가 되긴 했지만 판금까지는 가지 않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조심해달라고 했다.

권위주의 정치시대에 독자들의 ‘열독’이 권력에는 문제가 된다. 많은 이가 관심을 보이는 것을 권력은 위험시한다. ‘금지’의 한 기준이 되는 것이다. 『민족경제론』은 결국 출간된 지 석 달 만에 조심하라던 그 당국자로부터 ‘판금통지’를 통보받았다.

1978년 ‘판금’의 시련… ‘문제도서’에서 ‘필독서’로

한 권의 책이란 한 시대의 역사적 소산이다. 한 시대는 그 시대와 상응하는 ‘한 권의 책’을 탄생케 한다.

『민족경제론』이란 한 권의 책은 한 시대를 혼신으로 성찰하는 지식인 박현채의 개인적 저술이기도 하지만, 이미 그의 『민족경제론』은 그 시대의 독자들, 그리고 다른 여러 조건과 더불어 존재하고 발전하는 역사적 산물이 되고 있었다. “자립적 민족경제의 확립을 위한 길”에서 “역사의 편에 서는”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또는 현실인식과 역사의식은 그 시대를 사는 독자들의 것이 되고 있었다.

“자립적 민족경제의 확립을 위한 길은 생활하는 민중의 소망에 좇아 국민경제의 내용을 정립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민족경제론』을 왜 판금하는지 당국자가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한 바도 없었다. 유신권위주의 권력이 날로 강퍅해지면서 의식 있는 젊은이들이 열독한다는 그 정황과 분위기가 판금된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1978년 7월 초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은 ‘판금’되는 역사적 시련을 겪지만 한국현대사의 ‘문제도서’ 또는 ‘명저’로 자리잡는다. 『민족경제론』은 이미 5천 권 이상이 독자들의 ‘소유’가 되었고, 이들 책은 젊은이들이 돌려가며 읽는 ‘문제도서’가 되었다. 때로는 복사·복제되어 토론하는 ‘필독서’가 되어가고 있었다.

문제작 또는 명저란 스스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더불어 그 시대상황이 탄생케 한다는 사실을 『민족경제론』은 증명해 보였다.

만약 그때 『민족경제론』이 판금되지 않았다면, 『민족경제론』이 그만큼 한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까. 『민족경제론』이라는 한 권의 책의 이론과 사상은 저자 박현채와 그 시대의 상황과 역사가 ‘공동으로’ 만들어내었다고 볼 수 있다.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독자들이 ‘명저를 만드는 운동’에 연대하는 것이다.

검열보조원들, “읽어보니 참 좋은 책이네요”

박현채 선생은 언제나 후배들에게 다정다감했다.
『민족경제론』의 이론과 사상을 판금시킨 유신권위주의는 1979년 10·26사건으로 결국 몰락한다. 사람들은 정치상황의 격동에 경악했다. 1980년 ‘서울의 봄’을 만끽하면서 뭔가를 기대하고 낙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서울의 봄’은 신군부에 무참하게 짓밟혔다.

그러나 우리의 책 만들기는 계엄사령부의 검열을 받아가면서 계속되었다. 한종만 교수가 편저한 『한국근대민중불교의 이념과 전개』, 마틴 카노이의 『교육과 문화적 식민주의』, 차기벽·박충석 편의 『일본현대사의 구조』, 차기벽의 『민주주의의 이념과 역사』 등이 ‘계엄사검열필’이라는 붉은 도장을 받아 펴낸 책이다.

그런 계엄령 속에서, 나는 1980년 2월 『민족경제론』『우상과 이성』『해방전후사의 인식』의 ‘복권작전’에 나섰다. 이 3권의 책을 들고 서울시청에 자리잡은 계엄사령부를 방문하고 검열반원을 만났다. 당시 젊은 시청 직원들이 검열작업을 보조해주고 있었는데,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도대체 왜 이런 책들이 판금이 되어야 할까요?”

