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기한’ 지난 ‘대한민국’ 체류기
J. 스콧 버거슨의 불유쾌한 한국 탐색
내게 J. 스콧 버거슨(J. Scott Burgeson, 1967- ) 의 『대한민국 사용 후기』(안종설 옮김, 갤리온, 2007)는 ‘유통기한’이 지난 느낌이다. 그것도 꽤 한참. 표지의 경고문구가 눈길을 끈다.
나는 이웃이 싫다
이웃을 잘 만나야 한다. 중간층에 껴 사는 아파트와 다세대 주택 거주자는 위아래 이웃을 잘 만나야 한다. 나는 평균에 약간 못 미치는 이웃을 만난 것 같다. 한 번은 늦은 시간에 아파트 경비아저씨 두 분이 초인종을 눌렀다. 아래층에서 위층이 시끄럽다는 항의가 들어왔다는 거다.
오늘은 우리 아이들이 유별나게 놀았나, 하는 생각과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듦과 동시에 짜증이 났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층간 소음에 아주 취약하여 아래 위층의 약간 큰 소리는 웬만하면 다 들린다. 내가 글을 쓰는 방에선 이따금 아래층의 누군가가 듣거나 연주하는 기계음이 들렸다.
아래층 할머니가 아래층은 안방 옆 작은 방 베란다를 텄으니 아파트 구조를 바꾸지 않은 우리 집 작은 방 베란다를 물청소하지 말아 달래서 집사람이 그러겠다고도 했다. 우리 딸내미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아래층 할머니가 손자들이 썼던 초등학생 물품을 몇 개 가져오셨다. 나는 괜찮다, 필요 없다며 받지 않았다.
위층은 강적이다. 십대 중후반의 세 딸이 서로, 딸들과 엄마가 자주 싸운다. 아침저녁으로 아주 시끄럽게. 직접 찾아가 조용히 해달라고 해도 소용없다. 한 번은 승강기에서 그 집 딸(몇째 딸인지 모름)을 타이르며 훈계하다가 본전도 못 건졌다. “아저씨네도 싸우던데요, 뭐.” 며칠 전 경비실에 피아노 소리가 시끄럽다는 ‘민원’이 접수됐다는 인터폰을 받았다.
나는 경비아저씨에게 누가 민원을 넣었느냐고 물었다. 위층이라고 했다. 정말 몹시 화가 났다. 경비실까지 내려가 그 사실을 재확인한 다음, 분을 삭이며 윗집 초인종을 눌렀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 집 딸(역시 몇째인지는 모름)이 죄송하다는 말을 거듭했다. 나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다, 앞으론 가만있지 않겠다고 했다. 윗집의 앞집은 피아노와 바이올린 개인 교습을 한다.
도대체 뭘 각성하라는 건지
올 초 입주를 시작한 우리 집 바로 뒤편의 대단위 아파트 단지에는 위층보다 더한 강적이 몇 입주한 모양이다. 어느 날, 그 아파트 단지 정문에 목불인견의 현수막 세 개가 나붙었다.
“입주민의 재산을 갈아먹고 있는/ ○○○ ○○은 각성하라”
“○○○ ○○ 이용하지 않는/ 자랑스런 △△△ 입주민”
“우리의 얼굴인 정문을 막는 ○○○ ○○(슈퍼)/ 조그만 물건 하나라도 팔아 드릴 수 없습니다”
이러는 게 자기 얼굴에 똥칠하는 짓인지는 아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모르겠지. 현수막 두 개에는 친절하게도 “경고: CCTV 작동 중 무단 철거 시 형사 고발 조치함”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갈아먹고’는 ‘갉아먹고’의 오자? 슈퍼 주인에게 이건 명백한 영업방해고 명예훼손으로 고소해도 된다 했더니, 주인은 그래서 현수막을 내건 주체를 전혀 안 밝혔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놈의 집값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정상적인 영업을 하는 슈퍼마켓을 이런 식으로 매도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민주화운동의 부작용도 심각하다. 아무튼 가급적 먼 곳에 거주하는 이웃을 사귀어야 할 것 같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선 옆 동의 이웃을, 아파트 단지는 좀 떨어져 있는 단지의 거주자를 말이다. 그런데 우방(友邦)이라는 나라는 가깝거나 멀리 있거나 다 조심해야 한다.
