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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을 귀여워해주고 싶은 날 읽는 책

너의 첫 경험을 말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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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미워 죽겠는 날은 남자들이 예뻐 죽겠는 책을 찾아 읽으면 아주 큰 도움이 된다. 이를테면 『개선문』이라든가, 이를테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라든가, 이를테면 『빅 피쉬』라든가, 『장미의 이름』이라든가.


남자들이 미워 죽겠는 날은 남자들이 예뻐 죽겠는 책을 찾아 읽으면 아주 큰 도움이 된다. 이를테면 『개선문』이라든가, 이를테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라든가, 이를테면 『빅 피쉬』라든가, 『장미의 이름』이라든가.

『장미의 이름』은 첫 장부터 벌써 나를 흥분시킨다.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윌리엄 수도사의 용모도 나를 흥분시킨다. 그의 이미지는 황금색이다. 그의 얼굴에 주저와 당황의 빛이 나타나는 순간은 오로지 호기심이 작동하는 순간뿐이지만 그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정력적으로 활기를 찾는 순간도 바로 호기심을 느낀 순간이다. 그는 키가 크고 멋진 황금색 수염을 가지고 있고 책을 많이 봐서 손가락에 늘 금박 가루를 묻히고 다니는 사람이며 그 박학다식함으로 세인들을 깜짝 놀라게 할 뿐 아니라 당시에는 놀랍게도 안경과 거울과 나침반을 이해하는 기계공의 손과 자연과학을 신봉하는 뇌를 가진 신학자다.

“세상 만물은 책이며 그림이며 또 거울이거니”란 세계관을 가진 그는 봄을 쉰 번 넘게 보낸 중년의 나이에 그의 제자 아드소와 함께 살인사건이 일어난 수도원으로 향한다. 그의 제자 아드소는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질문이 많고 꽃다운, 순수한 호기심 가득한 젊은 영혼인데 이런 표현을 듣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리송해질 정도로 민감하기도 하다. “아름다워라 젖가슴이여, 부풀어 올랐으되 지나치지 아니하고 자제하였으되 위축되지 않았노라.”

사건 경과 4일째 되던 날, 아드소는 윌리엄과 함께 장서관 미궁에 들어갔다가 『사랑의 거울』이란 책을 보게 된다. 그 책을 읽기 바로 전날 밤, 그는 결국엔 인생에 단 한 번이 된 사랑의 경험을 치르게 되는데 상대방은, 가슴은 흡사 백합꽃밭에서 뛰노는 두 마리 새끼 사슴같이 아름답고, 배꼽은 영원히 비지 않을 술잔 같고, 입천장에서는 독한 포도주가 흘러나와 내 사랑을 취하게 하고, 새벽처럼 일어났으되 달처럼 아름다운 굶주린 가련한 아가씨였다. 첫 경험을 치르고 그는 이승에서 단 한 번, 짧은 순간이나마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 자가 있으면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겠다고 중얼거리며 잠들었다가 깨어나서는, 짐승이란 무릇 교미를 끝내면 쓸쓸해지는 거구나 하고 처절한 참회의 심정에 젖어든다. 그러던 참에 이 책을 발견하고는 비상한 관심을 갖고 읽어나가게 되는 건데….


“사랑이 괴질인 까닭은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치료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치람 사람 바실리오에 따르면 사랑은 눈을 통해 우리 몸속으로 돌아오는 병이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필요 이상으로 들떠 있거나 혼자 있거나 혼자 있고 싶어하거나 공연한 심술을 부리거나 이 심술 때문에 말수가 적어진다. 상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상을 만나지 못할 경우에는 심한 자기 학대 증상을 보이면서 증세가 지나쳐 뇌가 영향을 받으면 정신을 잃거나 헛소리를 하게 된다는 대목에서는 겁이 덜컥 났다. 나는 성녀 힐데가르트의 글도 읽었다. 이 성녀의 주장에 따르면 여자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느끼게 되는 우울증이야말로 천국에서 경험하는 완벽한 평화의 상태와는 정반대되는 것으로, 중증에 속하는 암담함과 비참함을 느끼게 하는 우울증은 뱀의 숨결을 맡는 것에서 생기는 병이었다.