나는 다시 한 번 검토해달라고 진지하게 요청했다. 검열보조원들은 나의 요청에 호의로 응했고, 검토한 결과 참 좋은 책이라는 반응이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열망하는 민주주의 국가사회를 건설하려면 이만한 논의는 허용되어야 한다는 나의 주장에 이들도 어느 정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수정 없이 ‘검열필’ 도장을 받아낼 수는 없다는 대답이었다.

나는 “그럼 좋다, 약간의 손질을 하겠다”라고 했다. 사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책을 낸 후 그 내용을 보완할 수 있는 더 적절한 글들을 찾았고, 『우상과 이성』도 이미 만기 출소한 리영희 선생과 의논해서 형식적인 개편을 한다. 그리고 『민족경제론』은 박 선생이 1974년 월간 <세대>에 발표한 「민중과 경제」의 몇 문장을 들어내고 해서 문제의 책 3권은 1980년 3월 계엄사령부 검열관의 ‘검열필’을 받게 된다.

잡지나 책을 만들어본 사람들은 알지만, 편집과정의 ‘정리’는 사실 그 내용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다. 전작이 아니고 이런저런 글을 모아 만드는 책은 때로는 중언부언되는 것도 사실이다. 박 선생의 『민족경제론』은 몇 줄을 들어낸다고 해서 결코 문제될 것이 없었다. 박 선생 자신도 그렇게 하자고 했다.

‘시련’ 속에서 다시 태어난 『민족경제론』 등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참으로 경이로웠다. 고전하던 한길사는 3권의 책이 풀리면서 이런저런 책을 과감하게 기획할 수 있었다. 이 3권의 책은 80년대 전 기간에 걸쳐 대학생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으면서 책의 시대 80년대를 중심에서 이끌어가는 존재가 되었다.

권력이 ‘문제도서’를 양산해냈던 80년대

수시로 이 책들이 문제가 되고 있다고 보도되곤 했다. 그때는 시도 때도 없이 기관과 경찰이 수많은 책을 ‘압수’해가곤 했다. 그러나 권력의 문제도서 압수와 수색은 이 책들의 존재를 독자들에게 각인해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니, 권력에 의한 가장 효과적인 광고였다.

사실 80년대는 권력이 ‘문제도서’를 양산해내는 그런 시대였다. 아주 보편적인 내용도 젊은이들이 관심을 쏟고 읽으면 문제도서로 분류되는 ‘책의 수난시대’이기도 했지만, 권력에 의해 그 책은 새롭게 의미가 부여되고 독서가 권장되는 역설의 시대이기도 했다.

『민족경제론』 이후 한길사는 박현채 선생과 더불어 수다한 일을 했다. 1981년 3월에는 ‘오늘의 사상신서’ 제23권으로 『한국농업의 구상』이 출간되었다. “인류의 생존이 자연으로부터의 필요한 재화의 획득에 기초하고 있는 한 농업의 산업으로서의 위치는 흔들리지 않으며 농자로서의 농민은 천하지대본”이라고 박 선생은 이 책의 성격을 머리말에서 규정했다.

1984년 9월에는 『한국 자본주의와 민족운동』을 ‘오늘의 사상신서’ 제77권으로 펴냈다. 이 책은 역사의 주체로서의 민중의 자리에서 우리 사회와 민족운동을 살펴본다. 박 선생의 저간의 저술이 경제 또는 경제학적인 것이라면 이 책은 경제학적인 기초 위에 서면서도 그 시야를 경제 밖으로 확대한 것인데, ‘민중과 역사’ ‘분단시대 민족주의의 과제’ ‘4월 민주혁명과 민족사의 방향’ ‘자본주의의 위기와 민족운동의 과제’ ‘문학과 경제’ ‘자본주의 정신과 기업윤리’ 등이 그 내용이다. 흔히 생각되는 경제평론가로서뿐 아니라 한 시대의 정신과 사상을 깊숙이 논구하는 사상가로서의 박현채 선생의 면모를 보여주는 책이었다.

다음 글: '낭만주의자' 박현채, FTA 시대를 어떻게 볼까 - 박현채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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