너희들의 ‘대한민국’
내게 J. 스콧 버거슨(J. Scott Burgeson, 1967- ) 의 『대한민국 사용 후기』(안종설 옮김, 갤리온, 2007)는 ‘유통기한’이 지난 느낌이다. 그것도 꽤 한참. 표지의 경고문구가 눈길을 끈다. “고집스럽게 대한민국을 사랑하시는 분들은 절대로 이 책을 읽지 마십시오.” 국가관이 트릿한 나는 아무 상관없겠네. 책 내용에 대한 공감도는 낙차가 크다. 전반적으로는 수준 이하다.
스콧 버거슨의 한국과 한국인 비판은 따분하다. 그 이유는? 우선, 그의 시각은 지나치게 표피적이다. 무리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에게 우리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박노자의 깨우침은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그의 장점은 현장체험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약 10년의 체류기간은 어떤 나라에 대해 단정을 내리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다. 이나마 그는 줄곧 머물지 않았고, 이 나라 저 나라를 왔다 갔다 했다. 내 말은 신중해야 한다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재단을 하기 쉽다. 스콧 버거슨뫀 우리를 재단한다는 혐의가 짙다.
또한 그는 자신이 미국 출신 백인 남자라는 사실을 잊은 듯하다. 나는 그를 차별대우한 한국인을 모두 찾아서 최소한의 자긍심을 지킨 것에 대해 공치사를 하고 싶다. 특히, 남한에서 미국인 백인 남자를 박대한 것에 대해. 그에게 주한 미국대사관과 대사관저의 위치가 왜 거기에 있는지 톺아보라는 것은 애당초 무리다.
한동안 하루에 두 번 넘게 미 대사관 직원 관저의 높다란 담벼락 길을 지나다닌 서평전문지 기자의 씁쓸한 기분을, 그는 알기나 할까? 나는 그 모퉁이에 있던, 지금은 어디론가 사라진 백상미술관 언저리에서 백인 남자와 한국인 여자 커플을 볼 때마다 심한 부조화를 느꼈다. 그들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정말 이상하다
다음은 스콧 버거슨이 『발칙한 한국학』(주윤정?최세희 옮김, 이끌리오, 2002)의 앞부분에서 나열한 그가 우리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는 목록의 일부다.
“한국인들은 굉장히 민족주의적이지만, 해방 후 두 강대국에 의해 두 동강 나 끔찍한 전쟁을 치른 것도 참 이상하다. 오늘날의 적지 않은 한국인이 통일보다는 차라리 분단을 선호한다고 한다. 진정한 민족주의의 목표는 조국통일이 아닌가? 하여튼 참 이상이다.”
이상할 것도 되게 없다. 한국인은 굉장히 민족주의적인 게 아니라 다소 민족적이다. 식민지배, 분단, 동족상잔의 비극은 힘이 없어서 강대국에 휘둘리느라 그리됐다. 우리는 여전히 선택의 여지가 좁다. 주어진 대로 그냥 사는 거다. ‘민족적’인 것의 진정한 목표가 뭔지는 나도 모르겠다.
『맥시멈 코리아(개정판)』(자작나무, 1999)는 미니멈 코리아다. 이 책에 실린 1998년의 비무장지대 ‘견문기’는, 휴전선 인근에서 군 복무를 하고 그 중 서너 달을 DMZ 안의 GP에서 지냈던 나로선 하품만 나온다. 스콧 버거슨은 「한국인에 대한 10가지 주의사항」이라는 글에서 짐짓 우리의 둔한 시간감각을 헤아려주는 척한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실제보다 30분 이른 일본의 표준시를 따르고 있다는 것은 모르는 듯싶다.
스콧 버거슨은 우리를 조롱한다. 더욱이 그는 자신을 “바보스런 외국인” 따위로 낮추면서 조롱을 정당화한다. 그가 태어난 “미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개판인지”는 내가 알 바 아니다. 한국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상관없다. 다만, 나는 그의 한국에 관한 책 세 권을 혐한 서적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이 나라의 구멍가게 주인아저씨, 술집 점원, 호텔 프런트데스크, 은행원, 관광안내센터 등의 불친절은 내외국인을 구별하지 않는다. 보통의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대략 불친절하다. 또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글을 쓰는 직업과 책을 엮는 작업에 대해 일반적으로 무관심하다. 어쨌든 ‘기획 리뷰’를 모아 엮는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넷째 권에 이 글은 넣지 않겠다(마음이 바뀔지 몰라 다짐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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