또 아부바크르 무하마드 이븐자카야 아르라지는 의학 총서에서 상사병으로 인한 우울증을 낭광증과 동일시하고 있었다. 즉 상사병에 들려 끝없쳀 우울증을 느끼는 사람은 하는 짓이 늑대와 비슷하다는 그의 증세 묘사는 내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초기 증세로는 우선 외모에 변화가 오고 시력이 약해지고 눈이 들어가고 혀가 마르고 시도 때도 없이 갈증을 느끼고 얼굴과 목에 개의 이빨자국이 나타나다가 결국은 늑대처럼 한밤중에 묘지를 어슬렁거리게 된다.

아비케나의 인용에 따르면 상사병은 이성인 상대의 얼굴, 태도, 행동에 대한 연속적인 상상에서 비롯된 편집증적 우울증이다. 상사병의 치료법은 결혼이지만 그게 안 된다면 첫째는 온탕욕, 두 번째는 사랑하는 이를 비난해줄, 나이가 들고 이 분야의 전문가인 여자들의 도움을 받는 것, 세 번째는 계집종 여럿을 붙여 난교하게 하는 것이다. 이 병은 습도와 온도가 높은 곳에 있다보면 비롯되는 체액의 분비와 정신의 고양이 지나친 데서 생기는 병인데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욕망이 지나치게 되는 경우 오로지 사랑의 허상만 밝히게 된다. 치료법은 사랑하는 대상에게 접근할 수 있다는 희망과 확신을 버리는 것이다.”


(이 문장들은 현대인들에게도 아주 유용하다. 특히 그녀를 비난해줄 나이가 많고 그 분야의 전문가인 여자를 찾아야 한다는 대목에선 참으로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지혜가 우리 주위에 널려 있단 생각이 든다.)

아드소는 단 한 번의 사랑의 경험을 젊은 사제의 몸으로 이해하려 몸부림치다가 인생의 중요한 비밀을 포착한다. ‘사물을 꿰뚫어보는 데는 지식이 사랑만 같지 못하더라’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이 그 해답인즉슨, 여자와의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세상과 자기 자신을 화해시키며 고요한 평화를 찾아가는 행위라는 것을 청년답게 힘겹게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이제 여자는 더 이상 단순한 여자의 몸이 아니다. 신은 지혜를 주기 위해서 그에게 여자를 보낸 것이다. 그는 여자의 몸에만 쏠리는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 양과 개와 소를 면밀히 관찰하며 사랑하며, 역대의 양과 개와 소에 관한 자기가 아는 모든 우화와 교훈을 끌어내며 동물들을 찬양하며 마음의 위안을 간신히 찾아간다. 딱 한 번의 경험으로 그는 전 인류를 사랑하게 된다. 우리 시대 식으로 표현하면 한 여자를 사랑하면서 세상을 사랑하게 되었다 정도가 될 수 있을까?)

단 한 번의 사랑 때문에 온갖 정신의 비약을 거듭하다가 인생의 비밀을 깨달아버렸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귀여운 총각의 첫 경험 나이는 아드소보다도 더 어릴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책 읽어주는 남자』의 주인공이다. 그의 나이 열다섯, 황달에 걸려 길거리에서 구토를 하다가 서른다섯 ‘한나’라는 전차 차장의 도움을 받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성숙한 벌거벗은 몸을 보고 사랑의 행위를 하게 되는데 그날 그는 집에 돌아와서 가족과 저녁을 먹다가 이런 생각을 한다.

“그날 밤 나는 그녀에게 푹 빠졌다. … 그때까지 나의 마음속에 아무런 이름도 갖고 있지 않던 그 여자가 그날 오후에 내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주었기 때문에 나는 그 다음 날부터 다시 학교에 가기로 맘먹었다. 거기에는 내가 습득한 남성다움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도 어느 정도 있었다. 왠지 힘이 솟는 것 같았고 우월감이 들었으며 학교 친구들과 선생님을 이런 힘과 우월감으로 대하고 싶었다. 나는 가끔 불평만 늘어놓는 형과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여동생까지 그날 저녁엔 그들 모두가 갑자기 사랑스러워 보였다. 나는 마치 우리가 다섯 개의 가지에 다섯 개의 촛불이 켜져 있는 청동 촛대 앞 둥근 식탁에 마지막으로 함께 앉아있는 것 같았다. 가장자리에 초록색 넝쿨 모양이 그려진 낡은 접시의 음식도 마지막으로 먹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며 우리가 그렇게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마지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있었다.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다른 형제들에게 향수를 느꼈다.”

한 번의 사랑의 행위로 곧바로 자기 세계를 떠날 수 있다고, 새로운 인간이 되었다고 호기를 부리는 성급한 그의 입에서 사랑에 관한 가장 신나는 묘사 부문에서 별표를 하나 더 주고 싶은 표현이 나온다.

“당시 한나가 나에게 준 안정감은 실로 놀라웠다. 내가 만난 소녀들은 내가 자기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좋아했다. 나는 나의 몸에 자신이 있었다. 내가 그렇게 충만한 날들을 보낸 적이 없으며 나의 삶이 그렇게 바쁘고 촘촘했던 적은 없었다.”

사랑 때문에 자신감이 생기고 사랑 때문에 삶이 바쁘고 촘촘해졌다는 것은 사랑을 해본 사람은 다 안다. 사랑 때문에 미장원에 가야 하고 사랑 때문에 쇼핑도 해야 하고 사랑 때문에 영화도 봐야 하고 사랑 때문에 일기예보도 들어야 하고 사랑 때문에 봄꽃의 동태파악도 해야 하고 사랑 때문에 비가 오는 날 분위기 좋은 카페도 알아놔야 하고 사랑 때문에 다른 연인들도 눈여겨봐야 하고 사랑 때문에 늙은 부모들의 취향을 알아야 하고 사랑 때문에 떨어지는 빗방울도 조심해야 하고. 사랑 때문에 2층과 3층 사이의 계단을 뛰어다닐 수밖에 없고. 그렇게 뛰어다니는 젊고 마른 남자 아이의 몸을 생각해본다. 그 몸 안에 자기만의 비밀을 간직한 신비롭고 미숙하고 엉큼한 몸. 그 비밀 때문에 팽창하는 몸. 그 비밀 때문에 나는 남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자부심 가득한 몸. 젊은 몸.

“우리의 첫 대화가 있던 날 한나는 내가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지 알고 싶어했다. 나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키케로의 연설문, 헤밍웨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녀는 그리스어와 라틴어 발음이 어떻게 울리는지 알고 싶어했다. 나는 그녀를 위해 오디세이의 한 대목을 읽어주었다. 다음날 그녀와 만났을 때 그녀에게 키스를 하려 하자 그녀는 몸을 뺐다. 그전에 먼저 내게 책을 읽어줘야 해. 그녀는 진지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샤워실과 침대로 이끌기 전 반시간가량 그녀에게 에밀리아 갈로티를 읽어줘야만 했다. 나중엔 나도 샤워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그녀의 집에 올 때 함께 가져온 욕망은 책을 읽다 보면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샤워를 하면서 욕망은 다시 살아났다. 책 읽어주기-샤워-사랑행위, 그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있기. 이것은 우리의 만남의 의식이었다. 때로는 나 스스로 어서 계속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곤 했다.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자 나는 황혼 속에서 그녀와 함께 침대 속에 오래 머물고 싶어서 더 오랫동안 책을 읽었다. 그녀가 잠들고 마당의 톱질소리도 잦아들면, 그리고 지빠귀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부엌에 있는 색색의 물건들도 음영 속에 잠길 때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다.”

이 따뜻한, 섬세한 휘장 쳐진 침대 같은 장면이야말로 내 칼럼 <침대와 책>의 극치다. 이 장면은 사물 하나하나에 몽환적인 개성을 부여하고 있을 한 부산한 녀석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몸답고 있는 이곳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르겠다. 내 침대, 내 잠자리, 내 집, 내 연인.’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소년. 사물 하나하나에 특별하지만 몽환적일 수밖에 없는 개성을 부여하는 그 쑥스럽고 야단스러운 한때를 보내고 어머니께 혼나기 전에 저녁을 먹으러 집으로 후다닥 뛰어 돌아가는 소년.

하지만 바로 이런 일들 때문에, 이런 순간들 때문에 『장미의 이름』의 마지막 문장은 더 이상 쓸쓸하지 않고 따뜻하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남은 게 이름뿐이라 해서 허망할 순 없다. 그 시절은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알려주는 것처럼 너무나 생생하기 때문에. “내가 무언가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을 때면 당시에 겪었던 마음의 상처들이 떠오르고, 내가 죄책감을 느낄 때면 당시의 죄책감이 다시 돌아온다. 내가 오늘날 무언가를 그리워하거나 향수를 느낄 때면 당시의 그리움과 향수가 되살아나곤 한다. 우리 인생의 층위들은 서로 밀집되어 차곡차곡 쌓여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중의 것에서 늘 이전의 것을 만나게 된다. 이전의 것은 이미 떨어져 나가거나 제쳐둔 것이 아니며 늘 현재적인 것으로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내 옆의 남자들이 매력 없고 한심하고 그의 권태와 피곤 때문에 나까지 지칠 땐 실눈을 뜨고 요모조모 관찰하며 그 남자의 첫 경험과 첫사랑을 생각해본다. 사랑에 미쳐 뛰어다녔을 수도 있는 그 남자의 애송이 시절을 생각해 본다. 생각이 안 날 땐 다짜고짜 말해보라고 다그친다. 그럼 턱 밑의 파르스름한 면도 자국 한번 쓰다듬어주었을 어떤 손길들이 (마지막 공룡이 사라지기 직전 최후의 24시간을 생각하는 것처럼 어렵기는 해도) 생각난다. 그래서 그의 등 한 번 툭 쳐 주면서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숨 쉬어.

“이 돌은 그 자체에 하늘의 모습을 담고 있다, 라는 옛말이 그르지 않지. 그러나 이 돌은 사실, 북쪽 땅의 영향을 받는 게 아니라 북쪽 하늘의 영향을 받는 걸로 알려져 있다. 물리적인 인과에 의존하지 않는 거리와 상관없이 작용하는 움직임의 훌륭한 예이지.” 이건 윌리엄 수사가 나침반의 속성에 대해 설명한 이야기다. 이 속성은 사랑에 그대로 부여해도 된다. 끊임없이 떨리면서 한쪽을 집요하게 가리키는 속성. 물리적 인과에 의존하지 않는 거리와 상관없이 작용하는 몸과 마음의 주인공이었던 시절이 있던 사람은 어떻게든 표가 난다. 그는 귀여워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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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혜윤

마술적 저널리즘을 꿈꾸는 라디오 피디. 세월호 유족의 목소리를 담은 팟캐스트 [416의 목소리] 시즌 1, 재난참사 가족들과 함께 만든 팟캐스트 [세상 끝의 사랑: 유족이 묻고 유족이 답하다] 등을 제작했다. 다큐멘터리 [자살률의 비밀]로 한국피디대상을 받았고, 다큐멘터리 [불안], 세월호 참사 2주기 특집 다큐멘터리 [새벽 4시의 궁전], [남겨진 이들의 선물], [조선인 전범 75년 동안의 고독] 등의 작품들이 한국방송대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삶을 바꾸는 책 읽기』, 『사생활의 천재들』, 쌍용차 노동자의 삶을 담은 르포르타주 『그의 슬픔과 기쁨』, 『인생의 일요일들』, 『뜻밖의 좋은 일』, 『아무튼, 메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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